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사유의 발자국'… 올해도 우리를 걷게 했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2. 2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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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등
분야별 총24권 선정
편견에는 어퍼컷 날리고
'도토리'로 경제흐름 분석
전세사기 사회문제 고발
집중력의 위기 진단하고
'나란 무엇인가' 질문통해
현대인 삶에 경종 울려
지난 20일 예스24 강서NC점에 설치된 '2023 책말정산' 매대 사진. 약 200권의 책 가운데 엄선한 총 24권이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이충우 기자

2016년 한국에 출간된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의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는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케데 브륌이란 서점에서 열린 낭시의 강연 모음집이다. 낭시에 따르면 책은 열림과 닫힘 사이에 놓인 막이다. 마주 보는 종이의 앞·뒷면에 인쇄된 상형문자는 바깥쪽과 안쪽이 분명하지 않다. 펼친 책의 정면은 넘기는 순간 뒷면이 되어버리는, 매순간 비밀을 간직한 이데아의 저장소다.

인쇄 매체인 책에도 이데아란 게 있을까. 낭시에 따르면 "책의 이데아는 이데아의 전달이며, 책은 끝날 줄 모르는 이데아의 잉태"다. 그 이데아에 가닿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도 무수한 작가, 출판인, 편집자들은 자신의 골방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이데아에 가까운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보낼 산고(産苦)를 선택한다. 책의 물질성과 정신성은 그 책을 펼치는 독자로 인해 완성된다. 그러고 보면 책은 침묵으로 이뤄진, 골방과 광장 사이의 소리 없는 대화다.

2023년 서점가에도 책과의 대화에 성공한 무수한 서적들이 있었다. 매일경제와 예스24는 2023년을 빛낸 '올해의 책'을 선정했다. 이른바 '2023 책말정산'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11월 말까지 매일경제신문 토요일자 출판면에서 다뤄진 귀한 서적들과 예스24 각 분야 MD의 추천서적을 각각 100권씩 모은 뒤 책의 파급력과 판매량, 타 매체에서의 관심도 등을 종합해 총 24권으로 압축했다.

변화하는 미래(경제와 인문), 사유하는 마음들(사회와 종교), 삶의 자리마다(문학과 철학), 지평선에 선 인간(과학), 이야기의 심연(에세이) 등으로 분류했다. 책이 이데아로 가는 사유의 발자국이라면 이 스물네 권은 우리가 한 걸음씩 디뎠던 2023년 생의 기록이다.

1 변화하는 미래

월터 아이작슨의 '일론 머스크'는 최초의 머스크 공식 전기로, 출간 전부터 세계적 화제였다. 책은 단지 화성으로 인류를 이주시키려는 한 괴짜 과학자의 심연에서 깊은 트라우마를 발굴해낸다. 상처를 받아 감정을 차단했던 머스크의 유년은 그의 괴팍한 성격으로 이어졌다. 상상과 현실에 대한 사유의 계기를 주는 책이다. 김희경의 '에이징 솔로'는 비혼 여성을 미생의 삶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에 어퍼컷을 날린다. 40~64세 비혼 여성 19인을 만나 '혼삶(혼자 사는 삶)'에 대해 실증했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나쁜 사마리아인들' 저자인 장하준 런던대 교수의 신작으로, 음식과 경제학을 한 권으로 버무린 책이다. 몇 알의 도토리, 새똥으로 변해버린 멸치에서 경제 흐름을 간파하는 구체성이 놀랍다. 정지섭의 '맘카페라는 세계'는 5년간 주변인 모르게 맘카페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맘카페에 대해 성찰했다. 최지수의 '전세지옥'은 1991년생 저자의 '820일간의 전세 사기' 경험담을 담은 고발성 르포르타주다.

2 사유하는 마음들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은 올해 출판계 슈퍼스타였다. 15만부 넘게 팔린 이 책은 "집중력은 한정된 자원"이라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65초 이상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미국의 10대는 남 일이 아니다. 집중력의 위기는 민주주의 위기와 동시에 발생했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는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 위안과 위로를 주는 존재, 억압적 관념에 인간을 묶어두고 자유와 해방을 가로막는 존재 사이의 신을 추적한 책이다. 인류가 상상한 절대자를 거대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빛의 시대, 중세'는 야만과 암흑의 시대로 여겨진 중세를 찬란한 빛의 시대로 전환시키는 책이다. 중세는 모자이크처럼 다채로운 시대였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1년 미국에서 1권이 출간된 책의 완역판으로, 1권이 해방 후 1~2년을 다뤘다면 2권은 1947년부터 한국전쟁 발발까지를 다룬다.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는 창조적 사유에는 절대적 고독이 필요하다는 편견을 뒤엎는 책이다.

3 삶의 자리마다

폴 오스터의 '4 3 2 1'은 미국 대표 작가 오스터의 걸작이란 극찬을 받은 소설이다. 냉전, 케네디 암살, 인종 갈등,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전쟁 등 미국의 역사적 사건 속의 주인공 아치 퍼거슨을 그려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가 43년 만에 마침표를 찍은 작품으로, 1980년 그가 쓴 중편소설의 개작이다.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라는 소녀 전언은 '나'의 몽환과 연결된다. '나'는 그림자를 버리고 도시의 출입구를 지날까. 비엣타인응우옌의 '동조자'는 이중간첩인 '나'의 고백록 소설이다. 베트남 대위이자 CIA 비밀요원, 그리고 베트콩 고정간첩이었던 한 인물을 통해 전쟁과 개인을 사유한다.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낭독회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한 소설을 묶은 책으로, 잔잔하지만 영영 멈추지 않는 파동의 이야기를 담았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는 시한부 판정으로 좌절한 레이랜드의 삶을 좇는다. 자존을 위한 언어의 힘에 관한 묵직한 사색이다.

4 지평선에 선 인간

브루스 베게밀의 '생물학적 풍요'는 동물 섹슈얼리티에 대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동물 동성애와 양성애, 트랜스젠더, 비번식적 성 활동을 포괄한 다양한 동물을 다뤘다. 동물 동성애 연구로 과학계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잘못된 해석을 폭로한 논쟁작이다. 데이비드 무어의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양쪽 가슴을 절제한 배우 안젤리나 졸리를 첫 사례로 든다. 그녀는 건강한 상태였지만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유전자에 기초한 인간 판단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일까. 벤 롤런스의 '지구의 마지막 숲을 걷다'는 인류세의 수목한계선 의미를 통찰하는 명저다. 4년간 6개국의 숲을 방문한 저자의 경험이 자본주의 시대의 자연을 돌아보게 만든다. 김상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에서 하늘은 우주의 법칙을, 바람은 시간과 공간을, 별은 물질과 에너지로 이야기된다. 지구 에너지의 근원부터 호모사피엔스의 '생각'에 대한 장엄한 사유가 총천연색으로 빛이 난다.

5 이야기의 심연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는 자신의 삶을 정보화하도록 조종당하는 현대인에게 울리는 한 권짜리 경보음이다. 소비자로 전락한 '스토리셀링'의 인간을 들여다본다. 최인아의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는 "세상도 어찌하지 못할 당신만의 세계를 가졌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으로 출발한다. 자기 이름 석 자로 살아갈 수 있는 '파워 브랜드'가 되기를 조언한다. 결국 책은 '나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수렴된다. 김혜자의 '생애 감사해'는 60년간 수많은 배역으로 관객과 시청자를 만난 대배우의 산문집이다. '아무리 인생의 속박에서 고통받는 역이라 해도 그 속에 바늘귀만 한 희망이 보이는가.' 대배우는 이 질문으로 평생 배역을 맡으며 살아냈다. 하재영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어머니의 생애사를 인터뷰하며 본인 이야기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는 세상을 떠난 음악가인 저자의 목소리가 담긴 유서 같은 책이다. 문장마다 침묵의 선율이 흐른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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