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나보다 남을 위하는 '유일한 마음'의 사업가 '유일한'…'냅코 프로젝트' 조명

김효정 2023. 12.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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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이 세상의 유일한 그가 남긴 가르침은?

2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Only one - 요원 A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한 남자의 생을 조명했다.

1945년 8월 미국의 산타 카탈리나섬 곳곳에서 짐승들의 사체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에 주민들은 얼마 전 입도한 외지인들의 짓이라 입을 모았다.

외지인들은 날마다 사격 연습을 하고 잠수정을 타고 나가는 등 훈련을 했던 것이다. 이에 주민들은 그들이 미군이라 추측했지만 군인이라기엔 부대 마크도 계급장도 없었다.

특히 그들은 서양인이 아닌 전원 검은 머리의 동양인, 조선인이었다. 대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의 정체는 무려 50년 후 탑 시크릿 문서가 공개되며 알려졌다. 알파벳 암호명으로 불린 이들은 엘리트 출신의 요원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유일링의 할아버지 유일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유명 사업체를 가진 유명 사업가였다.

유일한과 여러 사람들이 소속된 단체는 바로 냅코 프로젝트였다.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그때 미국은 일본에 반격할 계획을 세웠고, 이에 냅코 프로젝트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리고 섬에 모여있던 이들은 조선인 공작원이자 미국 첩보국 최초의 한인요원이었다. 미국은 사망률이 70%로 예측될 정도로 위험한 프로젝트에 조선인들을 동원하기로 했고, 이에 포로수용소와 재미 한인들을 대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할 인원을 물색했다.

그리고 유일한 회장은 바로 재미 한인 중 가장 먼저 참여 의사를 밝힌 인물이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고문 역할을 담당하기로 했고, 자신의 사업체 직원과 시설을 비밀리에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했다.

그리고 그 후 조국만을 위해 많은 이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렇게 총 총 19명의 요원들이 카탈리나섬에 도착해 단 3개월 안에 인간 병기가 되기 위한 훈련을 진행했던 것이다.

20대는 단 3명뿐인 요원들. 이들은 매일 밤낮으로 첩보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훈련받았다. 그리고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에이전트 A, 유일한이었다.

14살 군사학교 입학해 한일 민병대까지 조직했던 유일한은 50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에 그는 완벽한 리더 역할을 해냈다.

냅코 프로젝트의 요원 A는 바로 국내 최대 제약사 중 하나인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유일한 회장. 청일 전쟁 당시 사업가 아버지의 아들로 자란 그는 나라에 보탬이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9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25살이 되던 해 에디슨이 설립한 글로벌 기업에 최초 동양인 회계사로 입사했다.

그런 그는 어느 날 사업을 하겠다며 아시아 지역 총책임 자리도 거절하고 퇴사를 했고,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몇 가지 사업을 거쳐 제약 회사 유한양행까지 설립했다.

일본 제약사를 누르고 국내 업계 1위에 오른 그는 해외 수출 계약을 위해 미국행에 올랐고 이때 냅코 프로젝트 합류 제안을 받았던 것.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조국을 위해 프로젝트에 참여를 결정했다. 오직 조국을 위한 마음 아하로.

1945년 8월 작년 개시가 임박하고 출정 명령만 기다린 요원들, 그런데 그들에게 전해진 소식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은 종결되었고 일본의 패망은 곧 프로젝트의 폐기였다. 주권을 찾기 위해서는 태평양 전쟁에 조선인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요원들, 하지만 이들은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주권을 잃어버린 광복을 맞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냅코 프로젝트는 역사에 묻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일한 회장도 귀국을 준비했다. 하지만 초대 상공부 장관 제의를 거절한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했고, 이에 7년이 지나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 전쟁과 휴전으로 이북 쪽 회사 재산을 전부 잃어 기업 자산의 80%를 손해 본 유일한 회장. 또 다른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는 자동차 수입 회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3.15 부정 선거 당시 정치 자금을 요구받았고 이를 거절하자 정부에서는 유일한과 그의 사업체에 대한 압박을 가했다. 결국 그렇게 자동차 사업은 폐업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도 정치 자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일한 회장은 이번에도 제안을 거절했고, 이에 정부는 유일한 회장의 사업체에 대한 세무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도 나오는 것이 없고 결국 업계 최초로 산업훈장까지 받게 됐다.

회사의 주인은 개인이 아니라 그 회사를 키워준 사회라고 생각했던 유일한 회장은 정치 자금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발의 노인이 된 유일한 회장에게 주변에서는 아들에게 경영권 세습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유일한 회장은 아들을 테스트했고, 아들은 국내 최초 화장지 사업을 시작하며 이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그럼에도 유일한 회장은 아들이 아닌 당시 전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국내 최초로 세습 경영이 아닌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특히 그는 최고 경영자 임기도 제한했다. 한 번에 3년씩 최대 한 번만 연임 가능하도록 하여 본인이 사망한 후에도 회사가 누군가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했다.

은퇴 후에도 한국에 남은 유일한은 사비를 들여 세운 학교인 유한 공업 고등학교의 학생들을 보며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갔다. 전액 장학금, 전원 장학생인 해당 학교의 운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던 유일한 회장. 학생들에게도 그의 존재는 특별했다.

지난 1971년 3월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유일한은 "내 묘소와 주변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며주길 바란다. 단 유한동산에는 절대 울타리를 치지 말고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 다오. 어린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느끼고 싶다"라는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그리고 당시 최소 50억 원, 현재 가치로는 1070억 원의 자산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던 유일한 회장. 온 국민의 관심은 그의 유언장에 집중됐다.

유일한 회장은 손녀에게 대학 졸업까지 필요한 학자금 1만 달러를 제외하고 본인 소유 주식 14만 941주를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했다. 그리고 딸에게는 아내의 노후를 잘 돌보아 달라는 부탁과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라는 말을 남겼다.

손녀의 대학 자금을 제외하고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일한 회장. 하지만 가족 누구 중 놀란 사람은 없었다. 이에 그의 손녀는 "그전까지 매번 들어왔던 말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넌 아무것도 받지 않을 거야. 그게 우리 가족 스타일이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 자금을 받고 놀랐다"라며 "아무것도 안 받는 게 가족의 스타일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내려오는 가르침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밝혀 감탄을 자아냈다.

공익재단은 기업의 최대 주주,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며 소유권과 경영권을 완벽하게 분리한 유일한 회장. 그리고 그의 뜻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큰 버드나무 같은 사람이었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처럼 누군가를 돕고 위하는 선배가 되었고, 또 누군가는 청렴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손녀 또한 할아버지 유일한의 정신을 이어갈 연구 재단을 설립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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