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의 영끌 건물주…임대료 수백씩 낮춰도 ‘공실 공실 공실’
계속된 고물가에 금리인하 시점이 늦춰지면서 2024년은 고금리가 지배하는 한해가 될 전망입니다. 금리인하가 시작되더라도 제로금리 수준의 저금리로는 돌아가기 힘들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저금리의 돈을 손쉽게 빌려 쓰던 이지머니(easy money)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저금리 시대 투자된 부동산 자산입니다. 고물가에 따른 소비위축, 인구감소에 따른 수요위축, 고금리 이자부담까지 겹치면서 버블이 꺼지고 있습니다. 경향신문은 ‘공실수렁’ 기획 연재로 새해 상업용 부동산 상황을 점검합니다.
“다 비었네. 건물들이 다 텅텅 비었어.”
신촌역 1번 출구 앞 분식 노점에서 한 노인이 어묵꼬치를 입에 넣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20여년이 넘도록 이 노점은 같은 자리를 지켰는데, 그 사이 주변은 많이 바뀌었다. 열 걸음 떨어진 3층짜리 건물은 투썸플레이스가 자리를 비우고 나가면서 1층이 휑하게 비었다.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 깨끗해진 건물 내부는 빈공간과 더해져 적막이 한층 더 깊게 울렸다.
이곳에서 몇 발자국만 돌아서면, 신촌역 2번출구부터 굴다리까지 이어지는 연세로가 나온다. 명실상부 신촌 대표 상권인데, 하나 건너 하나가 빈 상가다. 인근 상인들에게 공실은 이미 익숙한 일상이었다. 현대백화점 뒷골목 편의점 주인 A씨가 말했다. “연세로 입구 1층에 화장품 매장 있던 그 건물, 거기도 비어있는 게 벌써 몇년 됐어.”
‘0% 금리’ ZIRP…건물 쇼핑 시작됐다
빈 건물이지만 주인이 없는 건 아니다. 이 동네 건물주 중에는 대를 이어 임대료를 받고 있는 터줏대감도 있지만, 비교적 최근 돈다발을 들고 신촌에 들어온 외지인들도 있다.
외지인들의 신촌 건물 거래는 2020년~2021년 집중적으로 늘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공개시스템을 보면 서대문구 연세로 전용면적 135㎡ 초과 빌딩은 2016년~2018년 한해 1건 혹은 0건에 불과했는데, 2020년 11월부터 단 두달간 빌딩 3채가 팔렸다. 모두 77억~110억원대 빌딩이었다. 경의중앙선 신촌역에서 이화여대 정문까지 좁다란 길로 이어지는 이화여대길도 건물 거래가 2021년에만 8건이 나왔다. 당시 연예뉴스에서는 모 인기 아이돌이 45억원대 신촌 건물주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20년 하반기~2021년 상반기는 전국적으로 집값이 날뛴 부동산 활황기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너도 나도 건물주가 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이 시기는 제로 기준금리, 일명 ‘ZIRP(zero interest-rate policy·0%대 기준금리정책) 시대’가 본격화한 구조적 전환기였다.
2014년 이래 1~2%대 구간에서 유지됐던 기준금리 선은 2019년 7월부터 8개월만에 번개처럼 1% 대 밑으로 수직 하강했다. ZIRP는 단순히 실질 금리를 내리는 역할에서 그치지 않는다. 황보창 한국기업평가 연구위원은 2022년 보고서에서 “금리인하에 대한 지속적 시그널을 시장에 던지는 것이자, 떨어뜨린 금리를 오랫동안 묶어둔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금리는 다른 말로 하면 ‘돈의 가격’이다. 조달 비용이 낮으면 수십억에서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쩐’을 손쉽게 동원할 수 있다. 건물은 결국 ‘쩐’을 얼마큼 동원할 수 있는지가 투자의 결정적 변수로 꼽힌다.
ZIRP의 위력은 막강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유지된 1~2%대 기준금리도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지만, ZIRP 이후 건물 거래 시장은 하루 아침에 달라졌다. 가장 먼저 금융권의 태도가 바꼈다. 건물 등 상가·오피스텔을 투자할 때 적용되는 ‘RTI 1.5’ 허들이 무너졌다. RTI 1.5는 건물을 임대해 버는 소득이 대출이자에 비해 1.5배 이상 높아야 한다는 일종의 대출 규제다. 대출이자가 ZIRP로 낮아지면서 누구나 상업용 건물을 매입할 기회가 열렸다.
당시 시중은행에서 담보 대출 심사를 맡았던 한 은행원의 말이다. “소득을 비롯한 개인별 신용 등급도 물론 보지만, 건물을 담보로 잡고 대출이 쉽게 나간 게 사실이다. RTI 계산상 문제가 없고, 담보 가치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컸다.”
이 시기 건물 거래는 신촌뿐 아니라 서울 전역에서 들썩였다. 서울 상업업무용 건물 거래량은 2020년 1분기까지 700건대 아래를 맴돌다 2020년 3분기 1100건, 2021년 2분기 1200건을 돌파했다.
영끌 건물주와 ‘크고 뚱뚱하고 추한’ 거품
대출이 쉽게 나오는 구조는 ‘영끌 건물주’를 만들었다. 경향신문이 신촌·이대·마포 일대의 등기부등본·신탁원부 분석을 통해 확인한 결과, 서교동 한 건물주가 95억원짜리 건물을 사면서 은행에서 빌린 돈은 85억원이었다. 빌딩의 89%가 은행 빚이었다.
또 다른 서교동 건물주는 6층짜리 건물을 2021년 4월 120억원에 매입하면서, 은행 채권은 건물 가액보다 큰 125억원이 잡혔다. 대출이 매입가의 104%라는 얘기다. 이화여대 일대에선 58억원을 대출받아서 62억5000만원짜리 토지를 매입해 새로 건물을 올린 건물주도 있었다. 자기돈은 단 4억여원이었다.
“꼬마빌딩 붐이 일던 서교동 일대 등기부등본을 업무차 확인한 적이 있는데, 대부분 대출이 건물가액의 80~100%에 달했다.” 조정흔 감정평가사의 말이다.
이들의 영끌엔 이유가 있었다. ZIRP 기조에선 예·적금을 넣는 것보다 빚을 내 건물을 사는 게 경제 주체들에겐 더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2021년 초 시중은행의 1년 정기예금금리는 ‘0.38~0.76%’이었는데 이때 신촌·이대 집합건물 투자수익률(임대료 수익+부동산가격증감)은 2%였다. 저금리의 예·적금보다, 레버리지를 극도로 당긴 위험 투자의 유혹을 경제주체들이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은행이 대출을 마구 내주면서 건물 시세가 들썩였다. 서교동 3층 건물은 2021년 75억5000만원에 팔렸다가 2022년 5월 95억원에 다시 거래됐다. 1년만에 19억5000만원이 올랐다. 은행은 건물가 상승 기류에 올라타, 대출을 더 쉽게 내줬다. 대출이 건물 투자를 늘리고, 그것이 담보가치를 밀어올리자, 다시 대출을 늘려주는 자산가격 상승의 나선효과가 발생했다.
건물가액은 부동산의 실질 가치와 괴리가 갈수록 커졌다. 통상 자산가치를 결정하는 함수는 ‘CF/1+r’이다. 부동산 임대료 등 펀더맨탈(CF)을 기대수익률(자본 기회 비용, r)로 나눈 값을 말한다. 저금리 시대, r값이 작아지면서 부풀어 오른 자산가격은 그 자체가 자산의 기본 펀더멘탈을 벗어난 ‘거품’일 가능성이 크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크고, 뚱뚱하고, 추한 거품”이라고 표현했던 저금리 시기 미국의 이례적 자산 가격 상승이 한국에서도 똑같이 발생한 것이다.
파티는 끝…시작된 건물 ‘밀어내기’
공실건물인데 월 2000만원씩 은행 이자로
붕괴는 대비할 틈 없이 찾아왔다. 고금리를 잡기 위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3.5%까지 끌어올리자 상황이 급반전됐다. 그간 저금리를 북극성 삼아 움직여온 부동산 생태계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그간 빌린 돈이 막대한 이자 부담으로 돌아오면서 차주들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신촌과 같이 공실로 비워둔 건물은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2020년 모 건물주가 대출 62억원을 끼고 88억원에 매입한 창천동 건물은 4층 전층이 비어있다. 건물주는 당시 10개월간 800만원 임대료를 할인해준다는 조건으로 임차인을 들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 임차인이 나가면서 공실이 됐다. 이화여대로에 위치한 건물은 최근 준공했는데, ‘임대문의’ 깃발이 4층 전층에서 펄럭이고 있다. 이 건물주는 2021년 매입가(62억원) 대비 92.8% 대출을 끼고 해당 부지를 사들였다.
통상 공실은 임차 수요가 낮은 상황에서, 건물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건물주가 임대료를 내리는대신 차라리 비워두는 걸 선택하기 때문에 생긴다. 오래 전 빌딩을 매입했던 기존 건물주들은 그간 충분한 임대료 수익을 거두고 건물가액 상승 효과까지 거둔만큼 공실 버티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2021~2022년 고점 매입 직후 공실로 두는 경우는 고금리 전환기에 금융 비용을 부담하기가 쉽지 않다. 창천동 건물에 들어간 대출 62억원을, 대출금리 4%로만 계산해도, 매달 은행에 내야 하는 이자는 최소 2000여만원에 달한다. 원리금 상환이나 매년 지출해야 하는 보유세는 별도다.
이자 부담에 급매로 건물을 내놓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2020~2022년보다 평단가가 하락 거래된 사례가 올 들어 이어지고 있다. 경향신문이 토지·건물 거래 플랫폼 밸류맵에 의뢰해 실거래 내역을 분석한 결과, 생활도로(12m 미만)를 접한 일반상업지구 대현동 이화여대길 토지평단가는 2021년 3.3㎡(평)당 9313만원에서 2023년 7434만원으로 급락했다. 같은 조건의 창천동 연세로는 올해 평단가가 7259만원인데 이는 지난해 8796만원에서 1000만원 이상 떨어진 것이다.
매입가보다 떨어진 값에 팔아도, 팔린 것 자체가 행운일 수 있다. 정경진 밸류맵 연구원은 “올해 급매로 나온 건물은 대부분 2021년 후반 대출을 많이 끼고 법인 명의로 매입된 건물이 많았다”라며 “앞으로도 급매 등 하락 거래된 건물 사례가 더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공실의 늪…버티면 다 죽는다
버티면, 다시 낙원이 돌아올까. 전문가들은 모두 고개를 젓는다. 건물의 실질 가격을 끌어내리는 요인이 도처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경기 둔화로 소비위축 심화한 상황에서 부동산 거래 자체는 한동안 냉각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투썸플레이스가 21년만에 신촌역 인접 건물에서 나간 것도 이 일대의 상권 전망을 어둡게 봤기 때문이다. 투썸플레이스 관계자는 “운영 효율을 위해서 지속적 이뤄지는 매장 개·폐점에 따라 (신촌역점 폐점이) 결정됐다”며 “지역상권 침체, 건물 노후화 등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신촌 호프집을 운영 중인 김봉수씨(신촌동상가번영회 회장)의 말이다.
“명물거리에 대형 화장품 매장이 있는데, 최근 재계약 시점에 기존에 내던 것보다 400만원을 더 낮춘 임대료를 제안했는데 건물주가 그걸 받아들였대요. 그것도 안 받으면 건물주 입장에선 못 버틴 거죠. 솔직히 이런 공실늪에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누가 입점하겠어요. 신촌은 아직 경매 물건이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지만 거의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봐요.”
윤지원 기자 yj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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