"그래 봤자 바둑"이라고요? "그래도 바둑"입니다!

이서현 2024. 1. 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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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인구 감소, 위기 처한 한국 바둑]
예산삭감, 바둑학과 폐지, 지원도 줄어
"한물간 놀이" 비아냥에 시름 깊어져
바둑문화 사라질라... 인기 회복 안간힘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에서 명지대 24학번 바둑학과 입학생 박기현씨와 60대 남성이 바둑을 두고 있다. 이서현 기자

"툭." "탁."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 둔탁한 돌 소리가 겨울 도심의 고요를 갈랐다. 소리의 정체는 19세 청년(백돌)과 69세 어르신(흑돌)이 벌이는 바둑 대국. 흑돌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 백돌은 조금씩 흑돌의 성벽에 균열을 냈고, 마침내 20분간의 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구경꾼들의 감탄사도 그제야 터져 나왔다. 백전노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승장의 이름은 박기현. 올해 명지대 바둑학과에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이다. 박씨는 "나이를 초월한 놀이, 그게 바둑의 매력 아니겠느냐"며 씩 웃었다.


저변 줄어도, 나에게 바둑은 "놀이·추억·유산"

한국 바둑은 1990년대 이창호라는 천재기사의 등장과 함께 수십 년간 세계 바둑계를 호령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바둑 강국의 지위를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둑계에서는 한국 바둑이 위기라고 한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1980, 90년대를 풍미한 조치훈 9단의 이 말에는 우리 바둑이 처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한바둑협회에 따르면, 2000년만 해도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32%인 1,500만 명 정도로 추산됐으나 올해는 그 비율이 19.4%(800만 명)까지 떨어졌다. 감소세는 가파르다. 관심이 줄어드니 역풍도 없는, "그래봤자 바둑"이다. 반면 "그래도 바둑"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바둑은 놀이고, 추억이고, 유산이다.

4일 서울 서대문구 충암바둑도장에서 어린 원생들이 바둑을 배우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4일 찾은 서대문구 충암바둑도장에선 어린 바둑기사들의 대국이 한창이었다. "44대 28! 이긴 거 같은데?" 6개월 차 신입생 김성아(13)양의 외침에, 김윤준(10)군은 "으악! 복수전해야지!"라며 주섬주섬 새 대국을 준비했다. 김양은 "어려운 상대를 이겨 나가는 재미가 있다"고 밝은 미소로 말했다. 도장 한편에선 사활(돌이 죽고 사는 법) 문제를 푸는 성인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세대를 뛰어넘어 이들에게 바둑은 '놀이' 자체였다.

4일 서울 서대문구 충암바둑도장에서 어린 원생들이 바둑을 배우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바둑학과 신입생 박씨에게 바둑은 '추억'이다. 여섯 살 때 할아버지를 따라 경로당을 다닌 게 시작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빵따냄(4개의 돌로 상대편의 돌 한 점을 둘러싸서 따내는 것) 모양이 좋은 거다'라면서 바둑을 알려주셨어요." 박씨는 "그냥 할아버지와 뭔가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던 것 같다"고 했다.

정봉수 대한바둑협회 회장은 '유산'을 말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오랜 세월 국민을 단단하게 이어준 바둑의 힘이다. 정 회장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대표적 놀이이자, 세대를 초월한 바둑 문화를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협회 예산 '0', 학과 폐지... "그래도 일어서겠습니다"

명지대 18학번 바둑학과 김준식(오른쪽)씨가 아버지와 특정 상황을 전제로 중앙에서부터 바둑을 두는 모습. 김씨 제공

바둑을 사랑하는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바둑 문화의 침체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된다. 명지대는 2년 전 세계 유일의 바둑학과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27년간 프로기사는 물론 강사, PD, 기자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바둑계 산실이었다. 명지대 관계자는 "일단 내년도에도 신입생을 받을 생각이지만, 계획이 바뀔 수 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무엇보다 특정 분야의 퇴보를 상징하는 매개는 돈이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대한바둑협회 예산을 지난해 21억 원에서 전액 삭감했다.

바둑을 옥죄기만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김대용 충암바둑도장 사범은 "학원, 도장, 기원이 많이 사라졌다"며 "저출생이 가속화하고 게임처럼 보다 간편한 놀이가 늘어난 영향"이라고 말했다.

정봉수 대한바둑협회 회장이 4일 세종시 기획재정부 청사 인근에서 인터뷰 도중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기재부는 "대회지원 부문 예산이 과하게 잡혀 있어 깎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지난해 대회예산은 10억 원이었고 만약 대회예산 책정이 과도했다면 보급예산이라도 남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다. 이러다 복지관 교실 등 대중화 사업이 올스톱돼 바둑 명맥이 아예 끊길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주변의 싸늘한 시선도 좀체 견디기 어렵다. 어릴 때부터 바둑이 일상이었던 명지대 18학번 김준식(25)씨는 프로의 길을 포기하고도, '사활을 풀 때의 성취감'을 잊을 수 없어 바둑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다 2022년 9월 학과 통폐합안을 마주했다. 캠퍼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반대 시위를 주도했지만, "바둑 갖고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비아냥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명지대 바둑학과 24학번 학생 박기현씨가 2014년 경기 성남시의 한 꿈나무 바둑대회에서 입상한 뒤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박씨 제공

'그래도' 바둑을 지키려는 이들은 국민스포츠의 영광을 되찾을 날을 포기하지 않는다. 바둑협회는 "추가경정예산 편성 때 보급예산이라도 회복해 달라"며 이달 초부터 세종시 기재부 청사 앞에서 시위 중이다. 입학을 앞둔 박씨는 바둑 애플리케이션(앱) 개발, 교류전 등 바둑의 인기를 되살릴 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안타까워할 시간은 지났어요. 용기를 내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입니다." 김씨가 바둑학과 폐지에 맞서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이서현 기자 he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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