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털이 더 곱슬인 이유 찾는 과학자…"코팅 소재 개발할 것"

김미래 기자 2023. 12.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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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mental Dermatology 제공

2023년 6월 피부과학 분야 국제학술지인 ‘익스페리멘털 더머탈러지’ 표지엔 알록달록 지점토를 겹겹이 쌓은 듯한 이미지가 실렸다. 이미지의 정체는 털의 외부 덮개인 ‘큐티클’. 실제 촬영한 큐티클 이미지에 디자인 툴로 한 층씩 색을 입힌 것이었다. 그것이 과연 어떤 부위의 큐티클인지 알게 된 후엔 연구진에게 연락을 아니할 수 없었다. 바로 음모였다.

국제학술지의 표지로까지 소개된 논문의 주제는 ‘왜 음모가 머리카락보다 더 곱슬거릴까’다. (doi: 10.1111/exd.14855) 조만간 ‘이그노벨상’을 받을 것만 같은 연구를 대체 누가했는지 살펴보니 국내 연구진 신관우 서강대 화학과 교수팀이었다. 

11월 3일 과학 유튜브 채널 ‘지식인 미나니’를 운영하는 이민환 과학 커뮤니케이터와 그의 연구실을 찾아가 대체 어떻게 연구를 시작하게 됐는지 물었다. 

“꼬리에 꼬리를 이은 호기심 때문이죠.” 신 교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신 교수는 2016년 머리카락의 단백질 구조를 연구한 논문을 처음 발표했다. 당시 그는 연구를 통해 머리카락이 강한 산에 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실제로 몸에 있는 털을 뽑아 습관적으로 먹는 발모광 환자의 경우 머리카락 뭉치가 위장에 쌓여 수술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는 털을 감싸고 있는 큐티클이 산에 강하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이런 큐티클의 특성을 이용하면 산성 용액에 내성을 갖는 코팅 기술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연구 주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연구 중 더 두껍고 뻣뻣한 음모라면 산성 용액에 더 강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다소 민망한 연구는 그렇게 시작됐다.

‘털 연구 소개’ 영상 속 한 장면. 유튜브 지식인 미나니 캡쳐

● 지대한 관심 그러나 연구는 미진한 음모의 과학

음모가 다른 털보다 곱슬거리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이미 많다. 인터넷 게시글이나 해외 잡지를 보면 음모가 곱슬거리는 이유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성관계 시 마찰을 줄이는 쿠션 역할을 하기 위해 곱슬곱슬하다는 주장도 있고 성기 주변에서 분비되는 페로몬을 확산시키는 데 곱슬한 털이 유리하다는 설명도 있다.

그밖에 인간이 고릴라와 같은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음을 증명하는 것이 곱슬한 음모라는 가설도 있다. 고릴라와 침팬지의 털을 비교했을 때 고릴라의 털은 침팬지의 털보다 거칠고 곱슬거린다. 이는 인간의 음모와 비슷하다.

그런가 하면 침팬지의 털은 인간의 머리털과 유사하다. 즉 털의 측면에서 보면 고릴라에서 더 진화한 것이 침팬지, 침팬지에서 털이 사라지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 인간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인간의 음모와 머리카락에 사는 해충들 중 음모에서 기생하는 기생충 ‘사면발이’는 고릴라에게만 존재한다. 또 머리카락에 있는 해충 ‘이’는 침팬지에게만 존재한다. 따라서 DNA의 유사성으로만 따지면 인간은 침팬지와 더 유사하지만 음모의 형태와 기생하는 사면발이를 봐서는 고릴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신 교수는 “이것이 그나마 (음모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며 “누구나 한번쯤 궁금해하는 이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증한 연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신관우 서강대 화학과 교수팀이 비교 실험에 사용한 머리카락(좌)과 음모(우). 신관우 제공

● 실험에 쓰인 건 누구의 음모인가!

신 교수는 기자를 서강대 K관 2층 바이오이미징센터로 안내했다. 이곳은 연구에 필요한 이미지 자료를 만드는 곳이었다. 최첨단 이미징 장비들이 즐비한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실험에 사용된 ‘음모’였다. 망설이며 물었다. “과연 이 털은 누구의 털인가요? (혹시 연구진의 털?)”

질문을 받은 신 교수는 크게 웃으며 “의외로 그 부분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며 재료를 구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연구에 사용되는 인체실험물의 경우 윤리 가이드 라인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교에는 생명윤리위원회가 있고 그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인체실험물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연구진의 인체 실험물을 연구에 사용하는 것은 가이드 라인에 어긋나기 때문에 자신의 털이 절대 아님을 강조(?)했다. 신 교수는 머리카락과 음모를 비교하기 위해 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후 20대, 30대, 40대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생각보다 자신의 털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 구하긴 쉬웠다”고 회상했다.
 

털의 단면 분석. 과학동아 제공

● 현미경으로 비교하고, 산・염기 용액에 담가보니

머리카락과 음모를 비교 연구하는 방법은 상당히 직관적이었다. 먼저 각각의 털을 자세히 관찰한다. 이때 사용하는 장비는 저전압 주사전자현미경(SEM)이다. 저전압 SEM은 일반 광학 현미경으로는 관측이 어려운 물질의 미세영역을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고분해, 고배율로 확대해 보여준다. 연구팀은 저전압 SEM을 이용해 머리카락과 음모의 큐티클층과 단면을 확인했다.

큐티클은 털을 이루는 단백질인 케라틴을 만드는 케라티노사이트 세포가 굳어 만들어진 것으로 털이 새롭게 나는 쪽을 계속 덮으며 자라난다. 대나무의 새순인 ‘죽순’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죽순의 껍질은 가장 나중에 자란 껍질이 한 겹씩 포개지며 자란다. 큐티클도 죽순처럼 오래된 큐티클 위에 새로운 큐티클이 덮이며 두꺼워진다.

연구 결과 음모는 이런 큐티클이 머리카락보다 훨씬 많고 두꺼웠다. 단면의 모습도 머리카락은 얇고 원형에 가까운 반면 음모는 두껍고 타원 모양에 가까웠다. 신 교수는 “음모의 경우 더 많은 큐티클이 겹겹이 쌓이는데 많이 쌓일수록 특정한 부분이 더 두꺼워 질 수 있다”며 “특정한 부분이 더 두꺼워질수록 원보다는 타원에 가까운 모양을 띤다”고 설명했다. 한쪽의 큐티클이 더 두껍고 반대쪽 큐티클이 얇으면 자연스럽게 모발이 휘어 보기에 더 곱슬거린다.

음모와 머리카락의 형태 차이는 털을 만드는 머리카락 낭(모낭)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신 교수는 “큐티클층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은 털을 만드는 모낭에서 더 많은 세포를 만들어 외부로부터 보호한다는 뜻”이라며 “머리카락에 비해 음모는 오줌과 같은 환경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큐티클층이 더 두꺼워졌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신 교수는 ‘오줌과 같은 환경으로부터 털을 보호하기 위해 음모의 큐티클이 더 많아졌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제 검증 실험을 진행했다. 머리카락과 음모가 오줌과 유사한 환경에서 어느 정도 손상되는지를 비교하기 위해 머리카락과 음모를 극한의 산과 염기 용액에 넣고 적외선 분광 현미경(FT-IR)으로 관찰했다.

FT-IR은 털의 화학적 변화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비다. 이 장비를 활용하면 머리카락과 음모를 수소이온농도(pH)가 다양한 여러 용액 등에 담갔을 때 어떤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 있다.

관찰 결과 음모는 소변과 같은 산성 용액에 노출됐을 때 그 저항력이 머리카락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음모는 주변의 극한(?) 환경에 견디기 위해 더 두껍고 강해졌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곱슬머리는 추위에 더 강할까. 게티이미지뱅크, 과학동아 제공
동물털도 곱슬거릴수록 따뜻할까. 게티이미지뱅크, 과학동아 제공

● 거창한 목표보다 순수한 호기심

음모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한 연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생활에 활용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큐티클 특성을 활용해 코팅 소재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큐티클은 자연계가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산성 코팅 소재가 될 수 있다”며 “큐티클을 이용해 인공 고기나 식품에 ‘먹을 수 있는 코팅’을 한다면 식품을 부패하지 않게 더 잘 보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신 교수는 이런 코팅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음모뿐만 아니라 양털 등 다양한 동물의 털을 분석하고 있다.

흥미로운 취재를 마쳐갈 즈음 신 교수는 논문 게재에 얽힌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사실 이번 음모 논문이 세상에 발표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1년 6개월 동안 열심히 연구를 하고 저널에 논문을 투고했지만 ‘학술적 의미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여러 번 수정 요청을 받았다. 신 교수는 “논문의 초록에 이 연구에 대한 쓸모와 연구 방법 등을 강조했다면 수정 요청을 그리 많이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HCl과 NaOH로 만든 산성 또는 염기성 용액에 담지한 머리카락. 왼쪽부터 수소이온농도(pH)가 1.10, 3.00, 5.06, 7.09, 9.06, 12.03이다. 머리카락은 모든 농도에서 45일이 지나도 녹지 않고 본래 모습을 유지했다. 산과 염기에 모두 강하다는 뜻이다. 신관우 제공

“모든 실험에 거창한 목적이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호기심을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목적이 되죠. 신약을 개발하고 반도체를 설계하고 우주 추진체를 개발하는 크고 숭고한 목표를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연구만큼은 순수한 호기심이 목적이라는 것을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과학하는 사람의 순수한 호기심을 강조한 신 교수는 과학자를 꿈꾸는 과학동아 독자들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대단한 연구를 해낸 과학자들도 ‘왜 과학자가 됐느냐’는 질문에 매우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걸 쉽게 볼 수 있어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정말로 궁금한 호기심만으로도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용인하는 것이 기초과학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관련기사 
과학동아 12월호,  [최신 이슈] 그 털이 곱슬거리는 이유

[김미래 기자 futurekim9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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