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 영정 사진으로 화제… “전쟁서 아들 잃은 어머니들 찍고 싶다”

김윤덕 기자 2023. 12.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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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40년 사진 인생 회고전 여는 한국현대사진 거장 구본창
'구본창의 항해'전 개막을 앞둔 2023년 12월12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작가를 만났다. 아버지의 임종을 기록한 '숨' 연작 앞에 선 구본창은 "사멸될 수밖에 없는 모든 것,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관람료 무료. / 오종찬 기자

어쩌면 ‘항해’의 시작은 그해 여름, 제주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모국의 공기는 폐쇄적이었고, 강렬한 햇빛은 숨통을 조여왔다. 돈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저물녘. 바다를 헤엄치다 뭍으로 올라오던 소년이 그를 구원했다. 양팔로 대지를 딛고 솟구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구본창은 “40년 전 꼬마의 모습에서 맨몸으로 미지의 땅에 들어서는 날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내년 3월까지 한국 현대 사진의 거장 ‘구본창의 항해’전을 연다.

◇지지 않기 위해 걸었다

-왜 ‘항해’인가.

“1972년에 찍은 ‘자화상’이 있다. 남해에 놀러 갔다가 먼바다를 응시하는 내 뒷모습을 찍은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경이 늘 있었다. 인생은 항해와 같다.”

-일흔에 여는 대규모 사진전이다. 시립미술관 1·2층을 다 채운 한국 작가의 전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꿈같은 일이다. 1년 전 여기서 권진규 선생의 전시를 보면서 나도 그간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펼쳐봤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 실현될 줄은 몰랐다.”

-85년 독일에서 귀국한 구본창은 한국 사진계의 이단아였다. 스트레이트 사진이 주류였던 사진계에 연출 사진(making photo)을 시도해 사진과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1차원적 기록 사진, 틀에 박힌 풍경 사진 말고 회화·조각·판화 등 다양한 매체의 속성을 반영한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흔해졌지만 필름을 태운다든지, 장노출로 초점을 흔들기도 했다. 젊은 작가들과 의기투합해 워커힐미술관에서 ‘사진, 새 시좌(視座)’라는 그룹전을 열었다. 센세이셔널했다”

-한국 현대 사진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당시엔 ‘이게 무슨 사진이냐’는 비난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연출 사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젊은 작가들을 망친다고 했다. 홍순태 교수님은 ‘이게 무슨 사진이냐’며 나무라셨다(웃음). ‘사진은 사진이다’ 같은 전시가 기획됐을 정도다.”

-귀국 후 부적응으로 죽음도 생각했다던데.

“한국에서 사진을 배운 게 아니라 아는 사람도, 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강사로 뛰었지만 차비 정도 버는 수준이었다. 형과 누나한테 만원, 2만원 꾸러 다니는 처지가 한심하더라. 일정한 수입이 없으니 해외 전시에 초대됐는데도 여권이 안 나왔다. 독재 시대였고 도시는 무질서했다. 모든 게 제로였다.”

-난파되지 않고 어떻게 항해를 지속했나.

“지지 않기 위해 카메라 2대를 메고 걷고 또 걸었다. 익명자로 세상을 떠돌며 쉬지 않고 찍었다. 제주 바다의 그 소년도 그렇게 만났다.”

한국 현대사진의 거장 '구본창의 항해'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24년 3월 10일까지 열린다. 사진은 제주 바다에서 만난 소년. 저물녘 헤엄을 치다 뭍으로 올라오는 아이를 찍었다.

◇쓸모없던 사내아이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대우실업에 다니다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독일로 갔더라.

“매일 아침 8시 출근해 밤 8시에 퇴근했다. 주말도 거의 없다시피 일했다. 제일 싫은 건 술과 노래 왁자한 회식이었다. 그렇게 계속 살 순 없었다. 사표를 쓰고 독일 주재원을 찾는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개성 사람으로 섬유업을 하던 부친은 펄쩍 뛰셨다고.

“네 유학비 댈 돈은 없다고 하시더라(웃음). 형(구본영 전 과기처 장관)이 당시 미국 유학 중이기도 했다. 그 좋은 회사 들어가 한창 돈 벌어야 할 나이에 무슨 예술이냐고 혀를 차셨다.”

-원래 미술을 좋아했나.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반이었는데 중학생 때 천재적 재능을 가진 친구를 보고 화가의 꿈을 접었다. 대신 명동 뒷골목에서 구한 일본 잡지, 아버지가 출장길에 사오신 뉴요커와 명화집에 심취했다. 클림트의 ‘키스’를 그대로 따라 그린 습작이 이번 전시에도 나왔다.”

-함부르크 조형미술대에서 유학했다.

“일하면서 공부했지만 정말 행복했다. 한국에선 받지 못한 칭찬을 매일 들었다.”

-칭찬이라니?

“한국에서 난 늘 핀잔거리였다. 사내 자식이 밖에 나가서 뛰놀지 왜 잡동사니를 모으고 그림을 그리냐고. 서울중, 서울고, 서울대를 가뿐하게 들어간 형과 달리 나는 쓸모없는 아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독일에선 모든 교수들이 내 과제를 칭찬했다. 날 있는 그대로 인정해줬다. 날개를 달았다(웃음).”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이 독일과 맞았나 보다.

“학창 시절 전혜린을 읽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뮌헨의 풍경, 낭만, 검은 옷을 동경했다. 말수 적은 독일 사람들이 좋았고, 사생활을 캐묻지 않아서, 왜 장가 안 가냐고 묻지 않아서 좋았다(웃음). 분데스리가에서 누가 골을 넣었는지 관심이 없는 미술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난 행복했다.”

-왜 사진이었나?

“순간 포착의 즐거움, 뭣보다 결과가 빨리 나와서 좋았다. 돈은 없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물건을 카메라에 담는 순간 내 것이 된다는 희열감도 컸다.”

-토스카나 중세 마을에서 찍은 두 할머니 등 초기 유럽 연작은 시적이고 영화적이다.

“디플롬(석사 학위)을 받을 무렵 교수들은 내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았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안드레 겔프케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고 찾아갔다. 뒤셀도르프에서 만난 겔프케는 내 사진을 보고 ‘유럽인이 찍은 건지 한국인이 찍은 건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너의 눈으로 너의 이야기를 하라고 충고했다. 조형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진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13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의 항해' 전시. 12개의 백자를 달이 뜨고 지는 형상으로 전시한 연작이 보인다./연합뉴스

◇백자, 숨 그리고 DMZ

-구본창의 ‘백자’ 연작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80년대 어디선가 커다란 달항아리 옆에 서양 할머니가 앉아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항아리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이 할머니와 묘하게 어울려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15년 뒤 교토를 여행하다 일본 잡지에 특집으로 소개된 조선 백자를 보고 그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만 모르는 우리 백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백자를 피사체로 삼은 첫 작가였다던데.

“그때만 해도 조선 자기 하면 고려청자를 의미했다. 속을 텅 비워 무욕의 아름다움을 성취한 백자의 손맛을 담아내고 싶었다. 조선 백자를 소장한 전 세계 박물관에 연락해 일일이 허락받고 촬영했다. 이번 전시엔 12개 항아리가 달처럼 뜨고 지는 형상으로 구성했다.”

-그림자 없는 백자 사진은 회화처럼 보인다. 얼룩, 흠집도 그대로 드러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아스라하게 찍고 싶었다. 수수하고 단아한 기품을 드러내기 위해 조명을 변주했다. 시간의 흔적은 내 사진의 주요 테마다. 손때 묻은, 하잘것없는 얘기들이 쌓여 역사를 만든다고 믿는다.”

-아버지의 임종 사진으로 유명한 ‘숨’ 연작도 사랑받는다.

“말라가는 식물처럼, 치매를 앓는 아버지의 육체에서 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멸될 수밖에 없는 모든 것, 그들의 마지막 경계, 혹은 영혼의 흔적을 기록하고 싶었다. 형은 화를 냈다(웃음).”

-개인적으로는 DMZ 연작이 좋았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국방부가 기획한 그룹전을 위해 찍었다. 누구는 군인을 찍고, 누구는 DMZ를 찍었는데 나는 총탄에 뚫린 철모, 주인의 생명이 빠져나간 허리띠, 일그러진 군화를 찍었다.”

-전사한 아들이 살아 돌아올 거라 믿고 평생을 산 101세 어머니 사진이 뭉클했다.

“양손에 긴 염주를 받쳐 들고 꼿꼿이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이다. 한 프랑스 평론가는 ‘피에타상을 연상시킨다’고 하더라. 이번 전시엔 나오지 않았다.”

-구본창은 오래된 사물을 피사체로 즐겨 찍는다.

“개성 상인 집안이라 그런지, 우리 집은 어떤 물건이 완전히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아끼며 사용했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배어, 원기소 통이며 작은 상자에 잔뜩 모아놨다가 이사할 때도 끌고 다녔다. 옛날 잡지, LP판, 어머니 저고리까지. 값어치 나가는 건 없지만 내겐 보물 창고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햇볕이 쨍한 날보다 구름이 낀 날 촬영하는 걸 더 좋아한다고 했더라.

“구름이 낀 날 찍으면 사진이 훨씬 부드러워진다. 햇볕이 강하면 모든 게 날카로워진다. 독일의 흐린 날씨에 익숙해서였는지도 모른다(웃음).”

<YONHAP PHOTO-3570> '구본창의 항해' 전시 살펴보는 참석자들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13일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의 항해' 전시 기자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2023.12.13 ryousanta@yna.co.kr/2023-12-13 12:58:10/ <저작권자 ⓒ 1980-202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배우 강수연과 함께한 젊은 날의 구본창. 강수연의 영정사진이 구본창이 촬영한 B컷이라 화제가 됐다. /구본창 제공

◇영정 사진이 된 강수연의 B컷

-구본창을 상업 사진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귀국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내게 대학 동기인 배창호 감독이 일거리를 줬다. 현대상사를 관두고 영화에 뛰어든 친구라 동병상련이었다(웃음). ‘기쁜 우리 젊은 날’ 포스터를 찍을 때 스튜디오도 없이 연세대 교정, 홍대앞 카페에서 황신혜를 촬영했는데, 독일에서 소품으로 사용했던 내 마후라를 목에 두르게 해 찍었더니 태흥영화사 대표가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 후 태흥의 일을 도맡아 했다.”

-패션 화보, 배우들 촬영도 많이 했더라.

“주어진 숙제는 뭐든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웃음). 내 작업에도 자극이 됐다. ‘서편제’ ‘취화선’ 등 임권택 감독 작품을 많이 찍었고, 이창동의 ‘시’에서 윤정희 선생을 찍은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강수연의 영정 사진이 구본창이 찍은 ‘B컷’이어서 화제가 됐다.

“세상을 떠난 날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가 좋아했던 사진인데 영정 사진으로 쓰게 해달라고. 잡지 ‘바자’가 의뢰해 ‘타임리스 뷰티’라는 테마로 촬영했던 건데, 빨간 옷이라 영정으로 쓸 수 있을까 주저하다 잡지에 실리지 않은 컷을 찾아 전달했다. 강수연은 시원시원하고 강단 있어 보이지만 외로움도 깊은 배우였다.”

-구본창의 항해는 계속 이어질까.

“전쟁으로 아들 잃은 어머니들을 찍고 싶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쪽 모두의 어머니들. 매일 수십, 수백 명이 죽고 있는데 난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어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든다.”

-제2, 제3의 구본창이 되고 싶은 후배들에게.

“꿈은 꾸는 자만이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처음부터 원대한 꿈을 이루려 말고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일궈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든 구름에는 왕관이 있다(Every cloud has a crown)’는 말처럼 구름 뒤에 올 햇빛을 기다려야 한다.”

구본창 작가가 촬영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포스터

☞구본창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대우실업에 입사해 6개월 다니다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 대학으로 유학, 사진 디자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열두 번의 한숨’ ‘긴 오후의 미행’을 시작으로 ‘백자’ ‘숨’ ‘태초에’ 연작 등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휴스턴 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리움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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