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미로’ 통영, 빛으로 길을 내다

이윤정 기자 2024. 1. 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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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일출. 이윤정 기자

통영은 예술의 미로다. 다도해를 바라보며 촘촘히 이어진 골목을 돌아 나설 때마다 통영에 흔적을 남긴 예술가들의 이름이 바뀐다. 통영에서 배출한 예술가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통영우체국에선 청마 유치환이 시조 시인 이영도에게 연서를 보냈고, 바로 옆 작업실에선 시인 김춘수, 화가 전혁림, 작곡가 윤이상이 모여앉아 예술을 논했다. 몇 걸음만 옮기면 소설가 박경리가 어린 시절 거닐었던 골목이 펼쳐지고, 강구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윤이상이 악상을 떠올렸던 파도 소리가 지척에서 따라붙는다. 통영에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교가하며 미로처럼 길을 낸다.

통영이 품어낸 이야기는 지금도 다양한 예술로 변주되고 있다. 최근 스크린에서 <노량: 죽음의 바다>로 되살아난 이순신 장군 이야기도 통영 앞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남쪽 바다를 지켜낸 동피랑과 서피랑은 2년마다 새 벽화로 단장하고 방문객을 맞는다. 지워진 벽화는 밤이 되면 남망산조각공원에서 ‘빛’으로 부활한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통영은 자연과 역사, 예술과 문화가 어우러진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통영 디피랑. 이윤정 기자
골목마다 ‘예술가의 길’

산과 바다를 감싸안으며 이어진 통영의 길은 마치 실핏줄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어느 지점에서 여행을 시작해도 무방한 이유다. 그래도 통영 사람들에게 물으면 여행의 시작점으로 ‘강구안’을 꼽는다. 중앙·항남동 등 일부 해안을 옛날부터 강구안이라 불렀는데 ‘개울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이다.

통영은 조선시대 충청·전라·경상 삼도수군의 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1604년 설치돼 1895년 폐지될 때까지 통제영은 한반도 남쪽 해상을 지키던 요새였다. 통영의 이름은 통제영에서 유래됐다. 강구안에서 발걸음을 옮기면 동쪽부터 동피랑, 남망산공원을 거쳐 북쪽의 통영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과 통영충렬사, 서쪽의 서피랑으로 이어진다.

강구안. 이윤정 기자

과거 강구안은 땅이 바다를 둥그렇게 깊숙이 끌어안은 모양새였다. 박경리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고성반도에서 한층 허리가 잘리어져 부챗살처럼 퍼진 통영 … 고깃배, 장배가 밀려오는 갯문가, 둥그스름한 항만”이라고 강구안을 묘사했다. 그러나 현재 강구안은 소설 속 모습과는 다르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부터 1960년대까지 매립돼 육각형 모양 포구로 변했다. 강구안 앞뜰은 문화마당으로 꾸며졌고, 조선시대 군선인 판옥선과 거북선 등 조형물이 강구안을 지키고 있다.

강구안부터 천천히 산책하듯 통영을 거닐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술 이야기에 빠져든다. 강구안 매립지에 들어선 중앙시장 동쪽 골목으로 김춘수 생가, 유치환 생가 터가 펼쳐진다. 중앙시장에서 서쪽으로 향하면 통영 중앙동우체국이 나온다. 이곳에서 세병관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청마거리’라 부른다. 청마 유치환은 이 거리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며 시 ‘행복’을 써 내려갔다.

청마거리를 지나면 시조 시인 초정 김상옥 거리가 나온다. 항남1번가인 이곳은 통영 문화1번지로도 통한다. 1926년 근대 최초의 시조 동인지 ‘참새’를 발간했던 이들이 이곳에 머물렀고, 이후에도 통영 문화예술인들이 교류하고 소통한 곳이어서다. 초정거리를 지나 쌈지공원에 들어서면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김춘수 동상을 만난다. 시 ‘꽃’으로 유명한 김춘수는 서울에 머물면서도 늘 통영을 그리워했다. 시인은 “바다, 특히 통영 앞바다-한려수도로 트인 그 바다는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김춘수 생가. 이윤정 기자
시상·악상·색상이 떠오르는 곳

다시 강구안에서 서쪽으로 걸으면 박경리의 길이 펼쳐진다. 옛 통영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였던 서문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을 ‘서문고개’라 한다. 이 고개를 넘어 좁은 골목 안에 박경리 생가가 자리한다. 한두명이 겨우 지나는 좁은 골목을 따라가면 <김약국의 딸들> 배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소설에 나오는 ‘간창골’ 지명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간창골은 관청이 있던 골목을 뜻하는 말이다. 통영성 내 9개 공동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주민들은 ‘간창골새미’라고 부른다. 간창골 좁은 골목에서 성장한 박경리는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통영 충렬학교 총각 교사와 재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박경리는 얼마 후 통영을 떠났다가 50여년이 흐른 뒤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 현재는 바다가 보이는 미륵산 기슭에서 영면에 들어 있다. 인근에는 박경리 기념관이 세워졌다.

박경리 기념관. 통영시청 제공

통영에서 악상과 색상을 떠올린 예술가도 있다. ‘색채의 마술사’ 전혁림 화백은 통영 전통 건축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김춘수 시인은 “오늘도 전혁림은 용화사 단청만 바라보았다”는 시구를 남겼다. 통영 미륵산 기슭에 있는 용화사는 화백의 연구주제가 됐고, 그의 작품은 우리 고유의 색과 재료에서 탄생한 추상화로 재구성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 화백의 통영항 그림을 직접 구입해 청와대 영빈관에 걸어둔 일화도 유명하다. 전혁림미술관은 미륵도 용화사 가는 길에 세워졌다. 독일에서도 늘 고향 통영을 그리던 윤이상 생가 터는 이제 기념공원이 됐다. 윤이상은 광복 후 통영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이 지역 학교들의 교가를 만들었다.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등은 교가에 가사를 붙였다. 매년 봄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모여 윤이상의 음악을 기린다. 통영의 봄 바다는 매년 선율로 물든다.

통영에서 나고 자란 예술가들만 이곳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1950년 봄 유치환과 통영 곳곳을 돌아본 시인 정지용은 연작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까지 표현했다. 1935년 우연히 만난 통영 처녀에 반한 백석은 통영을 수차례 찾으며 시를 썼다. 백석은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라며 시에 그리움을 새겼다. 1952년부터 3년간 통영에 머물렀던 화가 이중섭은 대표작 ‘흰 소’ ‘황소’ 등을 이 시기에 그렸다. ‘세병관 풍경’ ‘통영 앞바다’ 등 통영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다수다. 예술가들이 한 시대 통영에서 교류하며 예술의 꽃을 피우던 시기를 두고 ‘통영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왔다.

통영 바다
역사와 예술로 새로운 길을 내다

통영이 이토록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 윤이상은 “통영의 잔잔한 바다, 물색, 파도 소리가 음악으로 들렸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예술의 힘을 키워낸 건 오직 아름다운 풍광만은 아니었다. 그 힘의 뿌리를 이순신 장군부터 찾는 이도 적지 않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의 좌수사였다. 전라도를 지키던 그가 통영~거제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인 이유는 왜군의 뱃길을 끊기 위해서였다. 그해 7월 한산도대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이듬해 진영을 한산도 두을포로 옮겼다. 현재 한산도 제승당으로 가는 길목의 포구다.

이후 경상, 전라, 충청 수군의 총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이 지금의 통영 땅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남쪽 작은 바닷가 포구에도 변화가 일었다. 통제영에 군수물품을 납품하려 조선팔도 장인들이 몰려들었다. 수려한 자연환경과 조선 최고의 공예술은 통영을 자연스럽게 예술의 도시로 성장시켰다.

동피랑. 이윤정 기자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는 다양한 예술로 재탄생하고 있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영화 <노량>을 비롯해 이순신 장군 3부작 중 하나인 <한산: 용의 출현>은 한산도를 배경으로 한다. 통영 바다를 마주하면 역사가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케이블카를 타면 걸어서 40분 만에 미륵산 정상에 닿는다. 미륵산 전망대에 서면 통영 앞바다에 알알이 박힌 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통영에는 2021년 기준 570개의 섬이 있다. 1004개 섬을 품은 신안 다음으로 국내에서 섬이 많은 땅이다. 거제 지심도, 한산도를 넘어 저 멀리 우도와 욕지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진면모가 펼쳐진다.

미륵산 전망대에서 방문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윤정 기자

조금 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한산도행 배에 오를 것을 권한다. 유람선과 요트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여행객을 통영 선착장에서 한산도로 실어나른다. 크고 작은 섬을 지나다 보면 거북선 모양을 본뜬 등대가 방문객을 반긴다.

한산도 유람선 코스는 대부분 제승당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이 참모들과 작전 협의를 하며 해전을 이끈 곳이다. 당시에는 ‘운주당’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1740년 중건하면서 제승당이 됐다.

거북선 모양 등대. 이윤정 기자

갯벌 해변을 끼고 오솔길을 지나면 한산문, 대첩문, 충무문이 차례로 나온다. 제승당 경내 오른쪽에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를 읊은 수루가 보인다. 왼쪽엔 충무공 영정을 모신 충무사 등이 자리했다.

다시 통영 도심으로 돌아와 세병관에 서니 통영 지리가 한눈에 이해된다. 세병관 통제영의 중심 건물이다.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의 현판이 붙어 있다. 일제가 통제영을 폐쇄하고 난 뒤 세병관 건물은 학교로 쓰이기도 했다.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높은 벼랑’이라는 뜻의 토박이말이다. 원래 동피랑과 서피랑은 피란민들이 모여든 달동네였다. 2000년대 중반 낡은 동네를 철거하겠다는 계획이 나오자 주민들은 마을을 보존하자며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동피랑은 통영을 대표하는 명소가 됐다. 현재는 2년에 한 번씩 벽화를 새롭게 그리고 있다. 서피랑은 일주도로를 개통하고 공원을 만들어 여행객을 반긴다.

동피랑과 서피랑의 이야기는 밤이 되면 더 환하게 피어오른다. 남망산공원에 조성된 디지털 테마파크 ‘디피랑’에서 지워진 벽화들이 미디어아트로 새롭게 탄생했다. 2020년 10월 개장한 디피랑은 1.5㎞ 산책로에 15개 테마공간으로 구성됐다. 테마공간 중 가장 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건 ‘비밀공방’이다. 배드민턴장을 대형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만들었다. 통영의 과거와 현재,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영상과 음향이 흘러나온다. 디피랑에서 내려다보는 통영의 야경 또한 수려하다. 겨울밤 청명한 하늘에 디피랑 불빛이 어우러지며 ‘예술의 미로’ 통영은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여행정보

*대중교통편: 서울~통영,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11회(06:20~23:00) 운행, 약 4시간10분 소요. 통영종합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일반버스 101·141·200번 등 이용 강구안 문화마당 정류장 하차.

*먹거리: 지금 통영은 굴이 제철이다. 다양한 해산물을 함께 먹고 싶다면 통영중앙시장을 찾는 것이 좋다. 꿀빵과 충무김밥도 통영이 원조다.

*사진맛집 숙소: 통영금호마리나리조트는 방에서 다도해 너머 일출이 보인다. 요트로 한산도까지 다녀올 수 있다.

*디피랑: 운영시간(동절기) 오후 7시부터 자정까지(월요일, 1월1일, 명절 당일, 공휴일 다음날 휴장), 입장료는 어른 1만5000원, 청소년 1만2000원, 어린이 1만원. 휠체어·유아차 관람이 가능하다. 다만 테마 사이사이 이동하는 구간이 어두우므로 손전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통영관광정보센터: (055)650-2570

통영|글·사진 |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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