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게[이주영의 연뮤 덕질기](17)

2024. 1. 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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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레미제라블> · <몬테크리스토>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1막 엔딩 넘버 ‘내일로’ / ㈜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매일 공연장에서 살다시피 했는데도 쏟아지는 작품을 다 보지 못했다. 지난 한 해는 팬데믹 이후 와신상담해온 작품이 봇물 터지듯 한 시기였다. 입소문에 이끌려 하루에도 두세 편씩 관극하는 날이 많았다. 한국 공연계의 창의적인 토대와 다양성, 창작진들의 열정이 고루 담긴 창작 초연 작품만 대충 정리해도 수십 편이 넘는다. 한국뮤지컬어워즈(이하 어워즈) 본선 후보작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2024년 1월 15일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리는 어워즈는 국내 최대규모의 뮤지컬 축제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2023년 한국 뮤지컬 시장 규모는 2019년 팬데믹 이전과 비교해 40% 수직 상승했다. 뮤지컬 티켓 판매액이 4300억원이 넘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상대적으로 거대 산업인 영화와 OTT 규모가 급감한 데 비해 뮤지컬 시장은 급상승했다. 올해 어워즈에 접수된 편수만 해도 주연상 285명, 조연상 245명, 신인상 69명, 창작자 530명, 앙상블 25명 등 역대급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막상 본선에 올라온 후보자(작)들의 면면을 보면 수년간 흥행 보증수표로 알려진 유명 배우들과 창작진이 대다수다. 상당수 부문은 중복 노미네이트다. 2023년 뮤지컬계의 노고와 열정을 축하하고 기운을 북돋는 자리인 어워즈에서 언급되는 작품들이 모두 합해도 20여편 전후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국 뮤지컬은 종류와 장르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규정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확장된 시장에서 더욱 다양해진 창작 초연작품들이 상연 중인데도 왜 그럴까. 이종규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한테 물어봤다. 작품 수는 매년 늘어나지만 여전히 중대극장 작품들이 시장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 중복 참여하는 배우 및 창작진이 많은 현실에서 중복 노미네이트는 불가피하다 등의 답변이 돌아왔다. 시장이 확대되고 좋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 창작진들의 의욕을 돋우고 중소극장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부양책을 고민 중이라는 답변도 덧붙였다. 소극장 중심 어워즈를 별도로 운영하거나 중복 노미네이트의 규칙을 정하고 더 많은 작품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축제의 장이 되도록 하자는 의견들을 청취 중이란다. 구력이 붙은 오랜 창작진들과 새로이 유입되는 창작진들이 상생하기 위한 토대와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과정인 듯하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2막 바리케이드 6월 봉기 장면 / ㈜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란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장강의 뒤쪽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뜻의 명나라 후기 명언집 <증광현문>(增廣賢文)의 구절이다. 흔히 지엄한 세대교체 상황에서 인용되지만, 필자는 신구세대가 소통과 화합을 통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는 급성장 중인 한국 뮤지컬 시장에도 적용 가능하다. 자칫 대극장 중심, 유명 배우 중심, 라이선스 작품 중심에 머물 수 있는 국내 뮤지컬 시장에 신구세대가 뒤섞이면서 고유의 자장을 형성할 수도 있어서다. 2024년에도 무수히 쏟아져 나올 중소극장 중심 창작 초연 및 재연 작품들, 즉 ‘장강의 뒷물결’에 큰 기대를 거는 배경이다. 최근 본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대표 넘버 ‘내일로(One Day More)’를 들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각기 다른 세대, 다른 욕망으로, 서로 충돌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등장인물들이 무대 뒤쪽에서 삼각형 대열로 제자리걸음을 하며 무대 전면으로 걸어나온다. 좌우로 걸으며 전진하는 1막 엔딩의 ‘내일로’ 장면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전 캐릭터가 등장하는 <레미제라블>의 상징이기도 하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 원작인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주된 서사가 빵을 훔치다 달아난 장발장과 이를 추적하는 자베르의 수십 년 원한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극히 일부만 본 것이다. 2막의 배경인 1832년 6월 봉기와 이를 지지한 앙졸라와 마리우스 등 청년 혁명가들, 에포닌·가브로쉬·코제트 등 소년·소녀 혁명가들은 중단없는 전진으로 당시 서민들의 목소리를 재현한다.

한국에서 2013년 초연에 이어 2023년이 삼연째인 <레미제라블>은 주요 인물들을 모두 새로운 캐스트로 바꾸고 노련함 대신 젊음을, 완벽함 대신 강력한 에너지와 신념을 새로운 프로덕션에 투사했다. 이들을 진압하는 경감 자베르의 목숨까지 구해내는 장발장은 결국 자베르의 가치관에 혼돈을 야기한다. 자베르는 장발장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고민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자베르가 검은색의 출렁이는 강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은 어두운 조명 아래 더 어두운 조명을 겹쳐 올린 일종의 영화적 미장센이다. 시대적 혼란 속에서 고뇌하는 기성세대의 공허한 자멸을 상징하는 듯하다.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서 복수의 화신이 된 단테스 /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토대로 한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역시 신구세대의 화합과 이해가 주요 메시지이다. 배에서 항구로 변신하는 회전무대는 여러 무대가 맞물려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무인도와 감옥, 항구, 저택 등 장이 바뀌어도 드라마틱한 서사를 차분히 무대미술과 함께 엮어낸다. 결혼식날 영문도 모르고 옥에 갇힌 단테스는 14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피폐해졌으나 괴짜 동료를 통해 새로운 삶을 얻는다. 수십년간 탈옥을 꿈꿔온 파리아 신부는 단테스의 정신적 부모가 되어 학문과 무술을 가르치고 보물이 묻힌 몬테크리스토섬을 물려주며 복수의 허망함을 당부한다. 파리아 신부가 노환으로 죽자 유언을 따라 그의 시신으로 위장해 호수에 던져진 단테스의 탈출장면은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의 상징중 하나이다. 조명과 영상디자인으로 만들어진 호수 속에 허우적거리다 탈출한 단테스는 약혼녀 메르세데스를 가로채기위해 단테스를 옥에 가둔 몬데고와 일당들에게 원한을 갚기로 결심한다.

복수 서사의 원형으로 알려진 작품이지만 2010년 초연에 이어 2023년 육연에 이르는 동안 복수를 조금씩 덜어내고 무대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모험과 액션을 담았다. 어드벤처 요소를 강화하는 표면적인 장치들 속에서 드러나는 복잡다단하면서도 화려한 심중의 갈등이 이 작품의 미덕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단테스는 오랜 연인 메르세데스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한다. 메르세데스의 아들 알버트는 단테스의 평정심을 찾아주는 ‘장강의 뒷물결’이다. 단테스는 오랜 복수심이 스스로를 자멸하게 이끌었음을 깨닫고 메르세데스 아들과 동료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다. 용서를 구하고 복수와 원한의 대물림이 아닌 선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난다.

장강의 앞물결은 뒷물결에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게다. 그대들이 밀어준 덕에 새로운 세계를 향할 수 있었다고. 2024년 한국 연극 및 뮤지컬계와 관객들의 관계 역시 교체를 통한 급진적 소멸이 아닌 상생을 통한 점진적 확장이기를 바란다.

<레미제라블>은 3월 10일, <몬테크리스토>는 2월 25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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