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세상에 나가면 일곱 번을 태어나라

2024. 1. 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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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묵은해와 헤어지기 직전 집에서 멀지 않은 강변에 나가 혼자 마지막 해를 전송했다. 둥근 빵 같고, 방금 딴 오렌지 열매 같은 해는 밤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새날이 밝고 해가 떠올랐다. 새해의 첫해는 동해의 간절곶만이 아니라 페루 마추픽추에도, 바오밥나무가 자라는 마다가스카르에도, 중국 소수민족인 위구르족 마을에도 떠올랐다. 임진강변 갈대들은 시들어 갈색으로 서걱거리고, 갈대숲에서는 어린 고라니가 먹이를 찾는다. 너른 습지와 들판에는 저 몽골이나 시베리아같이 북쪽 추운 나라에서 날아온 독수리들이 내려앉아 먹이를 찾고 휴식을 취한다.

 뜯지 않은 선물처럼 새해가 왔다

묵은해도 참 다사다난했다. 비가 기록적으로 많이 내렸다. ‘극강호우’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여러 도시가 물에 잠겨 큰 수해를 입었다. 길거리에서 흉기를 휘둘러 애꿎은 목숨을 빼앗는 묻지 마 범죄자들이 날뛰고 물가는 치솟았다. 갈수록 사는 게 힘들어지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독자가 줄고 출판계에 몰아닥친 불황은 심각했다. 책이 안 나가는 일은 파피루스 이후 최고라며 한 출판인은 비명을 질렀다!

아기가 덜 태어나자 매체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밑바닥이라는 저출산이 나라의 소멸로 이어질 거라고 경고한다. 소모적인 싸움을 일삼는 양당 정치에 변화의 기미가 생길 기대는 난망했다. 그런 소용돌이에서 우리 삶은 불행해지고, 희망과 낙관의 근거들은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별들은 제 궤도를 돌고 밤과 낮, 계절은 규칙적으로 순환한다. 우주의 질서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덕분에 우리는 새해를 맞는다. 묵은해의 눈이 응달진 곳에 쌓였는데 새해가 포장을 뜯지 않은 선물처럼 도착했다. 설레며 받은 이 선물은 하루 24시간, 365일로 채워진 것이다. 이것을 지혜롭게 쓰는 이들은 아이를 반듯하게 양육하고, 보람된 일로 충만감을 얻고, 제 사업을 부흥시키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어 별이 돼 빛나기도 한다. 하지만 우둔한 이들은 그걸 함부로 써서 감옥에 가거나 탐욕으로 제 생을 망쳐버린다.

돌아보니 묵은해에도 내 삶은 대체로 조촐하고 평범했다. 나는 탐조일지를 쓰지 않고, 새들이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까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감히 가슴 뛰는 사랑을 꿈꾸지 않고, 난민을 구제한다는 유니세프 모금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내게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죽은 이모도 없고, 큰 유산을 남겨줄 조부모도 안 계신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유산을 상속받아 부자가 될 확률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신문에 기고할 산문 몇 쪽을 쓰고, 새 모이만큼 작은 식량을 축내며 소규모의 삶에 만족하며 지냈다.

그럼에도 나는 묵은해에도 여전히 사과 한 알을 먹고 산책에 나서며 책을 부지런히 읽은 것에는 보람을 느낀다. 나는 예산에서, 영주에서, 청송에서 올라온 사과들을 먹었다. 달콤한 사과의 풍미를 만끽하며 그것을 베어 먹는 기쁨은 컸다. 강변에 나가 강물을 바라보다가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큰 과오로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사회에 물의를 빚지도 않았으니, 참 다행한 일이다. 사회에 기여를 한 바는 없지만 끼니 거르지 않고 소소한 보람이나마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자랑삼을 만하다.

누가 우리보다 더 가난하고 더 하염없는 이 사람을 아시나요? 그는 비누공장 노동자와 세탁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에 돼지치기 일을 시작하고, 아홉 살에 자살 기도를 한다. 식량 배급소에서 밤새 줄을 서고, 역에서 훔친 나무와 석탄을 땔감으로 썼다. 그는 가난으로 온갖 궂은일을 했다. 신문팔이, 행상, 청소부, 공사장 인부, 시인, 번역가 등 서른두 가지의 직업을 가졌었다. 시집은 선동 혐의로 압수당하고 반역죄, 간첩죄 등으로 강제노역형을 선고받는다. 서른두 살에 화물열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헝가리 국민시인 어틸러 요제프의 이력이다.

서가에는 요제프의 시집 몇 권이 꽂혀 있다. 내가 여러 번에 걸쳐 즐겨 읽은 시는 ‘일곱 번째 사람’이다. “세상에 나가면 일곱 번 태어나라”고 요제프는 노래한다. “불난 집에서/ 눈보라 치는 빙원에서/ 광란의 정신병원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밀밭에서/ 종이 울리는 수도원에서/ 비명을 지르는 돼지우리에서/ 여섯 아이가 울었어도 충분하지 않아―/ 너 자신이 일곱 번째 아이라야 해!” 나는 한겨울에 시골집 아랫목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한 번 태어나는 것도 고달픈 일인데, 일곱 번이나 태어나라니! 누군가는 깊은 탄식을 내뱉을 수도 있겠다.

 더 많이 꿈꾸고 더 많이 실행하자

지금 나는 몇 번째 생을 지나고 있을까를 묻는다. 누군가는 첫 번째 삶을, 누군가는 두 번째 삶을, 누군가는 세 번째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나는 아직 다섯 번째 삶에 도달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이 세계는 우리의 생이 펼쳐지는 무대다. 새해에는 이 무대 위에서 나의 배역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더 많이 꿈꾸고 더 많이 실행하자. 나날의 삶을 탐닉하자! 삶에 대해 숙고하고,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봄날의 모란꽃과 가을 하늘의 푸름에 스민 아름다움을 만끽하자. 지금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걸 찾기는 어렵다.

묵은해를 건너기 위해 분주했던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어깨를 다독여 주자. 자기혐오와 무력감과 분노 따위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자. 이제 일곱 번째의 삶을 살도록 애쓰자. 남이 주문하는 대로가 아니라 제 뜻과 의지로 충만하게 살자.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좋아하는 책을 읽고,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듣자. 우리 생명은 주어진 시간을 아낌없이 쓰고 원자 하나하나를 연소시키며 흩어진다. 그게 삶이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삶은 생의 의미를 탐구하고 찾는 진지한 여정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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