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인생] “보금자리 옮겨보니 세상 보는 눈 넓어지더군요”
드라마 세트장 같은 심천…아기자기한 매력에 정착
가족 먹을 채소 키우고 화단 가꾸며 시골살이 만끽
동네 카페 들러 ‘사람 공부’…주민극단 연기 지도도 충북>
“아직도 사람들이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에 나오는 영기 엄마라며 알아보곤 해요. 17년이 지난 작품인데도 여태껏 잊지 않고 기억해주니 정말 감사하죠.”
주부진씨(77)는 정감 가는 우리네 할머니, 치매로 기억을 잃은 어르신, 억척스럽게 자식을 키우는 강인한 어머니 등 다양한 역할로 분해 15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다작 배우다. 특히 MBC ‘거침없이 하이킥’(2006), tvN ‘응답하라 1997’(2012)과 ‘슬기로운 의사생활’(2020) 같은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2년 전 귀촌한 주씨가 드라마 속 한장면처럼 아늑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을 찾았다.
심천역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동화책을 펼친 듯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역 출구를 나서면 지붕을 맞대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처마 밑에는 대롱대롱 곶감이 매달려 있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역에서 5분만 걸어가면 주씨 집이 나온다.
“심천에 처음 오자마자 ‘드라마 세트장 같다’고 생각했어요. 어디선가 감독님의 ‘액션’ 소리가 들리고 촬영을 시작할 것 같다는 상상이 떠올랐죠. 아기자기한 매력에 빠져 연고도 없는 이곳에 정착하게 됐어요.”
심천에 터를 잡게 된 이유를 들려주며 주씨는 앞마당으로 안내했다. 겨울로 접어드는 때임에도 마당에 조성된 작은 텃밭에는 배추 4포기가 자라고 있다. 2인 가족이 먹을 양만 재배하느라 규모가 크진 않지만 농사 경험이 전무한 주씨에겐 이마저도 벅차다. 지난주에는 무를 수확해 겨울 동안 먹을 깍두기를 담갔다. 그는 “앞집, 옆집에서 갓 수확한 채소며 직접 만든 반찬을 자주 갖다준다”면서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나물도 먹어보고 이 지역 특유의 요리법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어 “이제껏 받기만 하다가 얼마 전에야 직접 재배한 작물로 요리해 보답했다”며 “도시 살 때는 몰랐던 정겨운 이웃간의 정을 요즘 많이 느껴 참 좋다”고 덧붙였다.
마당에서 주씨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화단이다. 한중간에는 작은 나무가 무럭무럭 크고 있다. 자주 가지치기해준 덕분인지 꽤 멋스러운 수형을 자랑한다. 귀촌 전부터 아파트 베란다 가득 화분을 들여놓고 키웠을 만큼 식물 사랑이 대단한 주씨는 요즘도 틈만 나면 마당에서 흙을 고르고 풀을 뽑으며 시간을 보낸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채광이 잘되는 넓은 창과 그간 작품활동 기록을 차곡차곡 모아놓은 진열장이 보인다. 현장에서 배우들과 찍은 사진, 수상의 영광을 간직한 상패까지 빼곡하다.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벽 이곳저곳에 붙은 종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씨가 맡은 배역의 대사가 쓰여 있다. 입에 잘 붙지 않는 대사를 이렇게 곳곳에 붙여두고 생각날 때마다 읊는다.
“58년차 배우지만 연습을 게을리하면 바로 도태돼요. 항상 예민하게 감수성을 유지하고 대사를 숙지하고 있어야죠. 그래서 귀촌 생활이 저한테는 딱 맞아요. 조용하고 여유로워서 사색에 잠길 틈이 자주 생기고, 감정이나 경험을 곱씹어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죠.”
촬영 일정이 없을 때는 역 바로 앞에 있는 카페 ‘구구사랑방’에 간다. 이곳은 마을주민들이 심심할 때마다 들러 토스트 등 요깃거리로 배를 채우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곳이다. 사람의 손동작·습관·말투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연구하는 ‘사람 공부’가 취미인 주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곳이다.
마을주민에게도 주씨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됐다. 작은 규모로 주민들끼리 ‘구구극단’을 운영하며 극을 무대에 올리곤 하는데, 종종 주씨가 연기 선생님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살뜰히 챙겨준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누구보다 열심히 연기 노하우를 전해준다.
주씨는 주변 동료들에게 귀촌 생활을 적극 추천하고 다닌다. 그는 “먼 타지로 보금자리를 옮겨보니 확실히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며 “아직은 서툴지만 앞으로는 텃밭도 더 넓히고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화단도 가꿔보고 싶다”고 밝혔다.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