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연소되지 않은 '참새 누님'…"산은 제 2의 신앙"

윤성중 2023. 12. 28.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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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참새와 허수아비' 가수 조정희
테이블마운틴 정상에서 .

1982년, 대학교 2학년 때 조정희씨는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다. 참가번호 8번이었다. 청바지에 파란색 셔츠를 입었고, 머리를 만지거나 화장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그럴싸하게 꾸미는 건 노란색 통기타뿐이었다. 그렇게 넓은 무대에 덩그러니 혼자 섰다. 그녀는 덤덤하게 노래를 불렀다. 제목은 '참새와 허수아비'였다.

"나는 나는 외로운 지푸라기 허수아비 너는 너는 슬픔도 모르는 노란 참새~"

숙명적인 이별의 아픔을 참새와 허수아비에 비유한 노래였다. 슬픈 감정을 담아 차분하게 가사를 읊조렸다. 노래는 무사히 마쳤다. 청중들이 보내는 박수소리는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무대 뒤쪽으로 도망치듯 달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노래할 때 딱히 실수하진 않았지만 준비한 것에 비해 잘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서 이처럼 큰 생방송 무대는 처음이었으니 그럴만했다. 수상에 대한 기대 없이 출연자석에 앉아 다른 친구들의 공연을 지켜봤다. 이윽고 동상, 은상, 금상이 발표됐다. 그녀는 끝났다고 생각해 기타를 챙기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그때, 사회자인 차인태 아나운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똑똑히 들었다.

라디오 DJ 모습.

"82 MBC 대학가요제 대상 조! 정! 희!"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생방송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타를 내버려둔 채 재빨리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앙코르에 응했다. 노래가 끝나고 그녀는 이전처럼 무대에서 바로 내려갈 수 없었다. 기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몰려왔기 때문이다.

대학가요제 실황 때 모습.

조정희씨는 가요제 수상 이후 여기 저기 대학 축제에 불려 다녔다. 인기가 대단했다. 수상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흔들림 없이 대답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어 이후 방송 출연 때나 여러 기사에 이런 사실이 언급됐다. 이에 따라 방송 출연 제의를 수 차례 받았고 당시 유명했던 '지구레코드사'에선 몇 년간 지속적으로 음반 발매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유명해질 '기회'들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삶을 '수수께끼 능선' 보듯이 했다. 대학가요제 수상 이후 그녀는 대중이 모인 곳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산봉우리였던 그녀는 다른 덩치 큰 산들에 '가려'졌다. '참새와 허수아비' 말고 그녀가 부른 다른 곡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요청이 있을 때 방송이나 라디오에 출연했다. 이후 40여 년이 흘렀다. 그녀에게 "왜?"라고 묻는 사람은 많았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버거웠어요"

"유명해질 수 있었을 텐데요? 왜 가수로 데뷔하지 않았죠?"

노르웨이 뤼세피오르드에 있는 쉐락볼튼에서.

조정희씨를 만나고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중간에 나는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방송 출연 요청, 음반 발매 요청 등이 갑작스럽게 밀려들었어요. 어린 마음에 감당하기가 어려웠죠. 대학가요제는 노래를 잘하고 좋아하는 대학생이면 출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간 것뿐이었어요. 이것을 가수가 되기 위한 등용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떤 방송 프로그램 녹화에 갔는데 아침 9시부터 밤까지 리허설을 했어요.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노래했다가 했어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음악 하는 건 좋았는데, 이걸 직업으로 삼는 건 자신이 없었어요."

로포텐 Matind 산에서.

그녀는 순종적이고 여렸다. 이 성격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늘 이렇게 말했다.

"어른들을 공경하고 뭘 먹을 때는 꼭 앞에 앉은 사람에게 먼저 권하고, 남의 집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면 안 되며, 남한테 절대 손 벌리지 말아라."

이 말들은 어린 그녀의 삶을 지배했다. 그녀는 이 법을 어기는 일이 거의 없었고 어머니가 전한 말들을 모두 실천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여린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음악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노래 중 하나를 영어로 불러서 당시 담임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고등학생 때 음악시간이 되면 누구보다 빨리 음악실로 갔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그녀는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노래하면서 느끼는 슬픔과 기쁨 같은 감정을 맛보는 게 좋았고, 그 정서를 순화하는 데 도움이 됐다. 대학가요제에 나가면서 그녀는 울타리를 넘어 몇 발자국 전진했다. 그녀는 대학가요제를 단순한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가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그 와중에 대학가요제는 젊은 사람들의 억눌렸던 기분을 발산하기에 딱 좋았다. 그녀는 이것이 음악이 주는 순기능이라고 여겼다.

쉐락볼튼 가는길에서.

"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 '나 어떡해(샌드페블즈)'를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이후 매년 이어지는 대학가요제를 보면서 대학에 가면 꼭 나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노래를 잘하고 좋아했던 저에게 대학가요제 출전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잠깐 '일탈'했다가 그녀는 다시 울타리 안으로 돌아왔다. 대학가요제 출전 이후 남은 학업을 마쳤고 졸업하고 얼마 후 결혼했다. 그녀는 세 아이의 출산과 육아, 학업 뒷바라지에 온 힘을 기울였다. 새벽에 깨고 새벽에 잠드는 만만치 않은 나날들을 보내며 사실상 가수의 길과는 멀어지는 생활이 10년 넘게 이어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이들이 자라는 걸 보는 것도 그녀에겐 큰 기쁨이었고 보람이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엔 학교에 다녔다. 언젠가 방송 쪽에서 일할 것이란 기대를 품고 신문방송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때 즈음 뜻밖의 일을 시작했다.

로포텐 Reine 에서.

"1997년쯤 될 거예요. 대학가요제가 열린 지 20주년 되는 해였어요. 그해 대학가요제를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굉장히 크게 했어요. 특별공연이 열렸는데, 역대 수상자들이 나왔죠. 거기에 저도 초대됐어요. 대형 스크린에 당시 제가 살고 있는 모습을 영상에 담아 띄웠어요. 우리집 내부가 생방송으로 전부 공개됐어요. 방송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어요. 집이 유럽의 어느 가정집처럼 분위기가 좋다면서 자기집도 비슷하게 꾸며달라는 요청이었죠."

평소 공간 꾸미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조정희씨는 대학 때 전공(산업디자인)을 살려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실내디자인 콘셉트는 모던함과 엔틱함의 조화였다. 그녀는 특히 실내 조도가 감성에 미치는 영향에 민감했다. 인테리어는 고도의 감각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바닥재와 벽지는 물론이고 그림, 가구, 램프 등의 소품 모두를 직접 선택하는 세심함을 보이며 약 6년 동안 여러 집과 사무실, 연구실을 고쳤다. 그야말로 이 일에 맹렬하게 몰입했다. 사이사이에 방송출연도 했다. 당시 7080 콘서트가 붐이었다. '참새와 허수아비'는 대학가요제의 상징적인 곡으로서 당시 국내에서 열렸던 많은 콘서트에 초청됐다. 또 그녀는 대중음악 가수로서 쉽지 않았던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클래식 무대에 올라 4회 노래를 불렀고, 2회 사회자로 나서는 등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TV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음악적 끈을 놓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산에서 먹는 식사.

라디오 DJ도 했다. 어느 날 SBS 라디오에 게스트로 초대됐다가 담당 PD의 눈에 띄어 '최백호의 낭만시대'에서 고정 코너를 맡아 진행했다. 한참 뒤엔 EBS 라디오에 게스트로 나갔다가 제작진의 제의를 받고 '조정희의 오후N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녀는 여기서 또 열과 성을 다했다.

"'그 사람 그 노래'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들을 모시고 게스트가 직접 선곡한 노래를 들으며 삶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어요. '금요라이브'라는 코너도 있었는데, 클래식, 뮤지컬, 국악, 대중음악 분야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뮤지션을 초대해 라이브로 공연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고은 시인, 나경원 의원, 영화배우 안성기, 이시형 박사, 최진석 교수 등이 출연했고, 음악인으로는 김민 감독, 양성원, 고성현, 안숙선, 최정원, 최백호 등 수많은 명사들이 초대됐습니다. 출연진들은 특히 감정선이 칼끝 같은 예술가들이어서 신발에 흙이라도 털어주려는 마음가짐으로 게스트를 대하며 방송에 임했어요. 또 생방송 전에 직접 섭외한 분들을 진행자인 제가 사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했어요. 이렇게 하니까 생방송이 두렵지 않았어요."

테이블마운틴이 보이는 라이온스헤드마운틴 정상에서.

그녀의 이런 노력이 청취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청취율은 올라갔다. 방송국 사정으로 지속할 수 없었지만 방송을 하는 내내 그녀는 행복했고 최선을 다했을 때 얻어지는 결과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다만 매일 소통하며 정들었던 청취자들과의 이별에 그녀는 긴 시간 마음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한 달에 15회 산행

"아, 이제 산 이야기인가요? 자, 지금부터 몸과 마음을 좀 정돈할게요."

언제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했는지 묻자 그녀는 표정이 바뀌었다. 말투도 변했다. 활짝 웃었고, 목소리는 하이톤으로 조정됐다.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처음 산에 간 건 2003년쯤이에요. 아이들 출산과 육아가 어느 정도 끝날 즈음인 서른여섯 살부터였던 것 같은데, 그때 피트니스 센터에서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등산 마니아인 지인이 월악산 제비봉에 가자고 했어요. 올라갈 땐 잘 갔는데, 내려올 때 고생했어요.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러지?' 궁금해서 정형외과에도 갔어요. 의사 선생님은 '안 쓰던 근육을 갑자기 써서 그렇다'고 했어요. 등산이 전신운동이 된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죠. 월악산 산행이 사실상 산 사랑에 빠지게 된 시작이었어요. 그후 전국의 산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그 다름과 깊이에 놀랐어요. 이것에 감사하면서 끝없이 다른 산을 찾고 있어요. 많이 가면 한 달에 15회 산에 간 적도 있어요. 그것도 겨울산을요."

라이온스헤드마운틴 가는길에서.

"그동안 해외 산행도 많이 한 걸로 아는데요, 어디 갔었죠?"

"많진 않은데요, 몇 군데 대표적인 곳을 꼽으면,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하늘길이 열린 지난해 11월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와 네팔의 작은 에베레스트라고 불리는 피케이 피크에 16일간 다녀왔어요. 지난 4월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두 명산 테이블마운틴과 라이온스헤드마운틴에 17일간 다녀왔어요. 5월엔 뉴욕에서 차로 2시간 떨어진 미네와스카주립공원 샤완겅크산에도 갔다왔어요. 7월에는 저의 버킷리스트였던 노르웨이 3대 피오르드와 로포텐제도 트레킹을 18일 동안 완주했고요."

"와, 많네요!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열성적으로 산에 다니시는 거죠?"

"사실 2019년부터 해외산행을 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코로나로 못 가다가 다시 풀린 작년부터 봇물 터지듯 산행했어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 물론 남편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줬기 때문에 가능했죠."

노르웨이 하당에르 피오르드에 위치한 트롤퉁가에서.

"산에 오르는 건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에 가면 고산병에 걸려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무엇 때문에 이처럼 맹렬하게 산행을 하는 거죠?"

"물론 힘들긴 한데요, 아름다운 풍경이 다 보상해 주잖아요.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 마차푸차레를 봤어요. 피시테일이라고 알죠? 굉장히 아름다웠어요. 햇빛이 봉우리를 비추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였어요. 노랗게 보이기도 하고 짙은 파랑으로 보이기도 했어요. 바위와 눈이 만드는 그림자가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엄밀히 따지면 히말라야의 산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긴 눈과 바위, 흙으로만 뒤덮여 있으니까요. 어찌 보면 황량하죠. 그런 점에서 트레킹을 할 때 어떤 지점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아, 좀 더 구체적인 걸 말씀하시는군요. 좋아요. 저는 산행할 때 우리가 지나는 혹은 지나갈 '길'을 보면서 감동받는 경우가 많아요. 나 혼자만 갈 수 있는 폭이 좁은 등산로 양쪽으로 푸르른 나무가 빼곡한 그런 길이오. 누가 디자인한 게 아닌데,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탄성을 지르곤 해요.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 생각도 했어요. 얼마나 많은 발걸음이 이 길을 만들었을까 하면서, 흘린 그 땀으로 다져진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지금 산에 이처럼 열성적으로 다니는 건 젊었을 때 누리지 못한 자유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가요?"

"아니오, 그렇진 않아요. 이전에 미처 몰랐던 것을 발견한 것에 대한 기쁨이라고 하는 게 더 가까울 것 같아요."

"산에 다니기 전에는 지금처럼 말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저 산 얘기 나오면 이렇게 변해요. 누가 그러는데, 산 전도사냐고. 남자들 군대 갔다 온 다음 군대 얘기하듯이 누구든 만나면 산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산이 조정희씨께 많은 영향을 끼쳤군요?"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며.

"네, 맞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연 중에서 저는 산이 가장 좋아요. 산행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어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고 오히려 산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집니다. 먼저 건강하고 단단한 몸을 갖게 함은 물론이고요. 묵묵히 산행을 하면서 흔히 말하는 호연지기도 길렀고요. 비움의 철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지금 산은 제 삶을 변화시키고 저를 지탱시키는 힘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산은 사람과 달라서 배신을 모릅니다. 흘린 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채워주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요.

산은 저에게 제2의 신앙이라고 말할 만큼 제 삶에서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입니다. 또한 저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산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어요. 산행에 임할 때는 마음가짐부터 복장까지 잘 정돈하는 편입니다. 산에서 먹는 음식도 정성껏 준비하고요.

더운 여름에 힘든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시원한 차 안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떠올라요. '산에 왜 가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거기 산이 있기 때문에Because It's There'라고 답했던 영국의 등산가 조지 말로리를 떠올리면서 다음 산행을 생각합니다. 아마도 지독한 산사랑 때문이겠죠?"

안나푸르나를 향해 가는길에서

"앞으로 산과 관련해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까요?"

"네팔인들과 히말라야의 산들을 경험하면서 산행 자체의 성취감은 물론이고, 트레킹을 하는 과정에서 전기, 난방이 잘 되지 않고 통신도 잘 안 되고 화장실도 형편없는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겨내는 것을 통해 얻은 것이 많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이만큼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얻은 것이에요. 또 살면서 베풀고 나누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꼈어요. 모든 여건이 허락한다면 내년 가을에는 에베레스트에 가고 싶어요. 이탈리아 돌로미테와 일본의 북알프스도 갈 생각입니다.

제가 해외 산행을 할 때면 더 느끼는 것이 있는데요,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 같은 큰 산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엔 참으로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산들이 많다는 거예요. 국내산은 많이 가봤지만 하나의 산에서 사계절을 경험해 봐야 비로소 다 가본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 틈나는 대로 국내산도 더 열심히 가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좀 큰 틀에서 하는 생각인데요, 국민들이 꾸준한 산행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산을 알게 되고 산과 친해질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노력하고 싶어요. 산이 좋고 산을 사랑하니까, 좋은 건 나눠야지요."

피케이피크 가는 길에. 과일 파는 여인과.

"산행과 관련된 것 말고, 꿈이나 목표가 있을까요?"

"얼마 전 TV 방송에 나가 말씀드렸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새와 허수아비'라는 노래에 대한 강렬한 기억과 애정을 갖고 계신 분들을 자주 만나곤 해요. 과분하지만 사랑을 받는 건 정말 감사하고 기분 좋은 일인데요, '그럼 나는 그분들께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라고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또 제 자신이 완전연소되지 않은 것에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는 걸 순간 순간 느끼고 있어요. 이제는 음악적으로 좀 더 솔직한 고민을 하면서 정중동의 자세로 답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빛나는 10년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저의 목표이자 꿈입니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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