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고 완전한 삶이란 없다

한겨레 2023. 12. 2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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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픽사베이

완벽이라는 허구

완벽에의 추구는 생명성을 앗아가기도 하고 소중한 삶을 허비하게 하거나 망가뜨리기도 한다. 그러니 완벽해지기 위해 애쓰지 말자.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완전하고 완벽한 삶에 대하여 숲은 그런 삶은 아예 없다고, 그것은 허구의 세계라고 보여준다. 완전(完全)은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음”을 뜻하고, 완벽(完璧)은 “흠이 없는 구슬, 즉 결함이 없이 완전함을 이르는 말”이다.(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평생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춰 모자람도 흠도 없는 삶을 산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요즘은 돈이면 삶이 더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듯하다. 그런데 왜 모자랄 것 없는 서식지(?)에서 태어난 생명인 재벌가 3세들이 약물과 마약에 손을 댔다는 뉴스가 그토록 잦고 또 끊이지 않는가? 또 자녀들에게 꽃길만 걷게 하고 싶다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관심을 쏟는 부모들이 넘쳐나는데, 왜 전에 없이 많은 아이와 청소년, 청년이 정신과를 찾는 현실이 빚어지게 되었을까? 예전에는 ‘청춘’을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말이라 했는데, 지금은 ‘청년 우울증이 심각하다’는 소식으로, 그런 말을 듣고 자란 기성세대를 후려치고 있다. 장기화하고 있는 자살률 세계 1위 국가, OECD 회원국 중에서 출산율 꼴찌인 나라, 그만큼이나 우리 사회는 생명성의 반대 방향을 향해 암울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난맥상을 어디부터 풀 수 있을까? 숲은 어느 때에 어떤 모양으로 그게 얼마나 크든 작든, 어떤 색깔로 피든 그 꽃의 아름다움이 어떤 존재에 의해서건 존중받는 세계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 우월과 열등, 성공과 실패, 선과 악, 미와 추 등으로 인간의 다양성을 지극히 단순화하고 양분해버리고 있다. 개인들은 그렇게 굳어가고 있는 기준을 좇아 최대한 완벽해질 것을 강요받고 있고, 공동체에는 삶의 다양성과 여유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러므로 닦달을 강요하는 지금의 세계를 뜯어고쳐 다양성이 회복된 세계를 만드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

픽사베이

세계를 뜯어고치는 일

사막화된 땅을 숲으로 바꾸는 일은 쉬운 일도, 단박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한 그루 나무나, 한 포기 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막이라는 그 삭막한 터전의 바닥, 즉 토대가 변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 메마른 땅을 버텨내는 지의류들이 버텨주어야 한다. 뒤이어 아주 자그마한 풀씨가 먼저 싹트고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 미미한 생명의 삶이 더 많은 씨앗을 만들고, 그 씨앗들이 지속해서 살고 죽으면서 아주 조금씩 흙에 양분을 축적해내야 한다. 그래서 흙 속에 유기물 함량이 늘고 수분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야 조금 더 큰 풀씨가 싹틀 수 있다. 이어서 그들이 떨기나무를 부르고, 떨기나무가 다시 키 큰 나무들을 불러올 수 있을 때 비로소 그윽한 숲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 공동체로 치자면 그것은 가장 밑바탕이 되는 부모와 교육이 바뀌고, 그래서 시민의식이 푸르러지고 그래서 정치가 시민을 배신하고는 존립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한 토대로 바뀌면서 시스템 전체의 설계를 바꿀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제대로 가능한 거대한 문제다.

이렇듯 세계를 뜯어고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자각한 사람이라면 그는 또한 그것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임도 알게 된다. 그래서 우선 황무지를 버텨내는 작은 풀씨의 자세로 발 딛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피울 수 있는 꽃을 성실히 피워간다. 그리고 그 일을 주변과 함께 해나가려 모색한다.

반복적인 동해를 입고도 열심히 열심히 살아가는 느티나무. 사진 김용규 괴산여우숲생명학교장

삶의 실체에 대한 내 인식을 바꾸는 일

세계를 바꾸는 일은 만만치 않고 어렵지만,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일은 얼마든 가능하고 훨씬 수월하다. 삶의 실체를 다시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완전 또는 완벽한 삶의 추구라는 허상을 지우고 바로잡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보았듯이 완벽은 없다.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주가 그렇게 생겨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는 빛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뒷면의 그림자를 포함하여 창조되었고 존속할 수 있는 세계다. 다시 말해 완전함은 눈부시게 빛나는 시간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완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신의 영역일 것이다. 자연 어디에도 개별적인 존재로 완벽할 수는 없다.

패배하지 않는 삶이란 없고, 상처받지 않는 생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한 번 산 존재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설렘 가득했던 사랑은 기어이 그 뒷면에 잠복해 있던 아픔과 미움을 만나야 한다. 요컨대 세계는 빛과 그 뒷면을 지배하는 시간, 즉 칠흑처럼 어두운 시간을 합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생명 존재로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경험할 수 있는 삶을 나는 완벽한 삶이 아니라, ‘온전한 삶’이라 부른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생명으로서 우리가 살아볼 수 있는 삶은 완전하거나 완벽한 삶이 아니다. 다만 온전한 삶을 추구할 수 있을 뿐이다.

길섶에서 제 자리 환히 밝히고 이쓴 흰민들레. 사진 김용규 괴산여우숲생명학교장

온전한 삶

그렇다면 온전함 삶이란 어떤 삶인가? 온전한 삶은 내 앞에 닥치는 빛과 그림자, 그 모든 사태를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삶을 뜻한다. 둘 중 내가 좋아하는 한 면만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상반되는 면이 서로를 떠받침으로써 온전함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히 사는 것은 가능하다. 아끼던 무엇을 잃었다 해도 괜찮다. 그 사람이 나를 내팽개치고 가버렸다고 해도 괜찮다.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숨 쉬고 있다면, 살아 있다면, 살아 있기만 하다면 괜찮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새로워지는 것이므로 거기서 다시 새로워지면 된다. 새로워지기 위해 해볼 수 있는 모험을 해보면 된다. 그래서 아프다면 그것 역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대극을 수용하고

그렇다면 온전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대극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삶은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선 지점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우열의 좁은 잣대가 거두어진 세계를 만나면 더 풍성하고 온전한 삶이 열린다. 내 안의 탐욕과 음란한 구석을 부정하면서 그것을 남에게 투사하고 덮어씌우고 내던지려는 마음보다,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알아채고 받아들이는 자세로부터 온전한 삶은 펼쳐진다. 그 불완전한 자기 내면을 늘 알아채려 애쓰고 살뜰히 성찰하고 새롭게 실천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 보려 할 때 비로소 삶이 온전성을 갖추기 시작한다.

댕강 잘려도 다시 일어나 기어코 꽃 피우는 애기똥풀. 사진 김용규 괴산여우숲생명학교장

결과보다 과정 중심으로 살고

아울러 결과 중심으로 살기보다 과정 중심으로 삶을 대하고 맞이함으로써 우리는 온전한 삶을 일상이 되게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삶의 실체는 ‘그래서 얼마나 많은 걸 얻었거나 잃었는가’가 아니다. 삶은 순간순간 무엇을 어떻게 맞이하는가를 통해 구체화 된다.

여기 내가 그것을 깨닫게 된 경험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지렁이다. 밭을 일구던 어느 날 삽날에 찍혀 몸이 반토막 난 지렁이를 보았다. 지렁이는 반토막이 난 아픔으로 한동안 잘린 몸을 이리 튕기고 저리 비틀었다. 나도 마음이 찡그려지며 아팠다. 그런데 얼마 뒤 지렁이는 그 아픔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롭게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파하던 지렁이가 잘린 몸으로 다시 가던 길을 가는 게 아닌가!

눈에 부러진 소나무도 그랬다. 함박눈이 오랫동안 쏟아진 겨울 어느 날 밤, 퍼붓는 눈을 한가득 뒤집어쓰고 숲의 아름다운 풍경에 일조하던 소나무 한그루가 갑자기 따-악-! 소리를 냈다. 다음날 눈 덮인 숲길을 헤치고 그곳으로 가보았다. 당시 칠순 이상의 나이를 살아내고 있던 소나무의 상실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하나의 줄기로 곧고 높게 뻗어 올라가다가 Y자로 분기한 굵은 가지 중 왼쪽의 가지와 그 가지가 이뤄낸 무성한 다른 가지 전체가 찢기듯 부러져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떨어지면서 주변을 후려친 모양이다. 아래에서 자라던 몇몇 활엽수들도 무참히 꺾여 있었다. 부러진 소나무 잔해의 부피가 웬만한 아파트 거실을 채울 만했다. 빛을 향해 키웠던 가지의 절반쯤을 잃은 그 소나무는 Y자 중 오른쪽 가지 부분만을 달고 찬바람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거대한 상실과 상처를 안고. 쌓인 눈이 모두 녹고 따뜻한 봄이 오자 그 소나무는 아직 남아 있는 줄기와 가지로 새로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눈 때문에 입은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 쏟아지기기 전, 개미가 쌓은 둑. 사진 김용규 괴산여우숲생명학교장

또 다른 나무도 그랬다. 나무에 있어 줄기는 지탱의 중추요 뿌리에서 가지와 잎까지 양분과 성과물을 연결하는 통로여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그 중요한 줄기가 해마다 같은 자리에 동해(凍害)를 입는 느티나무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양지바른 언덕 위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해가 다 질 때까지 넉넉한 빛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나무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포실한 서식지로 인해 해마다 동해를 입어야만 하는 처지에 있었다. 알다시피 동해는 0℃ 이하의 기온에서 입는 추위 피해다. 일반적으로 줄기에 동해를 입는 경우 줄기의 껍질이 세로로 찢어진다. 겨울 끝자락에 낮 기온이 높아지면 나무가 햇살을 많이 받은 쪽으로는 물을 끌어 올리는 경우가 있다. 해가 지고 밤에 다시 영하로 떨어지면 끌어 올렸던 물이 얼면서 부피가 팽창하게 되고 그래서 수직으로 껍질이 터지거나 찢어지는 해를 입는 것이다. 그 나무는 매년 반복적으로 동해를 입은 듯했다. 줄기의 심재(心材, heartwood)까지 썩어 있었다. 하지만 나무는 그 깊은 상처를 입고도 매년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터진 부위에 치유 물질을 생성하고 공급한 흔적도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새 가지를 내고 계속 꽃을 피우고 있었다.

길가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풀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풀 깎는 무서운 기계에 철마다 몸이 댕강 잘리면서도 그들은 다시 올라오고 또다시 올라와 기어코 꽃 피고 만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마치 삶은 이런 것이라고 웅변이라도 하는 듯하다. 상처가 없기를 바라 상처 준 존재를 원망하느라 삶을 허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오직 닥쳐온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생명 가진 자의 몫이라고.

온전한 삶은 상처나 상실이 아예 없거나, 그것을 전혀 겪지 않는 삶이 아니다. 온전한 삶은 그것들을 삶의 한 과정으로 품고, 딛고, 다시 새로워지는 삶이다.

픽사베이

비교하지 않는 삶

대극의 질서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존재들은 과정 중심의 삶을 사는 지혜가 한결 더 커진다. 그들은 삶에 우열이 없음을 안다. 그들은 우열이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리듬이 실체임을 안다. 우열의 허울에 반응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리듬을 알아내고 그 리듬 위에서 춤추듯 살아간다. 냉이는 냉이로 봄에 빛나고, 달개비는 달개비로 여름에 빛나며, 산국은 산국으로 늦가을에 빛나는 존재일 뿐임을 안다. 찔레는 숲 가장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투구꽃은 숲 한복판을 지키며 빛나는 존재일 뿐임을 안다. 무릎 높이보다도 작은 풀은 그 낮은 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동산만큼 커다란 메타세쿼이아는 그 높은 자리를 밝히며 빛나는 존재라는 점을 안다. 그들은 제 소중한 삶을 우열로 비교하지 않는다. 온전한 삶을 살게 되면 우열로 양분된 세상의 저열한 수군거림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우열을 강조하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나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타자와 연대하는 일도 기꺼이 해나간다.

온전함을 향해

태어나서 죽기까지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다. 내가 무엇을 얻었든 아니면 잃었든, 지금 내 삶에 눈 부신 햇살이 비추든 아니면 폭풍우가 닥쳤든, 지금 내가 꽃길을 걷고 있든 가시밭길을 걷고 있든, 내가 건강하든 아프든, 내가 지금 젊었든 속절없이 늙어가든, 내가 부끄럽든 자랑스럽든……, 그 모든 날이 다 그의 소중한 삶을 이루는 것이다. 나무는 내게 날마다 속삭인다. ‘오늘도 온전함을 향해 살아보자고.’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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