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시장의 중심으로 옮겨진 사도세자 이야기 [책&생각]

한겨레 2023. 12. 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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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장금' 같은 성공 사례도 있었지만 현재 케이(K)-사극의 세계적 인기는 글로벌 오티티(OTT) 플랫폼의 성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로써 한국 전통 음식이나 의상 등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건 긍정적이다.

이는 세계 문화 시장에서 주변에 있다가 중심으로 이동하는 한국 서사의 창작자들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할 시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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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붉은 궁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l 시공사(2023)

과거에 ‘대장금’ 같은 성공 사례도 있었지만 현재 케이(K)-사극의 세계적 인기는 글로벌 오티티(OTT) 플랫폼의 성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로써 한국 전통 음식이나 의상 등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건 긍정적이다. 반면 그만큼 창작물이 고증이나 외교관계적 해석에서 냉정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놓였다. 즉, 한국 역사물은 종전까지는 한국에서 생산되어 한국인들에게 소비되는 창작물로 여겨졌다 해도, 하나의 장르가 된 현시점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에서 허주은 작가의 ‘붉은 궁’과 같은 역사 팩션 추리물은 흥미로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이 작품은 한국 사극에서 가장 즐겨 다룬 소재인 사도세자를 둘러싼 여러 가설에서 시작했다. 1758년 영조 대의 조선, 열여덟 살의 내의녀 백현은 혜민서에서 궁녀 네 명이 살해당한 사건과 마주친다. 이후, 이 사건의 범인이 왕세자라는 소문이 도성 내에 떠돈다. 현은 용의자로 몰린 스승 정수 의녀를 구하기 위해 동년배의 젊은 종사관 서어진과 함께 사건 속으로 뛰어든다.

‘붉은 궁’은 추리소설로서도 긴장감이 있지만, 또 다른 흥미는 작품 외적인 면에서 온다. 허주은 작가는 어릴 때 한국을 떠나 현재 캐나다에 사는 이민자이고 ‘붉은 궁’은 처음에 영어로 쓰여서 영어권에서 출간되었다. 전작 ‘사라진 소녀들의 숲’(유혜인 옮김, 미디어창비)이 국내에 소개될 당시 한 인터뷰에서 허주은 작가는 성인이 되어 한국 역사를 배웠기에 한국 역사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일단 고증에 대한 우려를 다른 차원의 논의에 맡겨두기로 하면, 이 작품의 디아스포라 문학적 특성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어로 쓰인 역사 자료의 번역과 재번역이라는 변형을 거쳐 우리에게 온 ‘붉은 궁’은 일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살았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작가가 재구성해 낸 역사물이면서, 현대 영어덜트 소설이다. 소설은 한국 역사의 특정 사건을 다루었지만 보편적 추리물과 청춘 로맨스, 성장 소설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

무엇보다도 ‘붉은 궁’의 재미있는 점은 어른의 권위에 짓눌리는 청년이라는 영어덜트 서사의 기본 설정을 현과 아버지, 그리고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에 대입했다는 점이다. 형조판서인 아버지와 천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성도 제대로 받지 못한 현은 늘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고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내길 원한다.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딸이 되기를 포기한 순간 현은 존재 가치를 스스로 찾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여성의 정절을 지키기 위한 자해 도구였던 은장도는 가부장제를 벗어난 어머니를 통해 현에게 주어지는 순간, 범인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된다.

부모, 혹은 기존 권위가 인정하지 않은 아이가 세상에서 스스로 자기 자리를 만드는 과정이 성장이라면, 전통적 가부장제 속 여성, 하층계급, 이민자를 포함해 제도가 긍정하지 않는 소수자의 삶은 성인이 되었어도 늘 도전일 수밖에 없다. 특정 사회의 역사가 문화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서사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이는 세계 문화 시장에서 주변에 있다가 중심으로 이동하는 한국 서사의 창작자들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할 시선이기도 하다.

박현주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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