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우주서도 끄떡없게···반도체 '방사선 저항' 검증

경주=김윤수 기자 2023. 12. 2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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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KOMAC 양성자가속기 시설 둘러보니
국내 유일 내방사선성 시험 시설
수출·위성탑재 전 성능평가 필수
광속절반 강력 빔으로 고장 찾아
삼성·하이닉스 등 반도체社 몰려
"24시간 운영체제로 전환 추진중"
[서울경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시작으로 점점 더 많은 반도체 기업들이 우리의 단골 고객이 되고 있습니다. 나인투식스(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운영을 24시간으로 바꿀까 할 정도예요. 반도체를 납품하기 전 내방사선성, 즉 방사선을 견디는 성능을 평가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 우리가 유일하며 전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습니다.”

경북 경주시 건천읍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KOMAC) 가속기동에서 연구자들이 양성자가속기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제공=한국원자력연구원

이달 18일 경북 경주시 건천읍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KOMAC)에서 만난 이재상 단장은 끝없이 길게 늘어선 가속기 시설을 소개하며 이같이 강조했다. KOMAC이 운영하는 양성자가속기는 국내 최대 규모이자 유일하게 산업용 반도체의 내방사선성을 시험할 수 있는 시설이다. 가속기를 돌리며 발생하는 열을 식히느라 건물 주변에서는 뿌연 증기가 하루종일 뿜어져 나왔다.

120m 길이의 건물 가속기동에는 75m 길이의 양성자가속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반경 1m짜리 원통형 고철을 이어붙인 듯한 겉모습과 ‘우우웅’ 내뿜는 기계음이 마치 증기기관차 같은 인상을 줬다. 기차칸에 해당하는 11개의 가속기 모듈(DTL)마다 얽히고 섥힌 전선들로 전원장치 및 전자기장 발생기와 연결돼 있었다. 가속기의 축을 따라 1펨토미터, 즉 1000조 분의 1m 크기의 양성자가 초속 13만 ㎞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한다. 광속의 절반에 가까운 속도인데,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면 아무리 작은 입자라도 상당한 에너지를 가진다.

양성자과학연구단(KOMAC) 가속기동의 표적실. 가속된 양성자 빔이 이곳으로 이동해 반도체를 쬔다. 진공의 가속기와 상압의 표적실 사이의 압력차를 버티는 원형 금속막(왼쪽)은 두께가 0.5㎜에 불과하다. 김윤수 기자

100MeV(메가전자볼트)의 고에너지 양성자는 원자핵을 쪼개거나 물질 정밀분석이 가능해 연구와 산업 목적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이곳은 국내에서 고에너지 양성자를 가장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시설이다. 특히 반도체와 항공우주 분야 연구자와 기업이 수요의 60%를 차지한다. 이 단장은 “반도체는 대기 방사선의 영향을 받아 회로 구조가 변하고 이로 인해 자동차, 데이터센터 등에 탑재 시 소프트웨어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며 “반도체를 항공기에 실어 수출하거나 인공위성에도 직접 탑재하기 전 내방사선성 시험이 필수 시험절차로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주방사선이 스타링크 등 인공위성의 고장을 일으킨 사례가 있으며 자동차 급발진의 원인으로도 거론돼왔다.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는 반도체 제조사가 인증된 내방사선성 시험을 거쳐 자동차나 데이터센터 업체 같은 고객사에 납품할 것을 권고하며, 이를 위해 마련한 ‘반도체 방사선 영향평가 표준’에 2021년 국내 유일하게 이곳을 등재시켰다.

양성자과학연구단(KOMAC) 가속기동의 표적실에서 반도체가 방사선 영향평가를 받고 있는 모습. 방사선 차폐막 가운데 구멍에 반도체가 있고, 옆에 방사선량 등을 측정하는 센서가 달려있다. 사진 제공=한국원자력연구원

이곳에서 실제 내방사선성 시험이 실제로 이뤄지는 곳은 표적실이다. 10평(33㎡) 정도 작은 방의 한쪽 벽에 반경 30㎝ 정도의 원형 금속막이 보였다. 가속기라는 ‘줄기’에서 뻗어나온 ‘가지’의 끄트머리였다. 양성자는 줄기에서 가지를 따라 표적실로 온다. 금속막은 알루미늄과 베릴륨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져 0.5㎜ 두께를 가지고도 진공의 가속기와 1기압의 표적실 사이 압력차를 견뎌냈다. 양성자는 이 막을 뚫고 표적실에 들어와, 이번엔 네모나게 생긴 또다른 금속판을 지난다. 단면이 옛날 1원짜리 동전보다 좁은 양성자 빔(방사선)을 가로·세로 20㎝로 넓혀 반도체가 고루 빔을 쬐도록 하는 장치다. 빛의 분산을 극대화한 특수 볼록렌즈인 셈이다. 이로부터 1m도 안 되는 거리에 반도체 시료를 놓으면 그것이 방사선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달 18일 방문한 경북 경주시 건천읍 양성자과학연구단(KOMAC)의 양성자가속기가 있는 가속기동 건물. 옆으로 가속기 냉각 후 발생하는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김윤수 기자

점점 더 많은 반도체 기업이 이곳을 찾고 있다. 여러 기업, 연구기관, 대학이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양성자가속기 가동일은 연간 120일인데 이 중 반도체 기업의 사용 비중은 2018년 25%(30일)에서 41%(49일)로 크게 늘었다. 대기업 중에는 120일을 모두 쓰고 싶다는 요청도 있었다고 한다. 이 단장은 “수요에 대응해 24시간 운영체제로 바꿔 가동시간을 3배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장기적으로는 주요국들처럼 1000MeV 에너지 규모로 인프라를 고도화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표적실에 있던 ‘우주환경 모사장치’는 올해 8월 도입됐다. 우주의 방사선과 진공은 물론 섭씨 영하 55도부터 영상 125도까지 극적으로 변하는 온도 환경까지 구현한 커다란 캡슐이다. 직경과 길이 각각 1m 정도의 비교적 아담한 캡슐 안에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용 반도체를 넣어 시험할 수 있다.

경주=김윤수 기자 soo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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