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총수·조폭 잡던 베테랑 형사, 재개발 비리 밝히러 조합장 선거 나선다

전현진 기자 2024. 1. 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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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31일자로 명예퇴직하는 오영승씨. 경찰 생활 30여년 동안 수사 부서를 두루 거친 베테랑 형사다. 전현진 기자

지난 11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습관처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영승입니다.”

통화가 이어지면서 퇴직 후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던 계획이 조금은 미뤄질 수 있겠다는 걸 직감했다.

오영승씨(60)는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띄는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 발과 손도 웬만한 성인 남성의 두 배로 느껴질만큼 크다. 짙은 눈썹과 선명한 쌍꺼풀까지 갖고 있어 스쳐 봐도 쉽게 잊히지 않는 강하고 투박한 인상을 지녔다. 하지만 그는 늘 신중하게 고민한다. 30년 넘게 ‘형사’로 살아온 버릇이다.

오씨는 1992년 경찰관이 돼 28년 이상을 수사 부서에 있던 베테랑 형사였다. 서울지방경찰청 도범계와 폭력계, 조직폭력수사대, 광역수사대의 지능팀과 강력팀, 경찰청의 특수수사과와 범죄정보과 등에서 일했다. 일선 경찰서에서도 주로 강력팀에서 근무했다.

조직폭력배가 연루된 수사에 잔뼈가 굵었지만, 실제 전공은 지능범죄다. 비리에 개입된 많은 고위 공무원과 공기업 임원들이 그에게 붙잡혔다. 한 번은 수천억원 매출을 올리는 사설 카지노 업체를 추적해 실소유주들을 찾아내고 숨겨둔 범죄 수익을 몰수보전했다.

몰수보전은 범죄자가 몰수될 재산을 은닉하고 처분하기 전에 사전에 확보해 두는 절차를 말한다. 검찰이 청구해 시행되지만 오씨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부터 몰수보전이 이뤄져야 신속한 범죄 수익 환수가 가능하다고 판단해 이를 활성화하는 데 일조했다.

이렇게 치열했던 경찰 생활을 마무리할 정년퇴직이 1년쯤 남은 시점에 전화가 울린 것이다. 다른 동료들처럼 퇴직 후 평범한 삶을 고민하며 마지막 경찰 생활의 한 해를 맞이하려던 때였다. 전화속 상대는 그가 17년 넘게 살아온 서울 성북구 삼선동 삼선교 부근 재개발조합의 조합원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눴다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번 재개발조합장 선거에 출마해 주세요.”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서 재개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전현진 기자
재벌 총수 구속한 베테랑 형사

‘오영승’이라는 이름은 2007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적이 있다. 당시 한화그룹 총수의 ‘보복 폭행’ 사건에서다. 둘째 아들을 때린 술집 종업원들을 불러 자신의 경호원을 대동해 폭행한, 일명 ‘청계산 폭행’이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형사였던 오씨는 이 사건의 첩보를 입수해 피해자 조사를 마치고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전직 경찰청장까지 동원돼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시도가 벌어졌다. 이 같은 수사 무마 시도는 영화 ‘베테랑’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같은 은폐 시도가 언론 보도로 알려지면서 결국 수사가 이어졌다.오씨는 결국 재벌 회장을 구속시켰고 법정에 세운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경찰이 대기업 회장의 폭력 사건을 성역 없이 수사한 최초의 일로 평가받았다.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수사한 오씨를 향해 박수가 쏟아졌지만 상처 뿐인 영광으로 남았다. 경찰 지휘부는 물론 권력의 눈 밖에 났는지, 여러 수사 및 감찰 기관의 표적이 됐다. 수백 일간 부당한 감찰을 받았다는 그의 사연은 2008년 내내 언론에 오르내렸다. 한 곳의 수사기관에서 수사받아도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일이 여전히 벌어진다.그는 아직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머리가 핑 돈다.

굴하지 않고 경찰 생활을 이어갔다. 건설 관련 비리를 수사하고 필리핀의 수사 기관까지 개입된 셋업 범죄(조작된 사건을 뒤집어씌워 돈을 뜯어내는 계획 범죄)도 해결했다. 여러 부서를 오가면서 사건의 크기는 달라졌지만 어떤 사건이든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신중하게 고민했다.

오씨는 “내가 깡패 잡는 사람인데, 깡패한테 피해 당했다고 생각하니 우선 화가 나서 며칠 동안 잠이 안 오더라”라고 말했다. 전현진 기자
우리 동네 재개발 사업에 조폭이?

세월이 흘렀다. 보직은 서울 성동경찰서 강력3팀장. 예정대로라면 1년여 후인 2024년 12월 31일이 정년이다. 전화 속 이야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가 17년 넘게 산 삼선교 일대는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몇 해 전 이주를 마쳤고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 역시 조합원이었다.

“조직폭력배가 조합장 선출에 개입하고 있어요.” 전화를 건 이는 조합장 선거에 나가려다 출마를 포기한 참이라고 설명했다.

전화 속 이야기를 정리하면 조직폭력배와 관련된 이들이 조합 사무실을 드나들고 조합장 선거를 둘러싸고 관계자들을 협박하는 등 판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출마를 설득하는 다른 조합원들은 겁에 질린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동안은 외부세 력의 이권 개입 의혹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는데, 재개발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었다. 시공사 선정부터 조합의 임원 선출, 하청업체 선정 등에 깡패들이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권에 개입하는 조직이 한 곳 이상이라는 말도 나왔다.

해당 지역의 재개발을 둘러싸고 조직폭력배의 이권 개입 의혹이 계속됐다. 2011년에는 실제로 재개발 이권을 두고 다투는 조직폭력배들 간의 흉기 난투극이 벌어져 언론에 보도됐다.


☞ 강북지역 토착 조폭 31명 무더기 검거 - 뉴스1
     https://www.news1.kr/articles/?380211

재개발 사업에 ‘검은 세력’이 개입했다면 조합원들의 재산에 피해가 가는 건 뻔한 일이다. 조직폭력배 잡던 베테랑 형사인 자신도 조합원으로서 피해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 이곳의 재개발 실태를 취재했던 지역 언론 관계자는 조직폭력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권에 개입하려는 외부세력에 대한 말을 들은 바 있다고 했고, 한 조합원은 “깡패들에게 협박을 당했다”고 했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재개발 과정에 조직폭력배들이 개입한다는 의혹은 그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활동이 쉽게 포착되지 않았고, 현직 경찰관이었기에 조합 일에는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이제 표면적으로 의혹이 불거지면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어떤 책임감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밝히고 알려야죠.” 그는 말했다.

오씨는 재개발 사건을 둘러싼 비리와 이권 다툼에 대해서 잘 알았다. 2005년 한 대형 건설사의 재개발 비리를 수사해 이 회사 임원과 지자체 간부, 이권에 개입한 조직폭력배와 조합장의 실체를 밝혀낸 바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재개발 비리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했었죠. 이 사건으로 특진까지 했으니까요.”

그는 조폭의 이권 개입이 과거처럼 재개발 동의를 강요하는데 동원되거나 세입자들을 쫒아 내고 철거하는 일에 투입되는 식이 아니라고 했다. 앞뒤로 대리인을 내세우고 재개발을 위해 오가는 돈을 여러 명목으로 중간에 가로채는 방식으로 돈을 뜯어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곳 조직폭력배들이 개입하는 게 이 재개발 현장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 재개발 현장의 이권에 기업형으로 개입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해 부동산 재벌이나 회장님 행세를 한다고 해요.”

오씨는 “믿을 만한 관계자들의 증언을 듣고 있지만, 많은 시민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고 이를 제지하는 사람도 없다”고 덧붙였다.

“깡패들이 재개발에 개입하면 주민들이 할 수 있는 게 없게 되고, 평범했던 이들 중에도 추종세력이 생겨날 수 있어요. 사실을 확실히 밝히고 진실이라면 널리 알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영승씨는 재개발 조합장 선거에 나서는 이유로 “검은 세력의 개입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전현진 기자
“내가 깡패 잡는 사람인데, 깡패한테 피해 당했다니 잠이 안 와요.”

신중한 오랜 고민 끝에 오씨는 출마를 결심하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경찰 배지와 장비를 반납하고 미뤄둔 휴가를 썼다. 조합장 임기는 퇴직 이후 시점에 시작되지만 선거는 퇴직 처리가 되기 전이었다. 조합장 선거에 나서는 게 가능한지 미리 확인해보았다. 문제 없이 절차를 마무리한 뒤 2023년 12월 29일 퇴임식을 치르고 경찰 생활을 마쳤다.

정년 퇴직이 1년여 앞당겨졌고 평범한 퇴직 후의 생활도 잠시 미뤄둬야 했다.

“내가 깡패 잡는 사람인데, 깡패한테 피해 당했다고 생각하니 우선 화가 나서 며칠 동안 잠이 안 오더라니까요.” 오씨는 고민 끝에 조합장 출마를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오씨는 조합장 선거 공약으로 지연된 공사의 단축, 추가 분담금 없는 입주 등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조직폭력배가 재개발 사업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밝혀내는 것이다. 조합원의 재산을 착복한 이가 있는지 이제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지난 경험을 살려 진실을 밝혀보겠다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실제 업무방해가 이뤄졌는지, 조합원의 재산이 불투명하게 피해본 것이 있는지 등을 내부 자료 확인과 증언 등으로 밝히겠다는 게 오씨의 목표다.

오씨는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사례로 주민들에게 불리한 비례율이 정해질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비례율은 분양비와 사업비를 일정 비율로 나타낸 것인데, 비례율이 100%보다 높으면 조합원에게 수익이 생기고, 반대로 낮으면 그만큼 비용을 추가 지불할 수도 있다. 이곳의 비례율이 70~80%로 알려져 조합원이 입주시에 돈을 추가로 더 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재개발 조합장과 임원이 청렴하면 시공사와도 협력해 비정상적으로 유출되는 돈을 차단할 수 있어야 결과적으로 조합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며 “이 같은 일이 여러 지역의 재개발 조합에서 벌어질 수 있어 선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조합장에 당선되면 급여 50%를 자진 삭감하겠다는 공약도 걸었다. 그는 “재개발 조합장의 일이 봉사와 노동의 융합인데, 퇴직 후 돈 벌어 들이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검은 세력이 재개발 조합에서 이미 잘못한 게 있다면 밝혀내고 제대로 처벌 받아 피해가 회복된다면 언제든 기분 좋게 조합장을 그만두고 내 할 일 찾아 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합장 선거는 3파전으로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한 후보가 오씨를 지지하며 자진사퇴했다. 사퇴한 후보는 “(오씨가) 조합장이 된다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조합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 어떤 세력도 끊어 내시리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16일 조합장 선거가 치러졌다. 오씨는 “169표를 얻어 168표를 얻은 상대에 앞섰지만 과반수 이상 득표해야 한다는 정관 규정을 만족시키지 못해 당선되지 못했다”고 했다. 18개의 무효표가 나왔다는 것이다.

재투표를 앞두고도 오씨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제가 조합장 선거에 나선다고 하니 벌써 음해하고 회유하려는 이들도 있어서 힘들기도 하다”면서도 그는 “재개발 사업에 대한 검은 세력의 이권 개입의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윤석열 대통령은 재개발과 재건축 사업절차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주민의 자유로운 선택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재개발의 혜택을 주거 환경을 개선하려는 주민이 아니라, ‘검은 회장님’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보게해 해선 안 되죠. 그런 이들이 대통령의 담화문도 비웃고 혜택을 보는 일을 없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는 재벌회장을 구속시켰던 그때 그 형사 같은 눈을 하고 말했다.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는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장문의 내러티브 기사로 소개하는 경향신문 뉴콘텐츠팀의 버티컬 채널입니다. 곳곳에 숨은 이야기를 찾는 이들과 영감을 나눕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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