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LA 돌고 돌아 다시 한국으로 공명한 화가 곽훈

2023. 12. 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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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곽훈은 1941년 대구 근방의 현풍에서 태어났다. 부모들은 부산의 초량에서 살았다. 부친은 부산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지배인이었다. 해방이 되자 곽훈의 가족은 부산에서 본적지인 대구 대안동 66번지로 왔다. 대구 집은 스치상이라 불리던 일본인 남성이 가족을 일본에 다 보내고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그는 6개월 정도 곽훈의 가족과 함께 살다 일본으로 떠났다.

장욱진과 그림 맡기고 돈 빌려 술집 전전

곽훈의 2023년 회화 ‘HALAAYT’캔버스에 아크릴릭, 160x130㎝. [사진 곽훈]
해가 바뀌었다. 대구는 정치 열풍에 휩싸였다. 곽훈의 대안동 집에는 정치에 들뜬 친인척들이 모여들었다. 불안한 공기가 흘렀다. 부친은 일본으로 몸을 피했다. 부친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대구로 돌아오려 했다. 때마침 풍랑이 일어 배가 부산항에 접안을 할 수가 없었다. 일본으로 되돌아간 부친은 3년 후에나 돌아올 수가 있었다. 오랜 시간 곽훈은 편모슬하로 살았다.

곽훈은 일곱 살 때 수창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수창국민학교는 이인성(1912~1950), 이쾌대(1913~1965) 등을 배출한 미술 명문이다. 전쟁 중이라 대구에는 전시연합중학교가 운영되었다. 곽훈은 치열한 경쟁과 어려운 시험을 거쳐 특차로 경북사대부중에 입학했다. 곽훈에 대한 집안의 기대가 컸다. 1955년 4월에 이중섭은 대구역 앞 미국공보관(USIS)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평소에도 외국 명화의 복제품 전시를 자주 하던 곳이다. 중학교 3년생의 눈에 비친 이중섭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감각의 작가였다. 아이가 엎어져 게와 함께 놀고 있었다. 한쪽에는 담배곽 은박지 위에 그린 그림이 있었다. 두께가 얇은 싸구려 액자 속의 그림들이었지만 외국 명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특이한 공감이 일어났다. 전시장의 테이블에는 3인이 앉아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흰 양복의 사나이는 이중섭, 말쑥한 표정의 신사는 구상이었다. 대전에서 한 사람이 와서 그들 4인은 술을 마시러 나갔다. 우연히 만난 이중섭, 66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곽훈은 이중섭미술상을 받게 된다.

곽훈
1956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의 기대를 모은 소년이 경북고 미술반에 들어가 미술을 하겠다고 하자 반대가 심했다. 곽훈은 고집을 피웠다. 1959년 2월 대학시험을 치러 상경했다. 경북고 미술교사 김수영이 명함 뒤에 쓴 소개장을 들고 혜화동에 있는 장욱진의 집을 찾아갔다. 장욱진의 집에 가려면 실개천의 좁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장욱진의 집은 혜화동 일대에서 유일한 초가집이었다. 한 칸 크기의 행랑채가 화실이었다. 앉은뱅이 책상 위의 깡통 속에 붓 몇 자루가 전부였다. 이젤조차 없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60촉짜리 백열등이 6호쯤 크기의 캔버스를 비추고 있었다. 명색이 서울대 교수에다 고등학교 미술책에 나오는 유명작가인데도 생활은 궁핍해 보였다. 곽훈은 자신의 앞날도 만만치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시인 김지하 등이 미대 동기였다. 미대 2학년 때 4.19가 터졌다. 곽훈의 경북고 1년 선배로 서울대 문리대 3학년인 이수정이 오늘날까지 한국의 대표적 명문으로 남아 있는 ‘4·19에 대한 선언문’을 썼다. 이수정과 친했던 곽훈은 자극을 받았다. 곽훈 일행은 대학로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종로 5가로 나아갔다. 광화문을 거쳐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던 대학생들은 경무대를 향했다. 갑자기 총알이 날아왔다. 곽훈은 영추문의 좁은 공간 속으로 몸을 피했다.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이 의대생들의 들것에 실려 갔다. 질풍노도의 시절이었다.

이 무렵 서울대 미대의 학장은 장발(1901~2001)이었다. 장욱진을 비롯하여 권옥연, 손동진, 김흥수 등의 강사진이 물러가고 정창섭, 류경채 등 새로운 교수진이 포진했다. 장욱진은 곽훈과 가까웠다. 장욱진은 대학로의 중국식당 진아춘에 그림을 몇 점 맡겨놓고는 돈을 빌어 종로 4가, 5가의 싸구려 술집을 전전하였다. 곽훈, 미대생으로 부산의 연탄공장 사장 아들인 이민희 등이 동행하기도 했다.

유대인 딜러 중개로 그림 수백 점 팔아

곽훈의 ‘겁 소리, 마르코 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퍼포먼스 장면. [사진 곽훈]
곽훈은 새로 생긴 ROTC 1기생이 되었다. 미대 동기인 김차섭, 김인중, 오경환이 군사훈련을 함께 받았다. 김인중이 곽훈의 신상명세서를 대신 작성해주었다. 취미는 연애라고 썼다. 소망과는 달리 곽훈은 연애에 취미가 부족했고 김인중은 신부가 되었다.

1965년, 육군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곽훈은 대신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윽고 선배인 윤명로가 서울대로 가는 바람에 빈자리가 생긴 이화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한다. 좀 있다가 대학동기인 김차섭이 이화여중으로 부임한다. 곽훈은 미국에 가기 직전까지 6년간 이화여고에서 근무했다.

1970년, 곽훈은 신문회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경북고 동기로 서울공대를 나온 김광교가 소리를 빛으로 변환시키는 사운드 아트 작업을 도와주었다. 국내 최초로 공학과 예술의 학제간 작업이 이루어졌다.

곽훈은 1975년 미국 이민을 결행했다. 목적지는 오하이주의 클리블랜드였다. 그 도시에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있고 한국 사람이 없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어떤 중국인이 곽훈에게 바둑을 둘 줄 아느냐고 물었다. 바둑의 대국자를 찾는 사람은 ‘노블 칼슨’이란 미국인이었다. 그는 클리블랜드 아트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미술 전공자였다. 이차대전 후에 동경의 GHQ에서 복무하며 바둑을 배웠으나 미국으로 돌아오니 함께 바둑을 둘 사람이 없었다. 그는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0)의 드로잉을 수집할 정도의 전문적인 컬렉터이기도 했다. 곽훈이 그의 바둑 상대가 되어 주었다. 곽훈이 마음에 든 노블 칼슨은 신문의 구인광고를 보고서 여러 회사에다 곽훈의 이력서를 손수 작성하여 보내었다. 클리블랜드 전화국과 갤로(Gallo) 디스플레이, 이 두 군데서 연락이 왔다. 곽훈은 갤로 디스플레이를 택했다. 자동차 쇼, 전자제품 쇼 등에 부스를 만들어주는 광고, 전시 디스플레이 회사였다. 곽훈은 여기서 4년을 일했다. 2만불의 돈이 모였다.

왼쪽부터 조지 가이어, 마이클 맥밀란, 쉐프, 곽훈, 1987년 타이페이미술관에서. [사진 곽훈]
당시 미술인들의 꿈은 뉴욕 소호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함께 서울대 미대를 다닌 김차섭과 임충섭은 뉴욕에 가 있었다. 영하 30도 이하를 내려가는 겨울 클리블랜드에서의 빙판 운전이 힘들었다. 게다가 첫 아이가 태어났다. 곽훈은 소호의 거친 로프트에서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햇빛이 환하고 날씨가 따뜻한 서부 캘리포니아로 방향을 정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광고회사에서 갈고닦은 실력은 이미 프로급이었다. 처음으로 찻잔을 넣은 그림을 그렸다. 곽훈의 그림에 매료된 미대 실기 교수가 곽훈의 6백불짜리 작품을 12개월 할부로 구입했다.

이 무렵 L.A 미술계의 최고 실력자는 다다이스트 마르셀 얀코의 딸로 L.A 미술관 관장인 조신 얀코였다. 조신 얀코와 안면을 튼 곽훈은 포드 머스탱 해치백 승용차에 30호짜리 작품 30점을 싣고서 L.A 미술관으로 향했다. 빈 전시장에 작품을 디스플레이를 했다. 큰 트럭이라야 다 실릴 많은 작품들을 승용차 한 대로 해결한 신박한 능력에 조신 얀코는 감동했다. 그 덕분인지 쟁쟁한 화가 10인으로 구성된 ‘82 뉴 카머스’란 전시에 곽훈은 이름을 올렸다. L.A 타임즈 미술기자 윌리엄 윌슨이 특히 곽훈의 작품을 호평했다. 캐럴 쉐프라는 유대인 딜러가 곽훈을 찾아왔다. 그는 미국의 어느 호텔 체인에 곽훈의 그림을 수백점이나 팔았다. 곽훈은 팔로스 베르데스에 저택을 구입할 정도로 생활이 윤택해졌다. 컬렉터이자 딜러인 제임스 코코란은 뉴욕의 유명한 갤러리 찰스 코울스를 소개해 주어 1998년 거기서 전시회를 열었다. 미국에서 곽훈을 도와준 이들은 모두 다 지연, 학연과는 무연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곽훈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진정한 친구들이었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드디어 한국관이 개관했다. 곽훈은 옹기설치작업 ‘겁/소리-마르코 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을 출품했다. 맨앞에서 김영동이 대금을 연주하면 이 소리가 대나무로 연결된 비구니 20명의 두개골을 타고 지나가면서 공명하는 작업이었다. 한국미술사에 길이 남을 장엄한 명장면이었다. 공명하는 건 소리나 우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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