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이 진료하네’ 환자의 욕설… 실력 증명하란 죽비소리 같았죠”[M 인터뷰]

권도경 기자 2023. 12. 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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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신마비 딛고 치과 교수 된 분당서울대병원 이규환
본과 3학년 때 ‘다이빙 사고’
동기들 노트 눈으로 모두 암기
욕창까지 덮쳤지만 독하게 공부
고무줄에 기구 끼워 수천 번 연습
100군데 넘는 지원 끝 진료 맡아
꼼꼼하다 입소문에 단골 많아져
15년째 장애인 구강검진 봉사
올해 김우중 의료인상 수상 영예
따뜻한 의사로 기억되고 싶어
이규환 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교수가 19년째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건진 센터 내 복도에서 지난 18일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김동훈 기자
이규환 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교수가 손가락에 진료 보조기구를 착용하고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지난 18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분당서울대병원. 이곳에서 19년째 일하는 이규환(44)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교수의 진료실은 두 가지가 달랐다. 의사가 휠체어에 앉아 있고, 환자를 볼 때는 손가락에 치과 보조기구를 끼워야 한다. 그는 진료실에 들어선 환자에게 항상 이런 말을 먼저 건넨다. “제가 몸이 불편하고 느립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정확하게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이 교수는 세계 최초 최중증장애인 치과 의사다. 21년 전 갑작스레 큰 사고를 당했지만 전신마비를 딛고 치과 의사가 됐다. 그는 진료와 교육, 연구에 매진하면서도 15년째 장애인 구강 검진 등 봉사활동을 이어와 얼마 전에는 제3회 김우중 의료인상을 받았다.

이규환 교수는 건장한 치대생이었다. 부족한 것도, 부러운 것도 없었다. 졸업하면 돈을 벌어 좋은 집도 사고 여행도 다니는 평범한 일상을 그리면서 단국대 치대를 다녔다. 사고는 불현듯 닥쳤다. 치대 본과 3학년이던 2002년 여름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목뼈가 부러졌다. 중추신경과 호흡중추도 다쳤다. 그날 이후 이 교수는 어깨와 손 일부 외엔 모두 마비됐다. 죽는 게 차라리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환자실에 머물던 한두 달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던 시간이었다. 사지를 움직일 순 없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곁에 있던 환자가 심폐소생술(CPR)을 받다가 숨을 거두는 소리와 환자들이 통증 탓에 악을 쓰는 고함을 내내 들어야만 했다. “나도 결국 저렇게 되겠구나”란 공포감이 덮쳤다. 그 순간 간호사들에게 매달렸다. 단 10분이라도 좋으니 책을 보여 달라고.

“정말 감사하게도 간호사들이 돌아가면서 매일 책을 보여줬어요. 만화책, 성경, 소설, 무협지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어요. 글을 읽는 시간은 잠시라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깐요. 책과 신문기사 속에서 역경에 맞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어요.”

읽은 책은 100여 권이다. 이때 무협지에서 읽은 문장을 가슴에 품었다. “앞으로 너는 상처도 많이 입고, 많이 다칠 것이며, 남들도 널 많이 힘들게 할 거다. 네 마음에 강철을 깔아라.” 책은 이 교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병상에 누워 수백 번 생각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이 교수는 죽어도 치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두려운 게 없었다. 이미 그는 중환자실에서 수만 번 죽었다. 사고를 당한 지 1년도 안 돼 복학을 결정했다. 제대로 재활도 못 한 상태였다. 모두가 말렸다. 몇몇 교수들은 아예 “학교에 오지도 말라”면서 반대했다. 그들은 그에게 사법고시를 보거나 다른 과로 옮길 것을 권했다. 이 교수도 물러서지 않았다. 치과 의사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치과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다가 죽고 싶었다.

복학한 첫날 그가 마주한 계단은 만리장성 같았다. 계단 밑에 멈춘 그의 휠체어를 동기들이 들어 올렸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필기도 동기들이 다 빌려줬다. “독한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눈으로 모조리 외웠어요. 밑줄조차 그을 수 없으니 눈으로 계속 볼 수밖에 없었어요. 욕창 탓에 앉아 있질 못하니깐 집에 오면 방바닥에 교재를 펼쳐놓고 침대에 엎어져서 하루 종일 봤어요. 사람 의지가 대단한 게 닥치면 어떡해서든 하게 돼요. 저는 무식하게 열심히 한 것밖에 없어요. 제 노력이 1이라면 동기, 선후배, 교수님들 도움은 100이었어요. 전 바닥에 떨어진 동전 하나 줍지 못하니깐요.”

하지만 결국 탈이 났다. 수업을 듣느라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욕창이 악화된 것이다. 골수염이 생겨 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담당교수가 응급수술을 권했다. 수술을 선뜻 결정할 순 없었다. 휴학 후 수술하면 다시는 학교로 못 돌아올 것 같았다. “교수님들 반대에 맞서 우격다짐으로 복학했는데 다시 휴학할 순 없었어요. 담당교수에게 딱 한 달만 ‘연명’하게 해달라고 울면서 매달렸어요. 중간고사가 끝나면 어떤 수술이라도 다 받겠다면서 그때 다리를 잘라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했었어요.” 온갖 독한 약을 먹으면서 버티다가 기절도 하곤 했다. 이 교수는 중간고사를 무사히 치른 후 아무도 모르게 욕창 수술을 받았다.

이 교수가 자신의 진료 철학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김동훈 기자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의사 면허를 땄지만 벽을 다시 맞닥뜨렸다. 그를 받아주는 병원은 없었다. 반년 동안 100군데 넘는 병원에 원서를 넣었다. 면접을 보고 나면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때 ‘마음에 강철을 깔아라’는 말이 떠올랐다. 병원장, 부원장, 기조실장 등에게 끈질기게 전화했다. 2005년 7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회신이 왔다. “거절만 당하면서 좌절도 많이 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죠. 신기하게도 열심히 부딪히니깐 새로운 길이 열리더라고요. 나중에 병원장님께 왜 저를 뽑으셨냐고 여쭤봤어요. ‘너무 귀찮게 해서’라고 딱 한마디 하셨어요.” 이 교수가 처음 진료하는 날 병원장을 비롯한 웬만한 병원 관계자들은 모두 와서 지켜봤다.

병원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가장 힘든 건 환자의 시선이었다. 그를 경책(警策·죽비로 꾸짖는 행위)으로 일깨운 것도 환자였다. 대다수 환자는 진료받기를 거부했다. “70대 할아버지가 진료실에 들어와서 저를 쳐다보고 ‘병신이 진료하네’라고 욕을 하더니 나가 버리더군요. 재수 없다고 ‘퉤’ 하며 침을 뱉는 환자도 있었어요. 제게 욕하고 침을 뱉는 환자 덕분에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배울 수 있었어요. 큰 동기가 부여됐죠. 제 마음에 상처로 남지 않게끔 강철을 깔아야 하는 시기였어요.”

환자들의 항의는 이 교수에겐 실력으로 증명해 인정받으라는 죽비 소리였다. 이 교수는 손가락에 진료기구를 피도 안 통할 정도로 고무줄로 묶은 후 수천 번씩 연습했다. 그의 손은 상처와 굳은살로 뒤덮였다. 환자 10명이 들어오면 두어 명은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교수님만큼 꼼꼼하게 진료해주는 의사가 없다”면서 찾아오는 환자들이 생겼다. 국립재활원과 장애인고용공단의 도움을 받아 손에 맞는 보조기구도 맞췄다. 이젠 일부러 그를 찾는 환자들도 늘었고, 10년 넘게 진료받는 단골 환자도 많다.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10배 넘는 노력을 해야 조금이라도 쫓아갈 수 있어요. 첫발을 내딛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진정으로 하면 환자들도 닫힌 마음을 열어주더군요. 물론 실력은 기본이에요. 처음에는 환자들이 선입견을 가지죠. 절대로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정말 지독하게 최선을 다해야 해요.”

이 교수는 어떤 의사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는 주저 없이 ‘따뜻한 의사’를 꼽았다. 좌우명은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자’다. “환자마다 상황이 다 달라요. 환자들이 만족하려면 ‘최고’가 아니라 ‘최선’의 치료를 해주는 게 가장 중요해요. 가슴뿐만 아니라 머리도 따뜻한 의사가 되고 싶어요.”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고는 이젠 좋은 추억이 됐다고 했다. 평생 안고 가야 할 장애도 ‘친구’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영웅시하는 시선에는 선을 그었다. “전 단지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산 것밖에 없어요. 남들보다 더 많이 힘들었지만 조금 더 열심히 산 거죠. 저를 죽이지도 완전히 살리지도 않은 신의 뜻이 있을 겁니다. 죽은 후 하나님 앞에 서면 ‘이렇게 살려주신 거 잘하신 일이라고, 멋지게 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거예요.”

인터뷰 내내 이 교수가 가장 많이 한 말은 ‘감사하다’였다. 그는 세상 어디선가 절망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얘기를 듣고 희망을 얻는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선 사람이 고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스한 응원과 위로였다.

■“비장애인 한 번 하면 난 열 번 연습… 피나는 노력하면 사회도 인정해줘”

장애인 향한 李교수의 당부

이규환 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교수가 봉사를 시작한 계기는 중환자실에서 수없이 했던 기도다. 당시 이 교수는 “제발 날 다시 일으켜주시면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평생 돕고 살겠다”고 매일마다 울면서 기도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더 살아봐야지’라고 마음을 먹은 후 한 발을 내딛자 어려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2008년 경기 용인시 기흥장애인복지관을 시작으로 노인종합복지관·장애인협회 등 여러 복지기관에서 15년째 구강 건강 상담과 강연을 하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은 병원이나 시설에 오래 머물지 말고 세상에 부딪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치대 복학 전 재활병원에 잠시 있었는데 병원이 ‘내 세계’가 됐다”며 “병원 밖으로 한 발짝 나서길 무서워하는 겁쟁이가 되기 쉬운데 중추신경 손상은 절대로 낫지 않는다는 걸 배웠기에 복학을 빨리 결정했다”고 말했다.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에게 단 3초도 신경 쓰지 않는다”며 “다른 사람들이 장애인을 비하하고 불쌍하게 여긴다는 내적 시선을 이겨내지 않으면 정말 힘들어진다”고 조언했다. 실력을 갖추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도 당부했다. 이 교수는 “비장애인 의사가 한 시간에 한 번 한다면 난 10배를 더 연습했다”며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당연히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독하게 마음을 먹고 세상에 덤벼야 한다”며 “비장애인을 넘어서는 노력을 해서 인정을 받아야만 혜택과 지원도 따라온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 강연은 인기가 많다. 그의 강연을 듣고 세상에서 다시 일어서는 장애인들도 나왔다. 한 장애인은 공무원 시험을 봐서 공무원이 됐다. 뇌성마비 자녀를 둔 부모는 이 교수의 강연을 들은 후 아이를 복학시켰다. 이 교수는 그들에겐 희망의 증거다. 이 교수는 “봉사를 하면 할수록 남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복을 받는다”며 “봉사는 내 삶에 더 감사하게 되고, 더 겸손하게 되고, 더 따뜻해지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권도경 기자 kw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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