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처럼 귀했던 유리, 차가운 물성에 따스함 담아볼까

한겨레 2023. 12. 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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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박효성이 욕망하는 공예 _ 유리 공예로 꾸미는 성탄절
크리스마스 입체 카드를 닮은 유혜연 작가의 유리 트리와 선물 상자. 유혜연 제공

올해의 마지막 달, 12월이다. 이 정도 속도라면 단속에 걸릴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과속의 시간이다. 나이는 쌓이는데 그만큼의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아 12월을 맞이하기 두려웠다. 그래도 속절없이 마음이 누그러지는 건 명동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마주한 크리스마스 풍경 덕분이다. 백화점 두 곳에서 경쟁하듯 찬란하게 펼쳐놓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넋을 잃고 바라보니 억눌린 마음에 고요가 찾아왔다. 종교는 없지만 어쩌면 예수님이 12월에 태어난 것이 인류에게 선물이자 축복이 아닐까 싶다.

크리스마스가 12월 초가 아니라 25일이라는 점도 ‘신의 한 수’다. 정신없이 달리던 일상의 흐름을 어린이보호구역 제한 속도로 늦추고 25일까지 차근차근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날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정말 한 해가 끝나는 느낌이고 이후 31일까지의 6일은 새해 전에 덤으로 받은 선물로 여겨진다. 만약 크리스마스가 12월 초였다면 한 해가 11개월밖에 되지 않은 듯 짧게 느껴진 데다 6일간의 여유도 없어 서운할 뻔했다.

상류층만 가질 수 있었던 유리

박선민 작가가 폐유리병을 가공해 만든 크리스마스 테이블용 고블렛잔. 박효성 제공

2023년을 무탈하게 통과한 나 자신을 격려하는 마음으로 트리까지 들이진 못하더라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보고 싶어졌다. 선택의 기준은 물론 공예품이어야 했다. 일회용 장식이 아니라 두고두고 매해 꺼낼 수 있는 자그마한 크기로 한정했다. 기준을 정리해보니 자연스럽게 유리 공예가 떠올랐다. 다채로운 빛깔로 반짝이는 유리야말로 크리스마스를 위한 보석이 되어줄 것이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인 4000년 전부터 유리는 장신구로 만들어졌다. 유리를 그릇으로 쓰게 된 건 기원전 1500년쯤이고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녹인 유리를 대롱에 대고 불어서 형태를 만드는 기법이 등장해 기존보다 한결 빠르게 유리병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워낙 공이 많이 들어가는 공예라 상류층만 소유할 수 있는 고가의 물건이었고 보석처럼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황남대총에서 유리잔이 출토되고 백제 무왕 때 창건한 미륵사의 석탑 속에 부처님 사리를 담아 보관할 때 유리병을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의 유리 공예는 서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그 시절 한반도에선 도자 기술이 발전해 있었다.

우리 땅에서 발원한 전통 공예는 아니지만 후세의 실력 좋은 작가들이 영롱한 유리 작품들을 보석처럼 선보이고 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한 위시리스트를 유리 공예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디자인과 종류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만든 이의 손길과 숨결을 느낄 수 있어,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작된 것보다 다정한 온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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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공예가의 손길과 숨결로

동화 같은 감성을 전하는 조현영 작가의 유리 크리스마스 소품. 조현영 제공

유혜연 작가가 운영하는 유리 브랜드 오유글라스워크는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트리와 선물 상자를 유리로 디자인했다. 2020년부터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선보이는 한정판 제품이다. 선물 상자는 올해 처음으로 선보였다. 협소한 공간에서 유리 트리 하나만으로도 따뜻한 감성을 채울 수 있고 크리스마스 파티 테이블 위에 여러 개를 올려두면 간단하게 스타일링을 완성할 수 있다. 두 개의 유리 조각 가운데 파인 홈을 십자 모양으로 연결해 세우는 방식으로,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분리해서 보관하기 간편하다. 매년 디자인과 색상이 조금씩 달려져 모으는 재미도 쏠쏠하고 깨지지만 않는다면 대를 물려 줄 수 있다.

유리 공예가 박선민 작가는 한 번의 쓰임 후 기능을 잃은 폐유리병을 자르고 다듬어 다시 우리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크리스마스 테이블을 위한 고블렛잔(받침이 달린 잔)을 만들었다. 폐유리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은 과정이 녹록하지 않다. 수거한 유리병의 라벨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세척한 후 용도에 따라 적합한 높이로 절단한 뒤 여러 번의 연마 과정을 통해 표면을 부드럽게 갈아준다. 새로운 조각을 더하거나 금박을 붙여 화사함을 더하고 표면에 인그레이빙(유리 표면에 선을 새겨넣는 일)으로 그림을 새겨 특별함을 더한다. 공예용 유리, 도자, 금속 등을 부분적으로 접목해 업사이클링 디자인의 다양성도 추구한다. 유리 자원의 순환과 공예적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그려내는 박선민 작가의 업사이클 프로젝트는 매번 위시 리스트에 올라 소장욕을 불러일으킨다.

케이크를 연상시키는 이규비 작가의 캔들 홀더. 박효성 제공

조현영 작가가 유리 전문 갤러리 플로우에서 전시 중인 크리스마스 유리 소품은 동화 같은 스노볼을 연상시킨다. 종과 리스(화관 모양의 크리스마스 장식)가 담긴 유리 볼들과 루돌프가 들어앉은 유리돔이 이를 연결하고 유리 트리가 층층이 쌓인 특별한 장식품이다.

유리로 만든 케이크 같은 조형미가 돋보이는 이규비 작가의 작품은 스스로 위로하고 칭찬하는 자신을 위한 연말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티라이트 캔들(작은 알루미늄 컵에 왁스를 부어 만든 양초)을 넣을 수 있는 작은 크기지만 고요히 파티를 빛낼 수 있는 아이템이다.

나뭇가지도 트리로 변화시키는 김은주 작가의 유리 오너먼트. 박효성 제공

책을 만드는 편집자였던 김은주 작가는 이제 유리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쓰는 유리 작업자로 책갈피 같은 유리 오너먼트(장식)를 만들었다. 작은 나뭇가지에 시의 단어 같은 오너먼트 서너 개를 걸기만 해도 나만의 스토리가 담긴 트리가 완성된다.

유리는 겨울을 닮은 차가운 물성이지만 빛을 투과하며 특유의 따스함이 깃드는 다정한 소재다. 유리 공예가의 손길과 숨결로 다듬어진 유리 작업은 더욱 그렇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유리 제품에서는 느끼기 힘든 온기가 녹아 있기에 유리 공예품은 겨울, 크리스마스가 제철이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boxStyl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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