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경복궁 담벼락만 문제가 아냐…낙서에 패이고 훼손된 궁궐

이지현 기자 2023. 12. 22.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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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함녕전 기둥에 새겨진 낙서. 〈사진=이지현 기자〉
서울 덕수궁 함녕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 한 쪽에 새겨진 낙서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새긴듯합니다.

이 기둥 4면에는 연필로 쓴 낙서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6-2 OOO'라고 다녀간 흔적을 남기기도 했고 욕설 표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경복궁 교태전으로 향하는 문 옆쪽에는 오래 전 붙인 듯한 판박이 스티커가 남아있다. 〈사진=이지현 기자〉
경복궁 안 교태전으로 향하는 문 옆쪽에는 오래전 붙인 것으로 보이는 판박이 스티커가 남아 있었습니다.

경복궁 사정전 내 굴뚝에는 여러 언어로 새겨진 낙서가 벽돌 칸마다 있다. 〈사진=이지현 기자〉
궁궐 안 담벼락이나 굴뚝 벽돌에는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긁어낸 낙서들이 빼곡합니다.

최근 경복궁 담벼락 스프레이 낙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문화재 훼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눈에 띄는 낙서로 세간의 관심이 쏠리기 전부터 문화재들은 크고 작은 낙서에 패이고 멍들고 있었습니다.

서울 4대궁 안 곳곳에 낙서…언어도 다양



취재진은 22일 서울 덕수궁·경복궁·창경궁·창덕궁을 돌아봤습니다.

모든 궁궐 안에는 언제 새겼는지 모를 낙서들이 있었습니다.

덕수궁 내 담벼락에 새겨진 낙서. 〈사진=이지현 기자〉
덕수궁은 함녕전 기둥에 새겨진 낙서를 비롯해, 궁궐 내 담벼락에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낸 이름, 욕설 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한자 낙서도 있었죠.

정관헌 뒤쪽 벽돌에도 숫자, 이름 낙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덕수궁 관리소 관계자는 "요즘은 궁궐 안 곳곳에 관리자들이 배치되어 있어 낙서는 꿈도 못 꾼다"면서 "아마 예전에 한 낙서가 아닐까 싶다. 요즘은 낙서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낙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궁궐 안 CCTV가 비추지 않는 곳이나 관리자가 배치되지 않은 곳들이었죠.

많은 관람객이 찾는 경복궁에서는 더 쉽게 낙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궁 벽면에 펜이나 연필로 낙서를 새겨놓은 경우는 흔히 볼 수 있었고, 벽돌에 새긴 낙서도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사정전 뒤쪽 굴뚝 벽돌에는 칸마다 낙서가 빼곡했습니다. 한글·영어·한자 등 언어도 다양했습니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상대적으로 낙서 개수가 적긴 했지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연필 등으로 새긴 낙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관람객이 많이 찾는 경복궁에서는 낙서를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이지현 기자〉

'장난으로, 신념 때문에'…문화재에 상처 입힌 사람들



낙서로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저 장난으로, 누군가는 잘못된 신념에 따라 문화재에 상처를 입혀왔죠.

2011년, 세계적인 암각화 유물이자 국보인 울주 천전리 각석에 이름을 새긴 혐의로 한 고등학생이 붙잡혔습니다.

붙잡힌 학생은 처음엔 "친구를 놀리려 장난삼아 했다"고 진술했는데, 이후 진술을 번복하고 혐의를 부인하면서 결국 불기소 처분됐습니다.

경남 합천 해인사가 대적광전 등 17개 주요 전각 벽의 낙서를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연합뉴스〉
2014년에는 경남 합천 해인사 전각 벽 22곳에 검은 사인펜으로 쓴 한자가 발견됐습니다.

이 낙서는 40대 여성이 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악령을 쫓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019년 부산 금정산성 망루와 비석 곳곳에서는 검은 매직펜으로 이름 등을 쓴 낙서가 발견됐는데요.

낙서를 한 건 70대 등산객. 그는 산을 오르다가 쓰러지면 가족이 쉽게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 문화재에 낙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외 관광지에도 새겨진 한글…'어글리 코리안' 논란



낙서 때문에 국제적인 망신을 산 일도 있습니다.

해외 문화유산이나 자연에 한글로 낙서를 해 논란이 된 건데요.

지난 2016년 태국 시밀란 국립공원 한 산호초에 '박영숙'이라고 적힌 한글 낙서가 발견됐습니다.

태국에서 발견된 한글 낙서. 〈사진=트위터/중앙 DB〉
이듬해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일본 사찰 도다이지 난간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낸 한글 낙서가 발견됐습니다.

만리장성에서 발견된 한글 낙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죠.

스위스 루체른 무제크 성벽 타워 난간에는 5명의 이름과 '2019.8.16'이라는 글자가 매직펜으로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진을 찍은 한국인 네티즌은 "부끄러운 줄 알라"며 지적했고, 국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거셌죠.

대표적인 '어글리 코리안(다른 나라에서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일부 비매너의 한국 관광객)' 사례였습니다.

"작은 낙서까지 단속 어려워"…"어렸을 때부터 교육해야"


지난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방향 경복궁 서쪽 담벼락에 붉은색과 푸른색 스프레이로 낙서가 적혀있다. 〈사진=연합뉴스〉

우리나라 문화재보호법 제82조의 3은 '누구든지 지정문화재에 글씨 또는 그림 등을 쓰거나 그리거나 새기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낙서를 한 사람에게 원상복구를 명령하거나, 복구 비용을 청구할 수도 있죠.

만약 낙서 등으로 인해 문화재가 손상되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궁궐 내 낙서와 관련해 "이번 스프레이 낙서처럼 큰 낙서들은 바로 조치를 취하지만 현실적으로 궁궐 안 작은 낙서들까지는 일일이 단속하고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력이 되는 선에서 점검하고 복원을 하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문화재청은 CCTV를 추가 설치해 이번 낙서 테러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는 걸 막겠다는 방침입니다.

하지만 낙서를 애초에 하지 않도록 인식 개선도 필요합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우리나라 문화재들 중에서는 특히 궁궐 내 낙서가 심각한 편"이라면서 "해외에서도 낙서 때문에 논란이 된 한국인 사례도 많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내외에서 낙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어렸을 때부터 문화재를 소중히 할 줄 알게끔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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