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주관한 영어 시험, 부모들이 관리 통해 문제 빼냈다

2023. 12. 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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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미국과 수교 초기 풍경
1882년 4월 미국과의 수교 후 6월 임오군란의 반발로 국정이 일시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고종 정부는 11월에 신식 외교 통상 사무를 전담하는 통리아문을 설치하고 독일인 묄렌도르프, 미국인 데니 등을 초빙해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 등과도 차례로 국교를 수립했다. 1883년 4월 초대 미국 공사 푸트가 아서 대통령의 비준서를 들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답례로 6월에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고종의 비준서를 들고 미국으로 갔다.

시험 채점은 ‘통·약·차·벌’ 4등급 구분

육영공원 교실에 선 호머 헐버트. 칠판에 수학 문제가 보인다. [사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등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대륙을 횡단, 뉴욕에서 아서 대통령을 알현하고 비준서를 봉정했다. 일본어가 유창한 포크 중위의 안내를 받아 세계 박람회장, 시범농장, 방직공장, 제약회사, 해군 연병장,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등을 순방하고 돌아올 때 아서 대통령은 정사 민영익에게 유럽 여행을 권하면서 해군 군함 1척을 내주었다. 민영익은 일행 다수를 데리고 프랑스로 가고 부사 홍영식만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먼저 돌아왔다. 1883년 12월 21일 부사 홍영식은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올렸다. 30대 초반의 군주는 60가지의 질문을 퍼부었다. (‘홍영식복명문답기’, 김원모 『조미수교사』, 1999) 그 가운데 10가지만 들어본다. (번호는 질문 순서. 답변 생략)

11. 그 나라가 부강하다면 군사제도는 어떠하던가.

15. 대통령의 임기는 얼마나 되나.

16. 조정의 관직도 다 4년마다 교체되는가.

18. 미국의 관제는 유럽과 다른가.

19. 부통령은 매양 대통령으로 승진하는가.

20. 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몇이나 되며, 유럽에도 민주국가가 있는가.

26. 대통령 궁실 제도는 어떠하던가.

30. 기계가 정교하기로는 과연 천하제일이라 말할 수 있던가.

36. 농사 업무는 어떠한가.

42.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우리나라가 영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소식을 들었는가.

50. 워싱턴은 미국의 서울인데, 응당 주둔 육군의 수가 적지 않겠다.

52. (민병은) 낮에는 직무에 충실히 근무하고 밤이면 군사훈련을 익히고 있다니, 이것이 바로 부강하게 된 까닭이 아닌가. 남미와 북미의 나뉨은 어떠한가.

헐버트가 한글로 지은 최초 세계 인문지리 책 『ᄉᆞ민필지』에 실린 ‘지구 동편’. [사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미국과의 수교는 곧 신기술 문명 도입으로 이어졌다. 1883년 미국의 에디슨 램프회사(1880년 설립)와 경복궁 내 건청궁 일대 전기시설을 계약하여 1887년 백열등이 켜진다. 1885년 도쿄 니혼바시 근처 한 인쇄소에 백열등이 켜진 것과 불과 2년 차이다. 점등식 때는 조미조약 체결 때 이홍장의 속방 표기 강요를 물리쳐준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도 초청했다. 전기시설은 이후 창덕궁과 서울 시내 거리로 이어지고 1898년에는 전차가 달린다. 전차는 도쿄보다 3년 빨랐다. 전신 시설은 1885년부터 1889년까지 서로전신(西路電信, 인천-서울-의주) 남로(서울-전주-부산) 북로(서울-원산) 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신문명 수용을 위해서는 영어와 서양 문화를 아는 인재 육성이 필요했다. 1884년 정부는 푸트 공사를 통해 미국 정부에 교사 3인을 요청했다. 국무성 교육국장 존 이튼이 힘써 윌리엄 길모어, 달젤 벙커, 호머 헐버트 등 3인이 1886년 7월 초 이 땅을 밟았다. 같은 해 이들이 가르칠 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했다. 『육영공원등록』(서울대 규장각 소장)에 따르면 과거 급제 7품 이하 관료 중 젊고 재능이 있는 자 10명을 뽑아 좌원, 현직 당상관의 아들 사위 아우 조카 친척 가운데 능력이 있는 자 20명을 뽑아 우원에 각각 속하게 했다. 3년 과정으로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고, 시험은 매달·연말 단위로 치르고 3년째 졸업시험은 대고(大考)라고 했다. 영어 외에 세계사, 지리, 수학, 의학, 농학, 생물학, 지리, 천문, 기기 등을 배웠다. 교사들은 이 학교를 Royal College라고 불렀다.

교사 호머 헐버트는 처음부터 조선말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하고 조선말 배우기부터 시작해 2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1999년 ‘헐버트 기념사업회’를 세운 김동진은 헐버트에 관한 저서 4권을 출간하여 그의 활동과 업적 연구의 길을 열었다. 그 가운데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는 헐버트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와 미국 신문에 보낸 기고문 등에 근거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밝혔다. 이 책에 소개된 사실 두어 개만 보자.

황태자 순종, 외교관 가족에 영어 과외

동대문 발전소 시설. 보스트윅(Bostwic) 컬렉션. [사진 한전 전기박물관]
헐버트가 우리말을 배운 과정이 흥미롭다. 서울 도착 8일 만인 1886년 7월 13일 조선말 선생을 초빙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선생이었다. 헐버트는 그에게 몸동작으로 가르치게 했다. 달걀을 들어 올리면 선생은 ‘달걀’이라고 우리말로 말하고, 깨는 시늉을 하면 ‘깨졌다’라고 말하게 했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전설을 얘기하게 했다. 토속어를 배울 셈이었다. 듣다가 모르는 어휘가 나오면 반복하도록 해 1주에 수백 개를 암송하여 1시간에 5, 60개 단어를 익히고 있다고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전설을 익힌 뒤, 집을 지키는 기수(이름)에게 “담뱃대를 물고 호랑이 등에 탔다”라고 얘기한 것을 그가 알아듣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헐버트는 “조선의 전설은 아라비안나이트 저리 가게 합니다”라고 썼다.

조선 도착 두 달 만인 1886년 9월 23일에 열린 육영공원 입학식에서 서투르지만 조선말을 구사하고 5개월 만인 1886년 12월에 조선말을 섞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년째는 조선말로 상당한 수준의 강의가 가능했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조선말 선생은 지금도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두뇌가 명석하다고 했다. 내가 평생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그 사람은 내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라고 밝혔다. 1888년부터는 신식 의술을 배우는 제중원에서도 가르쳤다.

1889년 8월 19일 자 『뉴욕 트리뷴』지에 기고한 ‘임금이 주관한 시험’도 흥미롭다. 임금 (고종)은 학기가 끝날 때 자신이 직접 시험을 주관해 보겠다고 자청했다, 헐버트는 이를 임금 자신의 발상으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기억할만한 큰 사건이라고 했다. 시험 장면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임금 왼편에 세자가 앉고 7, 8명 조정 중신이 방 양쪽 편에 나누어 앉았다. 밖에서 기다리던 학생들은 호명하면 한 명씩 안으로 들어가 임금 앞에 무릎 꿇고 질문을 받았다. 교사들은 2000여 개의 단어를 섞어 문제와 답안을 만들어 임금에게 미리 건네 그중에서 골라 묻게 하였다. 한글로 영어 발음을 적고 그 밑에 한문으로 뜻을 달았다. 채점은 통(通 A)-약(略 B)-차(次=버금 C)-벌(罰 D) 4등급으로 구분했다.

이런 일도 소개했다. 한 학생이 질문을 받고 답하기를 “I do not know” 대신에 “I don’t know”라고 답하며 실력을 과시했다. 임금이 틀렸다고 지적하자 헐버트가 줄임말이라고 설명했다. 임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번은 학생들이 답을 생각보다 잘해 알아보니 왕이 주관하는 시험인지라 극성스러운 부모들이 궁궐 관리들을 통해 문제를 사전에 알아냈다는 것이다. 요즈음 얘기 같다.

헐버트의 임금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다. 임금은 친절하고 자상해 잘 웃는 편으로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적었다. 임금은 조선말도 잘하고 열정적인 헐버트를 특별히 좋아했다. 훗날 두 사람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우는 황제와 밀사라는 운명적 관계가 된다. 호머 헐버트는 1888년 말 무렵 학생 수 증원을 요청했다. 임금은 1개월 이내 40명을 늘리라고 하여 1889년 현재 112명이 되었다.

1898년 10월 황태자(순종)도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부대신이 영국인 외교관 부인 릴리 졸리와 체결한 ‘황태자 영어교사 고용 계약서’가 서울대 규장각에 남아 있다. 2년 단위로 두 번 체결한 계약서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미국을 모델로 한 것들이 태반이다. 1896년 9월부터 시작한 ‘서울 도시개조사업’이 대표적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갈 새 왕궁 경운궁(현 덕수궁)을 워싱턴의 대통령궁(백악관)을 본 따 도심에 지어 방사상 도로체계의 중심으로 삼았다. 동쪽 대안문 (현 대한문) 앞에 광장(현 서울광장)이 생기고 종로와 남대문로에 전차가 달리는 신문명 도시가 됐다. 제중원에서 영어를 배워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을 수행해 워싱턴 시정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채연이 한성부윤(서울시장)으로 이룬 업적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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