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변기 뚫어주는 ‘가정의 수호자’…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hong.sungyun@mk.co.kr) 2023. 12. 1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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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6] 막힌 변기 뚫는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생성형 AI 빙 크리에이트를 이용해 만든 ‘플런저를 들고 있는 중세 기사’ 이미지. [사진 출처=빙 크리에이트]
명사. 1. 플런저(Plunger),러버컵(ラバーカップ) 2. 뚫어뻥, 고무압축기, 【예문】플런저를 가지고 온 룸메이트의 위엄은 마치 엑스칼리버를 든 아서왕의 그것이었다. 그가 변기를 구하러 온 것이다.

플런저다. 하지만 이는 영미권에서의 호칭일 뿐 한국에서는 표준어가 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다. 정말로 ‘그거’인 셈이다. 정확한 명칭은 없지만 일상적으로는 ‘뚫어뻥’이라고 부른다. 국립국어원은 2021년 홈페이지를 통해 “(뚫어뻥은) 표준어는 아니나 현실적으로 쓸 수 있는 표현”이라고 언급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뚫어뻥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어떻게든 이름 없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온라인 판매자들의 사투가 눈물겹다. 검색어 유입을 위해 창의력이 총동원된 현장. [사진 출처=네이버쇼핑 캡처]
공기의 압력을 이용해 막힌 배수구를 뚫는 도구라는 점에서 매우 적확한 표현이지만 원래 뚫어뻥은 막힌 변기 혹은 싱크대의 배수관을 뚫는 액체용 배수구 세정제의 명칭이었다. 세정제를 막힌 배수관에 부어놓고 기다리면, 세정제 속 수산화나트륨이 배관 속 이물질을 분해해 뚫어주는 원리다.

1980년대 백광산업이 ‘백광 트래펑’을 출시한 이후 많은 유사 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뚫어뻥이었다. 하수구 트랩(S자 형태로 구부러져 있어 역류하는 냄새나 벌레 등을 막아주는 배관)에 펑크(puncture, 구멍)를 낸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트래펑의 명칭을 빌리면서도 ‘뻥’하고 ‘뚫어준다’는 직관적인 한글 의미까지 부여한 초월 번역 덕분에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게 됐다. 이후 마땅한 명칭이 없었던 플런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게 된다. 뺏고 뺏기는 이름 싸움이 실로 치열하다. 뚫어뻥 출연 이전까지는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음역한 통수컵(通水カップ) 등으로 불렸다. 온라인 쇼핑몰 등에서는 고무 압축기란 이름으로 소개된다.

1984년 출시된 백광산업의 배수구 세정제 ‘백광 트래펑’의 TV 광고. 트래펑 출시 이후 팡뚜러, 펑크린, 뻥뚜러 등 유사한 이름의 배수구 세정제가 다수 출시됐다. 1980년대 국내 출시된 제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야성(野性)이 살아 숨쉬는 호방한 그 시절을 느낄 수 있었다. MBC 청룡의 백인천 선수가 광고한 게브랄티(유한양행) 이라든가 살로우만 로스구이햄(롯데햄), 대우 맵시-나(대우자동차) 등 시대를 풍미한 작명 센스가 돋보인다. [사진 출처=각 사]
북미에서는 플런저 외에도 배관공의 도우미(plumber’s helper), 포스컵(force cup)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러버컵은 원래 막대와 결합한 고무 부분만을 가리키지만, 일본에서는 도구 전체를 일컫는 표현이다. 일본도 한국과 유사하게 일반적인 명칭 외에 여러 별칭으로 불리고 있고 지역 마다 통용되는 이름이 다르다. 통수컵(通水カップ), 흡인컵(吸引カップ), 흡인기 등 원리와 목적에 기반한 이름이 있는가 하면, 슷뽄(スッポン), 팟콘(パッコン), ガッポン(가뽄), ギュッポン(규뽄) 등 ‘슷-하고 눌렀다가 뽄! 하고 잡아 빼는’ 의성어를 옮겨온 명칭도 있다. 푸카푸카(プカプカ ‘둥실둥실’ ‘뻐끔뻐끔’이라는 뜻의 일본어)라고 불리기도 한다. 푸카푸카 귀엽다.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전기 역사(Biographical history of Westchester County, New York)에 실린 존 S. 홀리의 사진. 그는 에어컨의 아버지 윌리스 캐리어만큼이나 칭송받아 마땅한 ‘변기의 수호자’다. [사진 출처=비영리 단체 Internet Archive]
그렇다면 플런저는 누가 발명했을까. 미국의 사업가 존 S. 홀리(1836~1913)다. 그는 여러 사업에 손을 댔고 또 성공한 만능 재주꾼이었다. 1836년 뉴욕 북부에서 태어나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네바다 등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1870년대 뉴욕으로 돌아와 초콜릿 등을 만드는 제과업체 월리스 앤 컴퍼니(Wallace and Company)에 취업했다. 이 시기에 그는 본업과 무관한 물건 하나를 발명해 특허 출원하게 되는데 그 물건의 이름은 바로 탄성력 컵(elastic force cup), 이후 플런저 혹은 뚫어뻥으로 불리는 ‘그거’ 되시겠다.
(왼쪽) 1875년 특허 출원한 최초의 플런저. 특허 번호 US158937A. 최초 특허 서류에서는 Vent-Clearers for Wash-Bowls(세면대용 배수구 청소기)였다. 이후 존 S. 홀리는 탄성력 컵이라는 덜 직관적이고 더 멋있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사진 출처=특허 검색플랫폼 Espacenet] (오른쪽)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875년 5월호(Scientific American Volume 32 Number 21)에 실린 탄성력 컵 관련 특허 정보. [사진 출처=비영리 단체 Internet Archive]
홀리는 특허 수익금을 바탕으로 홀리앤훕스(Hawley & Hoops)를 창업, 1880년대 미국에서 가장 큰 초콜릿·사탕 업체로 키웠다. 홀리앤훕스는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팔머 콕스의 캐릭터 ‘브라우니’를 이용한 트레이딩 카드를 자사 제품 판촉에 활용했는데, 이는 대중문화와 결합한 브랜드 광고 캠페인의 최초 사례였다. 포켓몬빵 띠부띠부씰의 조상인 셈. 홀리앤훕스는 1886년 뉴욕에 초콜릿 공장을 짓고 직원 800명을 고용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1950년대 마즈(엠앤엠즈를 만드는 세계 1위 초콜릿 브랜드)에 인수 합병된다. 플런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홀리와 초콜릿 공장’에 다다랐다.

세상에 태어난 지 100년을 훌쩍 넘겼다. 단순하고 저렴하면서도 기능적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기에 등장 당시의 형태와 소재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수세식 변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존재한다. 수많은 변기를 구했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을 구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위대한 영웅에게 제대로 된 우리말 이름 하나 주지 못했다.

홀리앤훕스의 인기 상품이었던 ‘초콜릿 담배’의 1890년대 옥외 광고판. 소년소녀들의 자연스러운 포즈가 인상적이다. “야 초콜릿 한 개비 줘봐.” “아 돛대라 안 돼.” [사진 출처=마이클 레이스코니스 요리학교 ICE 소속 셰프 개인 소장품]
  • 다음 편 예고 : 카페에 있는 좁고 작은 빨대인지 뭔지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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