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성폭력 트라우마를 치유하다···배리 로페즈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책에서 건진 문단]

김종목 기자 2023. 12. 31. 1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 [책에서 건진 문단]‘남자 집권 보안법’부터 ‘친일 반민족주의’까지···‘올해의 문단과 문장들’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12230600001

배리 로페즈(1945~2020)는 “이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평을 들은 자연 작가입니다.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이승민 옮김, 북하우스)는 마지막 에세이집입니다. 미국에선 2022년 나왔죠. 출판사가 단 부제는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 여정’입니다.


☞ 소유를 좇는 세상에서 소박한 삶을 찾아 걷다
     https://m.khan.co.kr/travel/national/article/202106022155005

고통?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아동 성도착자에게 4년 반 동안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지역 어른들에게 전폭적으로 신뢰를 받던” 남성이었는데, 나중에 가짜 의사이자 소시오패스, 병적 자아도취자로 밝혀집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퍼넌도 밸리에 살 때입니다. 캘리포니아 이주·성장을 다룬 여러 소설과 영화의 “성적 학대의 트라우마, 폭력적인 결혼과 이혼,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 같은 ‘끔찍한 경험’을 로페즈도 겪은 것이죠.

자전거로 몇 분 거리에 목초지와 공공 수영장이 모두 있던, 샌퍼넌도 밸리에서 로페즈는 “빛과 그림자”에서 빛을 좇아갑니다. 그의 빛은 주변 장소와 자연에서 쏟아집니다.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표지 원본 사진. ⓒ Getty Images 북하우스 제공
무한히 위로하는 빛
캘리포니아 보이로서 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한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어도비 벽돌집의 옅은 벽면과 출렁이는 수면까지,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

캘리포니아를 떠난 뒤에도 “온화한 날씨, 맨발로 돌아다니던 일상, 며칠씩 모하비사막을 활보하던 날들, 손만 뻗으면 따먹을 수 있었던 신선한 과일나무들, 바닷가의 오후, 개조 차량을 몰고 달리던 폭주족까지” 몹시 그리워했습니다. 이런 자연의 요소들이 “내 어린 목숨을 구했”기 때문에 생긴 그리움이죠. “동틀 녘 구슬피 우는 산비둘기 소리, 인적 없는 토팡가 협곡과 로렐 협곡,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산토끼들”이나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는 성도착 범죄자에게서 도망칠 피난처였습니다.

강이 원하는 건 놓여남

로페즈는 “절망에 믿음을 걸라”는 유혹을 물리칠 근거도 자연에서 찾았습니다. 트라우마가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자연 덕이죠.

강은 다르다. 이 다름은 강의 어마어마한 성숙함에서 나온다. 강은 먼저 왔고, 더 오래 남을 것이다. 강이 원하는 건 젊은이가 노리는 복수가 아니라 놓여남이다.(…)
물에서 향수나 절망은 보이지 않는다. 고요한 바다와 함께 연상되는 무한한 인내가 보인다. 그리고 이 강둑 뒤에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다양한 인간들, 앞에 놓인 것이 비열한 위협이든 야생의 아름다움이든 피하지 않고 적응해가는 그런 사람들이 보인다.
이 시대는 절망에 믿음을 걸라고 우리를 강하게 유혹한다. 밸리로 돌아올 때마다 언제나 그러했듯, 이번에도 나는 이곳에서 그 강력한 유혹을 물리칠 근거를 발견한다.(…)
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동물이다. 제 안에 다른 동물들을 담고 있으면서 또 다른 동물들, 기슭에 와서 목을 축이는 퓨마와 물수리 같은 또 다른 동물들의 생존을 돕는다. 요컨대 강은 인간보다 오래 살았고 댐과 오염과 수로의 건설을 견뎌내고 어떻게든 계속 흘러간다. 요컨대 인간이 아무리 조당 리터 단위로 유량을 측정하고 정밀하게 유역이 표시된 지형도를 만들고 수생생물과 조류와 육상 생물 목록을 작성한다 한들, 우리는 강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자연은 삶의 근거이자 치유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연을 경시하는 문화에 속한 사람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쉬이 떨쳐낼 수 없으리라”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근대 문명의 특징인 실존적 고독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것은 얼마쯤은 장소와의 관계에 치유적 차원이 있다는 믿음을 내버린 탓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연 세계에는 인식 가능하며 그렇기에 관찰자를 포용하는 패턴들이 항상 존재한다. 끝없이 복잡한 이 패턴들을 부단히 새롭게 느끼는 감각은 세상에 혼자라거나 삶이 덧없다는 느낌을 약화시킨다. 결국 장소를 깊이 알고자 하는 노력은 어딘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인간의 소속 욕구를 표현하는 일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 어떤 장소를 알아가려는 굳은 의지는 끊임없이 보상을 받는다. 나는 자연의 모든 장소가 ‘알려짐’에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의 어디쯤에선가 인간은 자신들이 ‘알려지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렇기에 그들이 아는 장소에서 그들의 존재가 사라질 때 장소는 그들을 그리워한다. 서로가 알고 알려지는 이런 교감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의식을 강화한다.
세계의 끄트머리에선 하찮은 생각들이 죄 빠져나간다

로페즈는 자연에서 “향수가 아니라 공경의 마음”을 다지기도 합니다. 나무는 어릴 때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오래 견디고 가장 품위 있는 존재”였죠. 나무 아래에서 “태평양 저편으로 멀리멀리 날아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갈망”도 느낍니다. “인간이 기대하는 좋은 인생이란 전적으로 자신이 바라본 방향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여행가가 된 듯합니다.

세계 곳곳의 장소를 여행하면서 자연에서 빛을 찾았습니다. 여행은 “일상을 뒤로하고 문명사회의 보수적인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죠. 매번 멀리 세계의 끄트머리에 다다르곤 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던 준주의 타나미 사막,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의 나미브 사막, 캐나다 북극권의 엘즈미어섬 북부 등지에서 “인간 문화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안도감이 가장 고양되고 타인을 향한 공감이 가장 깊어지는 걸” 느낍니다. “게으르고 하찮은 생각들이 죄 빠져나간” 곳들입니다.

사람들도 빛이었습니다. 알래스카의 선주민들, 케냐의 캄바족 사람들, 노던 준주의 왈피리족 사람들과 함께 길을 다녔습니다. 나미비아 사막과 남극에서 야영도 합니다. 그는 이런 장소들에서 “어떤 성취가 아니라 목격”을 얻으려 했습니다.

장소에서 주의 기울이기, 인내하기, 귀담아듣기

로페즈가 여행에서든, 일상에서든 강조하는 건 ‘장소에서 주의 기울이기’입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한 장소가 다른 장소와 사실상 몹시 닮았다는 역설적인 믿음에 굴복해 당신이 있는 곳을 안다고 가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모든 장소는 유일무이하며 다른 어디에서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놓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그는 인내하기와 몸이 아는 것을 귀담아듣기도 강조합니다. 모두 가까이 다가가 감각을 느껴야 하는 일입니다. 로페즈는 고공비행하는 항공기에서 내려다보는 지표면에선 ‘세밀한 생동감’ ‘정서적 충격’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고공비행하는 항공기에서 지표면을 내려다볼 일이 많다. 그러나 이 무형의 광막함에서는 양쯔강 정경에서 밀려오는 세밀한 생동감은 고사하고 예전 그 저녁 아낙투북강 골짜기의 정적이나 이후 더 시야를 조여오던 요동치는 남빙양에서 마주했던 것과 같은 정서적 충격이 별로 전해지지 않는다. 고공비행하는 항공기에서 보이는 전망에는 장소의 직접적 감각이 누락되어 있다. 그곳의 소리와 냄새, 시각에 수반되는 살갗에 닿는 식은 공기의 압력이 말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의 고결함이며 대지의 권위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이다. 그 저녁 멀리 아낙투북 계곡에 대한 인상은 내 손 가까이 놓여 있던 이끼 덮인 암석의 눈부심을 보았기에, 그래서 일순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항공기에서 내려다본 전망과 다르게 지상의 전망에는 전경과 중경이 함께 담겨 있다. 여객선 난간을 움켜쥔 내 노란 장갑, 배와 수평선 사이를 날아가던 앨버트로스처럼. 혹은 강기슭부터 협곡 꼭대기까지 쌓아 올려진 채마밭처럼. 항공기에서 대지와 친밀한 접속을 형성하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고도를 낮추고 속도를 늦출 때, 그럴 때라면 가능해 보인다.
대지와 사람과 친밀해지려 하다

로페즈는 여행길에 늘 대지와의 친밀감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로페즈가 속한 문화에서는 황무지라 여길 땅을 걸을 때면 여러 감각의 세부사항과 친밀해지려 했습니다.

그날 걷기의 목표는 -내가 속한 문화에서는 황무지라 여길 땅의 촉각, 후각, 시각, 청각적 세부 사항과-친밀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 단순한 지각 기술로 낯선 풍경과의 대화를 시작한 지 오래다.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나는 묻는다. 당신 이름을 무어라 부를까? 내가 앉아도 될까? 이제 그만 가야 할까? 낯선 것에 다가가는 이 방식의 유용함을 나는 수십 년간 꾸준히 확인해왔다. 서로 신뢰를 쌓고 취약한 나를 장소에 열어놓고 그러고서 상호 간의 교류를, 어쩌면 친밀감까지도 희망해보는 것이다. 낯선 사람과의 조우에서도 그를 더 잘 알고 싶다면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이 스피니펙스 초원 같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각자의 길을 찾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새로운 것 앞에서는 모두가 어수룩하다. 그러나 외톨이로 살 작정이 아니라면 새로운 장소-혹은 새로운 사람-와 조우할 때 내가 실제로 마주친 것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풍경이든 사람이든, 그것의 진실과 정신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면, 내 것이 아닌 현실과 최소한 휴전이라도 맺어야 한다.
모든 카리부는 제각각 다르다

로페즈는 낯선 사람과 만날 때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만남과 대화에 집중하며 값진 가르침을 얻습니다.

그중 한 가지를 소개해볼까. 여러 해에 걸쳐 선주민들-알래스카의 유픽족과 이누피아트족, 캐나다의 이누이트족-과 대화하며 나는 그들이 서구인들과 달리 집합명사로 생물 종을 지칭하기를 꺼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리부’의 행동에 대한 질문에 그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떤 카리부 한 마리가 언젠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어느 장소에서, 1년 중 어느 시기에, 어떤 날씨에, 주위에 이러저러한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무엇을 하더라는 말로 답을 대신하곤 한다. 외견상의 조건이 비슷하더라도 상황이 다르면 그 동물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생김새가 닮았을지라도 모든 카리부는 제각각 다르며, 그래서 예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주민들은 “낱낱의 개체를 식별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북미의 또다른 선주민은 동물을 사냥하면 “잡았다”는 말 대신 “나에게 주어졌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로페즈는 이런 경험에서 “오늘날 텔레비전이라는 모종의 문화적 신경가스”가 개별적인 것들을 “우리 모두가 아는 것”과 “우리 모두가 믿는 것”으로 뭉뚱그려놓았다고 지적합니다.

어떻게 “더 쉬운 삶을 위해” 만다린어나 영어가 만인의 공통어가 되기를 염원하는 이들이 있는지, 어떻게 은난초 한 송이의 화려한 사진 한 장을 현존하는 은난초 전체에 대한 상징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지, 어떻게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어떤 이들에게는 프라하 방문과 진배없는 것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에 쫓긴다는 이유로 하나가 다른 하나의 자리를 당당히 대신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여행을 다닌 세월 동안 다양성에 대한 나의 이해는 진화해왔다. 처음에는 내가 듣고 믿었던 것보다 이 세계의 장소와 장소가, 문화와 문화가 서로 훨씬 다르다는 직관으로 출발했다. 그러다 차츰 이런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무감각한 행위일뿐더러 부당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이를 무시하면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소외와 고통과 분노와 절망을 낳을 뿐이다. 거기서 나는 더 깊은 통찰을 얻었다. 모든 사회적 생명체들의 사회조직이 건강하게 장기적으로 유지되느냐 아니냐는 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는 동시에 개체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구나 하는 통찰을 말이다. 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자율성과 존중의 결합이고 그것이 갈등을 최소화해왔으니 말이다.
나는 반대한다

로페즈가 자연에 고립된 채로 산 건 아닙니다. 그는 자연을 본보기 삼아 극심한 편견, 세계적 기후변화, 부패와 탐욕, 타자에 대한 공포 같은 굵직한 정치적 질문들을 자문합니다. 미국의 빈부 격차, 환경의 광범위한 질적 저하, 제도화된 기업 비리, 악화되는 기후 요건과 관련된 수많은 생물학적 경제적 문제, 이른바 남성의 특권이 빚어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과 저항의식을 에세이에 선명하게 적었습니다.

내가 아는 많은 예술가들이 이어온 평생의 작업들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하나의 선언을 중심에 품고 있다. “나는 반대한다.” 나는 우리가 이 행성에 저지른 행태를 공부했고 그것에 반대한다. 나는 인간 노동에 대한 착취와 노동에 대한 존중의 결여에 반대한다. 나는 무수한 일상 영역의 광기 어린 상업화에 반대한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훼손을, 부패에 대한 예찬을, 지배자를 편드는 조력자들의 윤리적 둔감함을 반대한다. 나는 사회의 안일함에 반대한다.
부디 당신이 절망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기를, 냉소주의로 후퇴하거나 불신에 안주하기 않기를(…)

로페즈는 하룻밤 새에 “한계를 더 잘 인식하고 탐욕 대신 연민이 풍부하고 편견 대신 포용에 강하고 더 착취를 삼가는” 문명을 고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문명은 “꿀벌과 야생마에게도 나름의 고결함이 있고 어쩌면 나름의 열망도 있을 테니, 더는 그들을 오직 인간의 욕구를 채울 세상의 건립에 기꺼이 소모될 대상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숙고”와도 직결되는 문제죠.

배리 로페즈. Open Road Media ‘Meet Barry Lopez’ 화면 갈무리
작가는 누구는 더 많이 누려 마땅하다는 전제를 폭로해야 하다

로페즈는 미국의 갖가지 문제를 직시하며 “개개인의 삶에서 학대와 고통이 덜어지도록 실효성 있는 해결 방안”도 고민합니다. 에세이집에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 ‘작가론’에 그 생각이 잘 나타납니다. “절망에 혼자서나 남들 앞에서 흐느껴 울기도 하고, 때로는 신성의 영역을 접했다고 여길 만큼 지극히 평온하고 고양되는 일의 기쁨” 같은 인간 삶의 한 부분을 이루는 극단적인 감정은 자신이나 멕시코 출신 농장 노동자나 초등학교 급우의 아버지들도 함께 겪습니다. 로페즈는 “이런 대등함을 명확히 밝히는 것을 작가의 사회적 의무 중의 하나로 여기게 됐다”며 이렇게 썼습니다.

미국식 민주주의 같은 제도하에서 특히 작가는 ‘자격’이라는 개념, 피부색이나 교육, 젠더, 인정, 소위 재능, 재산을 기준으로 우리 중 누구는 더 많이 누려 마땅하다는 전제가 존재함을 폭로할 소명이 있다. 나처럼 백인 남성의 울타리 안에서 백인으로 자란 작가일수록 그 울타리를 만들어낸 사회적 경제적 관습, 토지의 계약 조항, 법적 특혜, 윤리적 망각까지 반드시 되짚어봐야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의견이지만, 오늘날 미국 작가들에게는 인종차별주의와 계급 구조와 미국 사회의 폭력 이면에 놓인 것을 적시해야 할 각별한 임무가 있다. 그러자면 먼저 이런 결함의 실체를 인정하고, 개개인의 삶에서 학대와 고통이 덜어지도록 실효성 있는 해결 방안을 찾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한다.

샌퍼넌도 밸리의 농경에서 초기 정착민들이 선주민 가브리엘리노 부족을 “회반죽과 모르타르처럼 소진”한 일이나 중국 노동자들을 데려다 철도를 건설하고는 ‘중국인 배제 법령’을 내밀고 쫓아낸 일 등 “내가 성장한 고장을 소생시킨 불평등한 계략”을 떠올립니다. 이런 계략엔 “생명의 존엄함과 복잡성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성폭력이라는 자기 트라우마와도 연결합니다.

수년간 연쇄 아동 성폭력범 추문과 관련한 신문과 잡지 기사를 읽고 종합한 바로는,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가장 욕망하는 응징의 방식이 돈과 정의이며 거기에도 순번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 짐작을 말하자면,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믿어주기를 바란다. 존엄의 감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토대를 원한다. 자기 존중의 회복이 돈보다 중요하다. 복수보다 중요하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타인의 공분이 아니다. 분개한 변호사나 논설위원이나 정치인이 자신들의 분노를 대신 발화해주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요즘 대배심의 기소로 아동 성범죄자가 공개될 때 대중의 분노라는 “시민” 정서에서 우러난 반응이 내 눈에는 덧없어 보인다.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학대당하는 아동들의 숫자를-대략 남아 일곱 명당 한 명, 여아 세 명당 한 명-생각하면, 그들의 비난 소리는 순진하게 들린다. 더욱 진지한 경계의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 사회적 분노는 또 다른 약속 파기의 양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타인이 필요하다

자신의 트라우마와 회복에 관해서도 성찰합니다.

미국 남자들의 심리에는 트라우마를 혼자 치유해야 훌륭하다는 통념이 깊이 박혀 있다. 그러나 근년에 나는 이런 선택이 때로는 더 극심한 고립과 고통을 낳는 길이며 특히 상처 입은 이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도 내 삶을 재정비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누구도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정확히 그런 경로를 택했다. 내 사연을 자세히 모르는 타인의 포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트라우마 회복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임을 알게 되기까지 나는 아주 오래 걸렸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줄 타인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최종적으로 얻은 교훈이었던 것 같다. 타인의 포용을 용서나 우호적인 판단이 아니라 인정으로 받아들여 환영하는 것. 누구나 때때로 남들이 모르는 각자의 삶에서 잔혹한 역경을 맞기도 하며,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이루는 서로가 없다면 이 악몽은 언제든 되살아날 기회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

로페즈는 에세이집에서 선주민에 대한 탄압과 학살, 추방의 역사를 거듭 곱씹습니다.. 그는 워싱턴 DC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지으면서도, 선주민 집단 학살 등 미국의 과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기념비는 세워지지 않은 점을 지적합니다.

이 나라는 선주민 부족이 이미 사라졌으니 이런 과거지사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전진’에 만 골몰하고 있다.(…)
인간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실존의 난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각각의 세대마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허물어지지 않을 땅, 선조들의 꿈을 지속시킬 땅을 다시 찾아내고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에게 아우슈비츠를 보고 오니 스스로의 무감함과 결단력의 부족이 두려워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가 했던 것처럼 미국 정부가 공화국 건립의 기본 토대였던 인종 학살과 노예제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이제는 독자적인 시민 행동이 일어나야 하는지? 이런 사안의 규명을 통제하는 정부의 전횡에 시민들이 저항해야 할 때인지?
지금 여기에서 참여하며 배우는 것뿐이다

80여 개국을 돌아다닌 이 여행자가 가장 좋아하는 풍광은 1970년부터 줄곧 살았던 오리건 서부 매켄지강 북쪽 기슭의 오래된 잡목 자연림에 자리 잡은 집입니다. 비록 벌목 산업 때문에 산비탈이 깎였지만, 여전히 치누크연어가 산란하고, 보브캣과 밍크와 흑곰이 삽니다. 강에서는 물수리와 뿔호반새가, 나무에서는 큰까마귀와 도가머리딱따구리가 울어댑니다.

미국 오리건주 매켄지강 부근 숲. 출처 언스플래쉬. 촬영자 Sam Ruder

로페즈는 세상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여기”라고 답합니다.

이곳이 내가 나 외의 바깥 세계와 가장 길게 대화하는 곳이다. 이곳이 내가 그 세계의 깊이를 시험하고 여전히 나 자신의 무지를 발견하는 곳이다. 이곳은 나에게 친숙한 숲이자 무한히 새로운 숲이다.(…)
오랜 세월 나는 이 장소에서 놀라운 것들을 수없이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냄새 맡았다. 내 기억으로는 집 밖에서 주의를 기울인 날 중 어느 하루도 내가 모르는 무엇, 새로운 무엇이 내 앞에 번쩍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지만 산속 유원지나 강의 보트 입수 지점을 향해 가느라 내 집을 바쁘게 지나치는 주말 관광 차량의 꾸준한 행렬을 보면 이 장소에 대단한 것이 있다는 자부심을 내려놓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 눈에는 내 집의 풍광이 무해한 무색무취로 보이겠거니 짐작할밖에.
그렇더라도 이 무덤덤하고 한갓진 장소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 이 장소와 대화하면서 나는 다시금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간다. 이 장소가 가진 본성은 내가 온전히 알아내기에 너무나 복잡해서, 나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미스터리에 허우적댄다. 이 장소와의 친밀감, 통합과 수용이 주는 위로를 원한다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오직 참여-참여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것-뿐이다.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선택지와 마들렌기 동굴벽화 창조자들에게 당시 주어졌던 선택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물리적 세계로 들어갈 것, 거리 두기의 편법을 택하지 않을 것.

아래 동영상에서 로페즈 집과 주변을 보실 수 있습니다.

로페즈는 2020년 전립선암 때문에 죽습니다. 전립선암에 시달릴 때도 숲에서 일했습니다. “몸의 기진함이 주는 신기한 활력과 상호 의존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고, 이울어가는 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생명이라는 선물을 만끽”하려 했습니다.

에세이집엔 죽음과 사랑에 관한 생각도 적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죽음은 우리가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도록,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를 남김없이 활용하도록 일깨운다. (…)
권력을 쥐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 속에서 죽기보다 앞에 놓인 가능성을 위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유작입니다. 로페즈는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부터 책 구상에 관여했다고 한다. 로페즈는 입버릇처럼 “돕는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염원”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내이자 작가인 데브라 과트니는 “당신을 사랑한 우리에게 당신의 삶 자체가 도움이었습니다”라며 추모의 글을 적었습니다.

리베카 솔닛이 서문을 썼습니다. 솔닛 글도 좋습니다.

‘에세이’라는 단어는 ‘시도하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에세예essayer’에서 유래한다. 배리 로페즈가 장편 길이의 논픽션과 단편소설도 쓰기는 했지만 어찌 보면 그는 자연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우리가 자연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인식을 향해 다가선 한결같은 에세이스트였다. 시도하기란 나의 바깥 세계는 물론이고 내 능력의 경계 너머를 탐색하는 일이고 그의 많은 글이 이 둘의 조합에서 동력을 얻는다. 한 편 한 편의 에세이는 작가가 애써 시도한 것의 기록이면서 독자들에게 저마다의 탐험에 나설 것을 청하는 초대장이다.(…)
2002년 발표된 이 에세이는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기 시련이 이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구원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더 넓은 인식을 직조해냈다. 그런 관대함은 회고록이 어떤 글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사적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한 호흡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지 어느 장편 회고록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시사했다.

솔닛은 조지 오웰에 관한 책도 썼습니다.


☞ 자연·젠더까지 품은 자유주의자···‘장미의 가시’ 같은 조지 오웰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01241413001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