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잎이 나는 난초에서 찹쌀떡 생각이… [ESC]

한겨레 2023. 12. 2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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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크레인플라이 난초
에너지 품은 뿌리, 희고 동글납작
향수병에 새해 떡국도 그리워
환경 적응하며 또 새해 맞이
크레인플라이 난초의 가을 열매와 돋아나기 시작한 잎사귀들.

해가 바뀌며 1월로 넘어갈 때의 숲은 완전히 얼어버린 거 같다. 초겨울엔 그래도 가을의 여운이 남아 있지만, 한겨울 숲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나는 숲으로 간다. 겨울에는 겨울에만 들을 수 있는 식물의 이야기가 있다. 흔히 풀과 나무를 구별할 때, 겨울에 땅 위에서 자라던 부분이 모두 시들어 사라지는 식물을 풀이라고 한다. 나무는 추운 겨울이 와도 땅 위에 나무 기둥과 가지가 살아남는데, 풀은 뿌리가 살아있더라도 땅 위의 식물체는 죽는다. 그런데 메릴랜드의 숲 속엔 겨울에도 초록 잎을 펼치고 있는 풀이 있다. 솔잎처럼 가늘고 단단하거나 동백 잎처럼 두껍고 가죽질도 아닌, 연약하고 얇은 잎을 단 하나 피워 올리며. 우리나라의 비비추난초와 친척인 크레인플라이 난초(Cranefly Orchid)다.

마트에서 마주친 떡국용 떡

크레인플라이 난초는 이곳 미국 연구소 숲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지만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나서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없는 상사화처럼 이 난초도 꽃과 잎이 따로 난다. 게다가 광합성 하기 좋은 계절을 놔두고 겨울에 잎을 낸다. 꽃은 여름에 피는데 가늘고 섬세한 곤충을 닮았다. ‘크레인플라이’는 각다귀라는 곤충이다. 이름이 생소해도 우리나라에서 누구나 한 번쯤 만나본 곤충이다. 사람을 물지 않는데도 거대한 모기와 비슷한 생김새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 나는 여름에 이 난초의 꽃을 관찰했고 늦가을에 열매가 익었을 때 돌돌 말린 잎이 솟아나는 걸 지켜보았다. 지금은 낙엽 사이에서 완전히 잎을 펼친 한겨울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잎 아래 뿌리가 궁금해졌다. 분명 평범한 뿌리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여름에 꽃을 피워올리기 위해서 겨우내 잎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를 뿌리 쪽에 축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여름부터 관찰해 온 한 무리의 난초를 파보았다. 잎 하나마다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동그란 알줄기가 달려 있었다. 알줄기는 몇 개가 차례로 이어져 있기도 했다. 알줄기엔 전분이 많고 먹을 수 있으며 감자 맛이 난다고 한다. 도감으로만 봤던 알줄기를 실제로 처음 본 순간 나는 엉뚱하게도 ‘아, 반투명하고 동글납작한 찹쌀떡 같네’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를 마주하면 우리가 알고 있던 어떤 것을 떠올린다. 식물을 관찰하면서 나는 그런 적이 많았다. 그러나 크레인플라이 난초의 뿌리를 보고 찹쌀떡을 떠올린 반응엔 조금 다른 영향이 있었다. 나는 요즘 향수병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에 나와 있는 이들이 그렇듯 먹고 싶은 음식이 많은데 유독 떡이 그렇다. 한번은 자원봉사를 하는 농장에서 봄에 쑥이 올라오는 걸 보고 미국인들은 아주 끈질기고 골치 아픈 잡초가 올라왔다며 한탄했는데 나는 그 와중에도 쑥떡이 먹고 싶었다. 온갖 종류의 고소한 떡을 미국의 달콤한 디저트로 대신하긴 했지만 한 가지는 해소되지 않았다. 새해를 맞이하며 먹는 떡국이다. 그건 서러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물론 국제마트로 가면 구할 수는 있지만 내가 사는 소도시에선 고속도로를 타고 꽤 가야 한다.

최근에 한 미국 마트에서 냉동 김밥을 팔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그 마트가 동네에도 있어서 궁금증에 냉동 코너를 가봤다. 동네 지점이 작아서인지 김밥은 없었지만 뜻밖의 식재료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떡국용 떡이었다. 즉석떡볶이 세트도 아니고 떡국용 떡을 미국 마트에서 판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사실 나는 4년 전에 왔던 이곳 연구소에 다시 오기 전에 많이 망설였다.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넘어 나는 미국 문화와 잘 맞지 않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4년 만에 다시 온 이곳은 어딘가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생소함이 익숙함이 된 나 자신의 변화도 있겠지만 한류의 영향으로 환경도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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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 색깔 달라도 광합성 똑같이

알줄기. 잎 하나마다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동그란 알줄기가 달려 있다.

크레인플라이 난초의 잎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학술적인 이름은 티풀라리아 디스콜로르(Tipularia discolor)다. 디스콜로르(discolor)는 두 가지 색을 의미하는데 잎을 뒤집어보면 앞면의 초록색과 대조되는 짙은 보라색이다. 그 이유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자외선으로부터 잎을 보호하거나, 잎을 투과한 빛을 반사해 한 번 더 이용하는 것, 또는 빛을 잘 받는 어두운 색상으로 겨울에 얼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 등이 있다. 뒷면이 똑같이 보라색이더라도 앞면에 변화가 있기도 하다. 초록색 외에 잎 앞면까지 모두 보라색을 띠거나 진한 반점이 있는 개체도 있다.

최근 한 연구에서 이러한 각기 다른 잎에 광합성 능력의 차이가 없다고 보고되었다. 환경이 다른 곳에서 키워도 같은 개체는 같은 종류의 잎만 계속 만들기 때문에 환경 적응을 위한 게 아닌 그저 유전된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색이나 반점이 있는 잎은 초식동물이 발견하기 어렵거나 꺼리게 해 방어를 도울 수도 있다는 결론이었다.

우리도 이 난초처럼 공통적인 특성도 있겠지만 각자 다른 특성이 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내가 갑자기 이곳에 맞게 변할 수는 없다. 보라색 잎을 내는 난초가 환경이 바뀌어도 계속 보라색 잎을 내듯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체들은 환경에 더 잘 적응한다. 그 개체만 살아남기도 하고 새로운 종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어떤 특성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다 환경이 변하면 그것이 훌륭한 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숲도, 숲 속에 사는 생물들도, 이 연구소와 도시의 풍경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구에서 해를 거듭하며 변하지 않은 건 없다. 스스로 변하기도 힘들고, 발전하지도 않았다며 돌아오길 망설였지만 나도 4년 전의 내가 아니다. 외국인이라 좌절했던 순간들이 뿌듯함으로 바뀌었던 한 해가 가고 이곳에서 다시 희망을 안고 새해를 맞이한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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