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쪽방촌 주민들의 ‘특별한 수업’…“방에서 나와 세상을 향해 노크”

백경열 기자 2023. 12. 2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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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행복나눔의집’에서 지난 27일 오후 쪽방 거주민들이 스칸디아모스(천연이끼)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백경열 기자

“방에서 벽과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면 우울했어요. 당뇨도 심해지는 것만 같고요. 이끼를 만지며 만들기를 하고 나서 나아졌어요.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느낌이에요.”

지난 27일 오후, 대구 중구 ‘행복나눔의집’에서 만난 박학준씨(67)는 ‘특별한 수업’을 받고 있었다. 20여년 전부터 쪽방에 머물고 있다는 그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시간이다.

이날 박씨와 비슷한 연배의 중장년층 10여명은 두꺼운 외투를 입고 책상에 둘러앉아 스칸디아모스(천연이끼)를 조금씩 떼어내 목공풀로 붙이는 등 작품의 형태를 다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평면 위에 그려진 세계지도 등의 도안에 오색 빛깔의 색감을 입히거나 나무나 돌, 집 모형 등을 이용해 입체감 있게 표현하는 작품도 있었다.

수강생들은 작품을 만들면서 틈틈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강사에게 신청곡을 청해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흥얼댔다.

이끼로 커다란 꽃잎을 장식하던 이상진씨(55)는 “(혼자가 된 뒤) 주로 방에만 있으면서 바깥 활동을 할 생각을 못 했는데 막상 수업을 들으니 재미도 있고 작품을 만들어 보람된다”면서 “내년에도 여건이 된다면 계속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구지역 쪽방 주민들을 위해 마려된 원예 수업은 여인숙·여관 등에 사는 20명이 미세먼지 저감 식물인 스칸디아모스를 재료로 작품을 함께 만드는 자리다.

지난 3월부터 이들이 매월 정기적으로 모여 3~4시간씩 만든 작품은 9개월간 30여점에 달할 정도로 거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행복나눔의집은 지난 20일부터 대구YMCA와 인근 곽병원에서 ‘만남의바램’이라는 이름의 원예 작품 전시회도 열고 있다.

대외 활동을 힘들어 하는 쪽방 주민이 사회적 유대를 갖도록 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는 게 주최 측의 설명이다.

대구 중구 ‘행복나눔의집’에서 지난 27일 오후 쪽방 거주민들이 스칸디아모스(천연이끼)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백경열 기자

쪽방 주민의 편의시설인 행복나눔의집과 대구희망진료소가 2021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마련한 원예 수업은 생활문화 지원사업의 하나로 시작됐다.

행복나눔의집은 몸이 아파 대구희망진료소를 찾는 쪽방 거주민들을 돌보면서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해 원예 수업을 기획했다고 한다. 심리, 정서적인 어려움과 고립으로 극심한 우울감에 자살까지 시도하는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희망진료소에서 일하던 이선진 간사는 원예자격증을 딴 뒤 쪽방 거주민들을 위해 수업을 시작했다.

행복나눔의집 관계자는 “보다 많은 예산이 지원돼 쪽방 거주민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이 이뤄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올해 일정이 끝난 수업은 내년 3월 재개될 예정이다.

이선진 대구희망진료소 간사는 “방에서 나오기 어려워 하는 쪽방 거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열심히 수업에 임하고 건강한 대인관계를 맺는 모습에 뭉클할 때가 많다”면서 “원예 분야 말고도 문화·예술 등 전문가들의 다양한 교육이 이뤄지도록 지원이 보강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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