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음력설’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2024. 1. 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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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차이나타운의 설날축하 행사.위키미디어 제공

UN이 지난 연말 ‘음력설’(Luna New Year)을 ‘선택 휴일’(floating holiday)로 지정했다. 물론 UN의 모든 회원국이 음력설을 휴일로 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택 휴일에는 공식적으로 회의를 개최하지 않고 직원들은 유대교의 욤 키푸르와 불교의 석가탄신일 등 8개 선택 휴일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해서 유급 휴가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UN의 결정으로 중국 정부는 당연히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전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다양한 형태로 춘제(春節)을 맞이하고 있다. 춘제가 끊임없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세계는 춘제를 뜨겁게 품고 있다’고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중국을 빼더라도 음력설을 쇠는 사람들이 2억 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UN에 근무하는 중국인 직원들의 인식이 중국 정부와는 달랐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휴일의 이름을 ‘중국설’(Chinese New Year) 대신 ‘음력설’로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UN이 중국어로 밝힌 성명서에 따르면 그렇다. 아시아 각국의 지지를 받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김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자신들의 유치한 문화패권주의가 아시아에서 적지 않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설날에 먹는 떡국. 위키미디어 제공

● 새해의 첫날

우리는 새해의 첫날을 ‘설날’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태음력을 사용하던 우리에게 설날은 당연히 초승달이 뜨는 음력 정월 초하루였다. 모든 음력 명절이 그렇듯이 음력 설날은 해마다 들쭉날쭉이다. 설날은 대체로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인 대한(大寒. 양력 1월 21일)에서 새해의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 양력 2월 18일) 사이에 온다. 푸른 용의 해인 갑진년의 설날은 2월 10일이다.

고종 황제가 을미개혁(1896년)으로 오늘날 ‘양력’이라고 부르는 ‘그레고리력’을 도입하고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설날에 대한 혼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지(冬至, 양력 12월 21일)로부터 열흘이 지난 양력 1월 1일이 새로운 ‘설날’이 되었기 때문이다. 

1895년 11월 중순까지 음력을 사용하던 대한제국이 한 달 반을 건너뛰어 새로운 새해를 선포했다. 세계 표준으로 알려지고 있던 달력을 받아들여서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시도였다.

덕분에 전통적인 음력설은 ‘옛날의 설날’이라는 뜻의 ‘구정’(舊正)으로 밀려나 버렸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가 이중과세(過歲)에 의한 불필요한 낭비를 막겠다고 음력 설날의 성묘와 세배를 금지하기도 했다.

비록 계절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못하고 책력을 만들기도 어려운 태음력의 전통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놀라웠다. 지금도 설날을 비롯한 음력 명절(名節)에는 여전히 고향을 찾기 위해 거국적인 민족 대이동이 벌어진다. 생일이나 기일(忌日)을 음력으로 챙기는 가정도 적지 않다. 

결국 우리 정부도 도도한 국민 정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85년부터 음력 설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민속의 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는 음력 설날의 이름을 ‘설날’로 변경하고 연휴 기간도 3일로 연장했다. 1월 1일은 하루를 쉬는 ‘신정’(新正)으로 격하된 상황이다. 

세월의 흐름에 ‘시작’과 ‘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타원형 궤도에서 분명하게 구분되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을 시작점으로 선택하는지에 상관없이 지구가 365일에 태양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같은 계절이 되돌아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설날은 천문학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태양이 가장 높이 뜨는 남중 시각을 정오(낮 12시)로 정하는 ‘시간’의 경우와는 사정이 상당히 다른 셈이다. 오히려 설날은 계절을 파악하고 종교적·전통적 축일(祝日)을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달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명절이다. 

지금도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서는 음력 설날을 새해의 시작을 뜻하는 전통 명절로 여기는 나라가 많다. 중국과 대만에서는 ‘춘제’(春節)라고 부르고 베트남에서는 ‘뗏’(TET)이라고 부르는 음력설이 연중 가장 요란한 명절이다. 심지어 양력 1월 1일을 ‘설날’이라고 부르는 북한도 1989년부터 음력설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렇다고 모든 나라가 양력이나 음력 1월 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전통이나 종교적 이유로 자신들만의 고유한 설날을 즐기는 국가나 민족도 많다. 유태인은 늦여름이나 이른 가을의 설날을 로시 하샤나(Rosh Hashana)라고 부르고 이슬람 교도는 라스 앗싸나(Ras as-Sana)라고 한다. 인도의 힌두교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 무렵인 3월과 4월 중순의 축일을 설날로 기린다.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거센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위해 양력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연‧월‧일의 구분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1970년 1월 1일에 자정에서부터의 시간을 ‘초’(second) 단위로 표시한 ‘UNIX 타임’도 있다. 물론 컴퓨터의 OS에서 사용하는 UNIX 시간은 일상생활에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달력(그레고리력으로) 개정을 위한 교황의 칙서.위키미디어 제공

● 달력은 권력의 상징

농경 사회에서 계절을 알려주고, 종교적인 축일을 결정하고 세금 징수에 유용했던 달력은 처음부터 막강한 국가 권력의 상징이었다. 정부가 만들어서 제공하는 ‘달력’이 있어야만 계절과 축일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달력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자연 현상에서 시작한다. 음력에서는 주기적으로 차고 기우는 달의 위상을 이용한다. 회회력(回回曆)이라고 알려진 이슬람의 마호메트력이 가장 전형적인 음력이다. 

1년을 29일(짝수달)과 30일(홀수달)로 구성된 12개월로 구분한다. 그러나 1년이 354일에 불과한 회회력으로는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 계절은 달의 위상 변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계절이 음력으로 정해진다는 인식은 24절기를 표시한 ‘책력’(冊曆)을 사용하던 시절에 시작된 잘못된 속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회력에 태양의 공전주기인 365일을 반영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적절하게 ‘윤달’을 배치해야만 한다. 19년에 7번의 윤달을 끼워 넣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고도의 천문관측 기술이 필요했다. 계절의 변화에 대한 정보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농경 문화권에서는 태음태양력을 제작하는 일이 국가의 가장 막중한 업무였다. 

우리도 중국에서 개발된 ‘중국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중국이 편찬한 ‘책력’(冊曆)은 공짜가 아니었다. 중국에 엄청난 규모의 조공(朝貢)을 제공해야만 했다. 달력은 전통적인 기술 패권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양력’으로 알려진 그레고리력은 1582년에 처음 등장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레고리력의 가장 큰 장점이다. 1년 365일을 30일과 31일로 구성된 12달로 구분한다. 다만 2월은 28일로 하고 4년마다 2월에 윤일을 둔다. 장기적으로 태양의 공전주기를 맞추기 위해서 100으로는 나누어지지만, 400으로는 나누어지지 않는 해에는 윤일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레고리력의 1년은 평균 365.2425일이다.

계절의 변화는 지구 자전축이 공전 궤도에서 23.5도만큼 기울어져 있어서 나타나는 자연 현상이다. 북반구에서는 자전축이 태양을 향하고 있는 여름에는 태양의 남중 고도가 높아지고, 낮의 길이가 길어진다. 반대로 자전축이 태양에서 먼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겨울에는 태양의 남중 고도가 낮아지고, 밤의 길이가 길어진다.

그런 계절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한 달력은 그레고리력뿐이다. 그래서 낮이 가장 긴 ‘하지’(夏至)는 거의 언제나 6월 21일이고,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는 거의 언제나 12월 21일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은 거의 언제나 3월 21일과 9월 23일이다. 

우리를 포함한 동양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24절기가 모두 그레고리력에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도 매년 달력을 새로 인쇄해야 하는 이유는 계절과 상관없이 정해지는 7일 주기의 ‘요일’을 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달력을 만들어서 국가 권력의 횡포를 막아주고, 세계화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과학의 힘이다.

그레고리력의 뿌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5년에 만든 율리우스력이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춘분을 포함하는 ‘마르티우스’(오늘날의 3월)에서 시작하는 10개월 304일로 구성되어 계절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었던 로마력을 개정했다.

그래서 10번째 달이었던 ‘디켐브리스’(오늘날의 12월) 다음에 두 얼굴을 가지고 성문을 지키는 ‘야누스’에서 유래된 ‘야누아리우스’(오늘날의 1월)와 정화(淨化)를 뜻하는 ‘페브루아리우스’(오늘날의 2월)를 넣어서 1년을 365.25일로 만들었다.

자신의 문화적 전통을 전 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심정을 탓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억지는 중국에 대한 거부감만 증폭시킬 뿐이다. 중국의 억지에도 불구하고 야체와 젓갈을 섞어서 만드는 ‘김치’는 ‘파우차이’(泡菜)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음식이다. 물론 UN이 매년 발행하는 기념우표의 ‘중국설’(Chinese New Year)은 ‘음력설’(Lunar New Year)로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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