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게임의 종착점 ‘킬 스크린’

김성민 논설위원·디지털기획팀장 2024. 1. 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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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30년 전쯤 초등학생 시절 한 친구는 오락실에서 죽치고 살았다. 100원 동전 하나면 한두 시간은 거뜬했다. 친구가 게임을 하면 갑자기 화면이 멈추거나 꺼지는 현상이 자주 벌어졌는데,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오락실 주인이 수상쩍었다. 이제 그만하고 꺼지라는 일종의 ‘킬 스크린(Kill Screen)’이었던 셈이다.

▶지난달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사는 13세 소년 윌리스 깁슨이 인류 최초로 ‘테트리스’를 정복했을 때도 킬 스크린이 떴다. 킬 스크린은 게임의 특정 레벨에 도달하면 더는 플레이가 불가능한 지점이다. 게임기 메모리가 작아 플레이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 화면이 멈추거나 깨지는 것을 말한다. 깁슨은 테트리스 게임 레벨 157에 도달했고, 그대로 화면은 멈췄다.

▶킬 스크린은 테트리스에만 있는 게 아니어서 고전 게임의 실질적 엔딩으로 여겨진다. ‘팩맨’은 레벨 256에서 왼쪽 화면은 정상적으로 나오지만, 오른쪽 화면은 숫자와 문자가 뒤죽박죽돼 깨진다. 8비트로 저장된 게임 데이터가 255번까지만 가능하고 256번째 값은 불러올 수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풍미한 ‘갤러그’도 255스테이지를 깨면 다음 스테이지가 0으로 바뀌면서 게임이 강제 종료된다. ‘동키콩’은 22번째 레벨에 도달하면 게임 스테이지를 완료할 시간을 4초밖에 주지 않는다. 당연히 깰 수 없다.

▶킬 스크린은 개발자가 게임을 설계하며 게이머들이 실제로 도달하지 못할 것으로 본 지점이다. 설마 이 지점까지 플레이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프로그래밍적 오류를 방치한 결과다. 하지만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었다. 테트리스 게이머들은 엄지·검지·중지로 빠르게 방향 키를 누르는 ‘하이퍼 태핑’과 오른손 엄지를 방향 키에 대고 조이스틱 뒷부분을 왼손으로 빠르게 치면서 그 반동으로 방향 조절을 빠르게 하는 ‘롤링’ 기법으로 테트리스를 공략했다. 2020년엔 테트리스 최고기록이 레벨 34에 불과했지만 숱한 시도와 노력으로 2년 후엔 레벨 95를 기록했고, 드디어 깁슨이 이 게임을 정복했다.

▶테트리스의 킬 스크린이 세계적 화제가 된 것은 인공지능(AI)만 가능했던 것을 인간도 이뤄냈다는 점에 있다. 바둑·체스는 물론 레이싱 게임을 포함한 각종 비디오 게임에서도 AI는 인간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도 정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테트리스 게이머들은 ‘하이퍼 태핑’이 벽에 부닥치자 ‘롤링’ 기술을 고안해 결국 킬 스크린의 종착점까지 갔다. 상상력과 창의력, 도전 정신으로 한계를 돌파해가는 것이 인류라는 종(種)이 진화해온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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