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의 어떤 날] 12월도 꽤나 들락날락했다

한겨레 2023. 12. 3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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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원고를 쓰기 전에 무언가를 뒤집어엎고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학교 다닐 때도 시험 보기 전에 그랬었다. 정작 해야 할 일을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느닷없는 정리정돈이 웬 말인가. 옷장이 쓸데없이 놀기만 해서 옷걸이를 떼어내고 층층이 두칸 정도 선반을 매면 수납이 쉬울 것 같아 가로·세로·두께를 재고 선반을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칸이 늘어나 정리정돈이 쉬워져서 기뻤다. 스웨터와 스카프, 조끼 등을 개운하니 접어 넣었다. 새해 맞기 직전에 잘한 일이다.

내가 일하는 엠비시(MBC) 가든스튜디오는 넓고 양명하지만 머리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 스카프와 조끼는 필수다. 다행히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옆지기들이 열이 많은 체질이면 온도가 안 맞아 곤란할 텐데 공기 흐름에 예민하고 민감한 점이 잘 맞아 다행이다. 같이 일하는 우리 팀도 크리스마스보다는 한해가 저무는 세모, 또는 새해맞이 쪽에 마음이 더 가 있다.

불과 어제까지였지만 12월을 한번 돌아보자. 일도 많아 꽤나 들락날락했다. 17살 노견 미미의 구제불능 충치를 12대나 뽑고서 하루하루 말라가다가, 수액에 두서너가지 성분을 보태 종일 주사 맞고 저녁때 퇴원하는 ‘하루 입원’을 여러번 하고서야 조금씩 나아졌다. 그 와중에 강변북로에서 젊은이가 내 차를 거푸 2번 들이받아 연말 내내 정형외과와 한방병원을 오갔다. 또 94살 엄마의 요양보호사 신청을 위해 주민센터와 건강보험공단을 오갔고, 담당자가 와서 엄마 따로 나 따로 상담했다. 결혼식도 두건이나 있어 주말에 시내까지 뚫고 달려 점심 외식을 했고, 아주 멋진 곳에서 요리공부하는 후배들과 선생님 모시고 저녁을 거하게 먹었다.

방송 옆지기가 신인상 턱으로 점심을 쏴서 3시간 넘게 웃고 떠들었다. ‘여성시대’ 프로그램에서도 ‘사랑의 난방비’와 ‘착한 가게를 찾습니다’, ‘우리 아이 문제없어요’ 등 애청자분들 모시고 특집 공개방송으로 한해를 잘 마무리 지었다. 미국서 온 떡보 친구에게 내가 좋아하는 떡집에서 떡을 맞춰 떠나기 전 건네줬더니, 가는 길에 맛보고는 ‘떡이 최고로 맛나다’ 해서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재동초등학교 동창들을 연거푸 세번이나 만나 격의 없이 웃고 수다 떨며 추억놀이를 했는데, 제일 나이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들이라 그런지 어떤 얘기든 허물없이 마음 편히 나눌 수 있어 졸업 뒤 60년 세월이 지났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매주 월요일 밤에 나가는 ‘생활의 달인’ 더빙을 하면 뜻밖의 맛집들 정보를 알게 되는데, 코로나 기간 구경을 못한 탓인지 유난히 호떡과 붕어빵에 호기심이 동해 여기저기 많이도 찾아가서 많이도 맛봤다. 아무리 맛집이라도 2시간가량 줄 서야 한다면 무리다 싶었는데, 평일 포근한 날씨에 찾아가니 수월했다. 호떡과 붕어빵을 종류별로 사 먹고 품평도 하고 집에 가져와 데워 먹었지만 역시 그 자리에서 호호 불며 먹는 맛이 최고였다.(식구들 생각에 싸와 봤자 즉석에서 먹는 맛 이상 없다.) ‘술과 장미의 나날’이라는 옛영화도 있지만, 내게 연말은 ‘호떡과 붕어빵의 나날’이었다.

2023년 헌해를 새해 첫날 돌아보는 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데, 보다 나은 날을 위해 괜찮겠다 싶다. 남들이 쉬는 날 일하는 게 우리 일! 크리스마스에도, 새해 첫날인 오늘 아침에도 ‘빨간 날’이면 우리는 늘 일을 한다. 쉰 적이 없다. 좋은 점은 길이 뻥 뚫려서 출근길이 수월하다는 것. 엄마의 건강, 노견 미미의 건강 여하에 따라 내 방송일도 영향을 받겠지만 남편은 장모와 노견을 향해 “당신들은 좋겠다. 돌봐주는 우리가 있으니…휴. 우리가 나이 들면 누가 해주나??” 한다.

하지만 진즉 방송 그만둔 베테랑 후배가 말했다. 일이 바쁠 때는 시간이 아쉽고 틈틈이 쉬고도 싶었지만, 아예 일이 없어지고 나니 무얼 해도 허무하고 허전하다면서 “그만두지 마세요. 할 수 있을 때까지 건강관리 하면서 그 자리를 지켜주셔요. 계속하셔야 돼요.” 그 많은 글과 문자, 사연을 통해 함께한 공감과 동감, 그리고 감동과 감탄이 하루도 빠짐없이 좋아서 2024년에도 ‘여성시대’학교에서 사람 볕을 쬐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려니, 세상 보는 눈이 깊어지겠거니,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세월이 거칠게 흘러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싶어 하루하루 쌓아가다 보니 새해 나는 ‘여성시대’ 25년차 진행자가 된다!

※‘여성시대’는 프로그램 이름이지만 세상 배울 게 많아 ‘여성시대학교’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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