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맞수 손권과 제갈량… 후손이 가꾼 고풍스러운 마을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2023. 12. 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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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절강고진 ①용문고진과 제갈팔괘촌
편집자주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열린 저장성에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풍성한 마을이 많다. 고진과 고촌, 고성도 많고 영화 촬영 세트장도 여러 곳이다. 강남 최후의 비경과 다랑논이 펼쳐지고 소수민족의 터전이기도 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명산, 아름다운 호수와 수향도 있다. 내륙과 연안까지 두루 발품 기행을 떠난다. 모두 10회에 나눠 소개한다.
중국 저장성 제갈량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제갈팔괘촌. 마을 한가운데 '종지' 연못을 중심으로 고풍스러운 골목과 집들이 이어진다. ⓒ최종명

소설 삼국지는 등장인물이 꽤 많다. 누가 주연배우인지 가늠조차 어렵다. 세 나라를 대표하는 주인공을 꼽으라면 조조, 유비, 손권이다. 관우를 비롯해 주연급 장군도 수두룩하다. 제갈량은 단독 주연이라 해도 좋을 만큼 소설 전편을 누빈다. 저장성 항저우 인근에 손권과 제갈량의 후손이 살고 있다. 겨우 100㎞ 거리다. 천리길 멀리 남하해 공교롭게도 서로 아주 가까운 곳에 살아가고 있다니 흥미진진하다.


오나라의 은은한 향기... 손권 후손의 용문고진

손권의 후손이 살아가는 용문고진 지도. ⓒ최종명
화가가 용문고진 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다. ⓒ최종명

항저우에서 서남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용문고진(龍門古鎮)이 있다. 손권의 후손이 사는 마을로 손권고리(孫權故里)라 한다. 동그랗게 만든 지도가 보인다. 항저우로 흘러가는 푸춘강(富春江) 지류가 북쪽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시냇물이 마을로 스며들어 도랑이 졸졸 흐른다. 초입에서 도랑과 가옥을 그리는 화가가 반겨준다. 사진도 찍어 놓으면 달라 보이듯 눈앞 풍경이 화폭으로 들어오니 약간 낯설다. 느린 걸음으로 물길을 따라간다.

수로를 따라 연결되는 용문고진. ⓒ최종명
용문고진 백보청의 '성지' 와 '흠포순효' 편액. ⓒ최종명

도랑에 핀 꽃이 서로 봐달라며 알록달록 손짓한다. 나무는 슬며시 물속으로 몸을 숨긴다. 지붕은 구름과 하늘을 동반해 수면을 내려앉았다. 도랑 동쪽에 백보청(百步廳)이 있다. 청나라 중기에 손권의 후손인 손성장이 세운 저택이다. 방 9개 너비로 백보에 이를 정도로 넓다. 성지(聖旨)라는 표지가 있다. 효자에 대한 칭찬인 흠포순효(欽褒純孝)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청나라 옹정제가 하사했다.

용문고진 백보청의 꽃 장식. ⓒ최종명
용문고진 백보청 광유당 항아리에 비친 담장. ⓒ최종명

명예와 부유를 담은 광유당(光裕堂)이 화사한 꽃으로 치장했다. 높이 걸려 있어 고개를 젖히고 바라보니 색다르다. 꽃을 우러러본 적이 있던가? 꽃송이 사이로 보이는 지붕이 아주 높다. 하늘에서 비추는 햇살이 방안 가득하다. 항아리에 비친 물속 반영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너무 높아 잘 보이지 않던 지붕이 거꾸로 스며든다. 숨결 같은 바람에도 흐느적거린다. 관광객만 찾아오니 인적이 드물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저택이건만 마당에는 닭 몇 마리만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용문고진 연지 부근에 붓글씨를 쓰는 학동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최종명
용문고진 연지 풍경. ⓒ최종명

도랑 서쪽에 벼루에 담긴 연못이라 불리는 연지(硯池)가 있다. 붓글씨 쓰고 있는 학동 조각상을 세웠다. 용(龍) 자를 쓰는 자세가 마치 무공을 펼치는 듯하다. 벼루처럼 생긴 연못 이쪽저쪽에 서로 어울리는 이름을 지었다. 연지야월(硯池夜月)에 서서 건너편 월도풍래(月到風來)를 바라본다. 밤이면 달빛과 바람이 소소하게 방문하는 분위기이겠다. 하얀 담장과 검은 지붕이 연분홍 꽃을 피운 나무와 더불어 흥건하게 담겨 있다. 붓 대신 잔을 들어야 할까 싶다.

용문고진 손씨종사 동문. ⓒ최종명
용문고진 연익당 의문. ⓒ최종명

골목 안으로 들어가 손씨종사(孫氏宗祠)를 찾았는데 대문이 닫혀 있다. 손권의 26세손이자 용문 손씨 시조인 손광을 봉공하는 사당이다. 송나라 시대 처음 세웠고 중건을 반복했다. 동원(東轅)이라 쓴 동문에 ‘전천후 개방’이라 적혀 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따라 걷다가 고풍스러운 대문과 만난다. 글씨는 떨어져 나가고 흔적만 남은 의문(義門), 연익당(燕翼堂)의 대문이다. 마침 민국 시대 옷을 입은 모델이 있어 촬영장을 온 느낌이다.

용문고진 연익당. ⓒ최종명

명나라 중기에 자연재해로 큰 곤란을 겪었다. 38세손 손조경이 가산을 내놓고 구휼했다. 감읍한 조정으로부터 의민(義民)이란 편액을 하사 받았다. 후손들이 패방 형태의 대문을 세웠다. 천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자선을 펼친 의로운 가문이라는 명성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하다. 연익당에 걸린 유방백세(流芳百世)의 ‘유’에 점 하나가 없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명성이 후세에 오랫동안 전해졌다는 자랑이다.

용문고진의 쇠고기 우팔완을 체험하는 곳의 벽화. ⓒ최종명
용문고진 우팔완을 체험하는 곳의 벽화. ⓒ최종명

황소가 풀을 뜯고 있다. 벽에서 당장이라도 나올 기세다. ‘우팔완(牛八碗)’ 체험 식당 벽화다. 우팔완은 남자가 군대를 가면 건투를 빌며 소고기 요리를 해주던 풍습이다. 무사귀환을 바라며 여러 부위로 8가지 요리를 만들어줬다. 지금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 소고기를 많이 먹는다 한다. 염원을 담은 소고기 맛을 체험할 수 있는 식당이다. 코뚜레와 날름거리는 모습만 봐도 익살스럽고 배부르다. 이발하는 장면을 그린 벽화가 보인다. 볼수록 단정한 붓 솜씨이며 소박한 인정이 풍긴다. 2006년 천쿤이 주연한 영화 ‘이발사’ 촬영지다.

용문고진 공부 동관제. ⓒ최종명

공부(工部) 대문이 보인다. 명나라 초기 공부의 관리를 역임한 손곤을 기념한다. 명나라의 육부는 순서대로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관리라는 별칭이 있다. 동관제(冬官第)도 새겼다. 인도양을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항해한 정화 함대의 함선 제작을 담당했다. 80척을 건조하는 동안 단 한 명의 인부도 사망하지 않았다.

용문고진의 사원당. ⓒ최종명

회백색 담장과 봉긋한 지붕이 이어지는 골목을 지나니 사원당(思源堂)에 이른다. 정사각형 백지 위에 그린 인물은 손종이다. 용두장(龍頭杖)을 들고 있다. 황제가 큰 공을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병기다. 위로는 아둔한 군주를 혼내고 아래로는 간신을 때린다는 상징이다. 손자를 잘 둔 덕분이다. 손권이 황위에 오른 후 오효의왕(吳孝懿王)으로 추서했다. ‘아름다울 의(懿)’에 오나라의 개국시조라는 뜻을 담았다.

경관 조명이 은은한 용문고진 연지 야경. ⓒ최종명

강남의 건축 양식으로 지은 가옥이 많다. 지붕 타고 오른 나무도 싱그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마을 풍경을 그리는 학생도 많다. 하루 온종일 봐도 다 보기 어렵다. 속내까지 아름다우니 얼마나 오래 머물러야 할지 모른다. 밤의 연지는 옷을 완전히 갈아입는다. 벼루가 만들어낸 먹물 같은 밤이 붓을 들어 멋진 글씨를 쓴 듯하다. 황홀경에 홀려 잔을 내려놓으니 일필휘지를 부르는 듯하다.


어떤 세태에도 흔들리지 않길... 제갈량 후손의 제갈팔괘촌

제갈량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저장성 제갈팔괘촌 입구. ⓒ최종명
제갈팔괘촌 입구의 안내도. ⓒ최종명

용문고진에서 서남쪽으로 약 1시간 반을 달려 란시(蘭溪)로 간다. 제갈량 후손이 사는 제갈팔괘촌(諸葛八卦村)이 있다. 삼국지 두 영웅의 후손이 드넓은 땅에서 이렇게 가깝게 살고 있다니 뜻밖이다. 연못 옆 숙소에 짐을 푼다. 상당(上塘)과 하당 두 연못이 나란하다. 지도를 보니 크고 작은 연못이 10개나 된다. 마치 거북 등가죽에 마을이 올라탄 형상이다. 연못을 이정표로 요리조리 골목을 따라가면 길 잃을 염려는 없어 보인다.

제갈팔괘촌의 옹목당 대문. ⓒ최종명

상당 부근에 있는 옹목당(雍睦堂) 대문이 남다르다. 16세기 초 명나라 시대에 처음 지은 사당이다. 벽돌을 재료로 조각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처마 밑 두공이 살짝 보인다. 들보에 새긴 아자문(亞字紋)은 흔하지 않다. 고대에 ‘아’는 전투와 권력을 상징했다. 두 개의 활(弓)이 등을 맞댄 형상이다. 천마와 봉황 등 신비한 동물이 등장하며 나무와 풀, 구름과 꽃이 자유로이 자리를 차지한다. 위쪽에 박쥐가 날아다니고 꼭대기에는 조롱박이 하늘을 향해 있다. 삼국지에서 여포의 무기로 고대 병기인 방천화극(方天畫戟)이 꽂혀 있다.

제갈팔괘촌 중심에 있는 연못인 종지. ⓒ최종명
제갈팔괘촌 승상사당의 제갈대사. ⓒ최종명

마을 중심에 종지(鍾池)가 있다. 태극 문양의 절반으로 만들었다. 연못을 중심으로 골목이 여덟 갈래로 갈라진다. 아주 조금씩 바깥으로 갈수록 지형이 높아져 자연스레 물이 고인다. 팔진도를 포석으로 마을을 조성했다. 골목을 경계로 거주 공간이 나눠져 있어 팔괘촌이다. 제갈량의 28세손인 제갈대사가 처음 이주해 왔다. 원나라 시대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풍수지리에 해박했다. 삶의 공간을 창출하는 데 지식을 마음껏 활용했다. 덕분에 신비롭고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제갈팔괘촌 종지 건너편에서 본 대공당. ⓒ최종명
제갈팔괘촌 대공당 대문. ⓒ최종명

연못 옆에 제갈량을 기념하는 대공당(大公堂)이 있다. 충(忠)과 무(武)가 새겨진 대문에 칙정상의지문(敕旌尚義之門)이 적혀 있다. 명나라 중기 33세손인 제갈언양이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휼했다. 조정으로부터 공로로 받은 포상이다. 의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칙령이다. 용마루가 10m에 이를 정도로 웅장하다. 기둥과 들보에도 화려한 조각 예술을 수놓았다.

제갈팔괘촌 대공당. ⓒ최종명
제갈팔괘촌 대공당에 걸려 있는 계자서. ⓒ최종명

후손이 모여 제례를 올리는 공간으로 700㎡에 이른다. 제갈량의 훈육인 계자서(誡子書)가 새겨져 있다. 50대 중반에 이르러 8살이 된 아들 제갈첨에게 써준 편지다. '욕심 없이 담박(澹泊)하지 않으면 뜻을 펼칠 수 없고, 흔들림 없이 영정(寧靜)하지 않으면 이상을 이룰 수 없다.' 워낙 유명한 말이라 단번에 눈에 꽂힌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발언한 ‘중국 명언’이 화제였다. 칭화대 연설에서 ‘담박’을 ‘담백’이라 말하는 순간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기둥과 들보가 밑천이 돼 사당을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다. 밑거름이 튼튼해야 발언에 향기를 담아 십리라도 가지 않겠는가?

제갈팔괘촌의 원동문과 골목 풍경. ⓒ최종명
제갈팔괘촌 민가의 고풍스러운 담장. ⓒ최종명

봉긋한 원동문(圓洞門)으로 들어가면 미로가 이어진다. 팻말이 있어도 워낙 복잡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결국에는 다 통하지만 헤매기 쉽다. 동서남북과 연못의 위치를 파악하며 골목을 헤집고 다닌다. 하얀 담장과 검은 벽돌로 쌓은 지붕이 촘촘하게 엉켜 있다. 문에 붙은 붉은 대련이 하늘색과 누가 선명한지 경쟁하는 듯하다. 객잔으로 탈바꿈한 민가가 군데군데 출몰한다.

제갈팔괘촌의 취록당과 승상사당. ⓒ최종명
제갈팔괘촌 승상사당의 '명수우주' 편액.ⓒ최종명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취록당(聚祿塘) 연못에 도착한다. 제갈량 사당인 승상사당(丞相祠堂)과 딱 붙어 있다. 명나라 후기에 건축했다. 면적이 1,400㎡으로 대공당의 두 배다. 4개의 육중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양팔로 껴안을 정도로 크다. 소나무(松), 측백나무(柏), 오동나무(桐), 참죽나무(椿) 4종류의 서로 다른 나무를 썼다. 숨은 뜻이 있을 법하다. 어떤 세태(계절)에도 흔들리지 않고 늘 봄처럼 왕성하라는 송백동춘(松柏同春)을 비유한다. 무한한 시간과 끝없는 공간인 우주에 길이 이름을 남긴다는 명수우주(名垂宇宙)와 비교된다. 보여도 좋지만 보이지 않고 숨은 뜻이라 더욱 빛난다. 4개의 기둥을 차례로 가볍게 안아본다.

제갈팔괘촌 승상사당의 정교한 조각 예술. ⓒ최종명
제갈팔괘촌 승상사당의 제갈량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었다. ⓒ최종명

중국의 사당은 늘 조각 예술의 극치라 말하게 된다. 기둥과 들보, 두공 모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볼만하다. 후손들이 준비한 존경심과 정성을 만끽한다. 계단 따라 오르면 2m 높이의 제갈량이 앉아 있다. 아들 제갈첨, 손자 제갈상과 함께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가 나란히 보좌하고 있다. 슬며시 앞에 서서 인증을 한다.

제갈팔괘촌 상당에 마을 풍경이 비친다. ⓒ최종명
제갈팔괘촌의 상당 야경. ⓒ최종명

숙소가 있는 연못으로 돌아온다. 담장과 대문이 반영된다. 해가 저무는데 여전히 햇살은 화창하다. 숙소 창문으로 한없이 바라다본다. 연못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저녁을 먹고 술도 마신다. 어둠이 빠르게 몰려오면 조명도 순식간에 활활 타오른다. 삼국지가 안주로 오른다. 호적수였던 두 인물의 후손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설로 들어간다. 손권과 제갈량이 만나는 장면에 이르면 술기운이 후다닥 차오른다. 역사의 불꽃으로 살았던 인물이 화려한 조명과 함께 되살아난다. 삼국지 전투 현장으로 달려간다. 밤이 깊어갈수록 피투성이로 변한 가슴이 도저히 식을 기세가 아니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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