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12·12 이후 묻혔던 정선엽 병장의 삶 조명돼 감사…국가가 나서 의로운 죽음 선양해야”

윤주성 2023. 12. 1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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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광주]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전화연결: 정훈채 목사(고 정선엽 병장 형)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Hw3KXBSqOIs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영화 서울의 봄에서 육군본부 지하 벙커를 지키다 사망한 것으로 그려진 정선엽 병장은 조선대에 다니던 대학생이었습니다. 1977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 입학한 뒤 입대해서 국방부 헌병으로 근무하다 제대를 불과 석 달가량 앞두고 사망해서 결국 졸업을 하지 못했는데요. 조선대가 최근 고 정선엽 병장에게 명예 졸업장 수여를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선엽 병장의 형인 정훈채 목사 연결해서 동생의 사망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이후 상황은 어땠는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정훈채 목사(정선엽 병장의 형) (이하 정훈채):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미얀마에서 생활하신다고 들었는데 영화 서울의 봄은 보셨습니까?

◆ 정훈채: 네. 영화 제작진이 시사회에 초청해줘서 잘 봤습니다. 아픔이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이 영화 때문에 묻혔던 정선엽 병장의 의로운 죽음이 많은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잘 봤습니다.

◇ 윤주성: 영화에서도 그려졌지만, 동생인 정선엽 병장이 12월 13일 사망한 것이지요?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 정훈채: 전두환 일당이 국권 장악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날이지요. 정선엽 병장은 국방부를 지키는 헌병이었습니다.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국방부 사수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반란군들이 총격을 가하며 국방부에 쳐들어왔지요. 모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정 병장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사살당했습니다.

◇ 윤주성: 당시 기사라든지 영화를 보면 상당수 초병이나 장교들이 투항을 하거나 도망을 가지 않았나 싶던데 “동생인 정선엽 병장은 왜 도망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정훈채: 원래 그런 성향을 가졌지요. 강직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그래서 국방부 장관이 사수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반란군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무장해제를 하려고 할 때 반란군을 발로 걷어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걷어차인 적들이 총격을 가한 것이지요. 끝까지 임무에 충실했다고 봐야지요.

◇ 윤주성: 당시 가족들은 정선엽 병장의 사망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 정훈채: 12월 13일 아침에 제가 서울역 앞 은행에 근무했는데 택시 타고 삼각지를 통과하는데 택시 기사님이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지난밤에 국방부에서 총격전이 심하게 일어났다고. 그래서 제가 국방부로 가서 동생 안전이 걱정돼서 면회 신청을 했지요. 면회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실에 들어와서 다시 일을 하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국방부에서 전화가 왔어요. 국군통합병원 영안실로 오라고. 그래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요.

◇ 윤주성: 어떻게 사망한 것인지 경위는 설명을 들으셨어요?

◆ 정훈채: 당시는 들을 수 없었고요. 제가 다니던 교회에 국방부 군무원이 계셨어요. 그분이 전해줘서 들은 이야기로는 제일 중요한 위치 벙커 초병을 서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전부 다 투항을 하고 다 도망갔는데 “끝까지 총을 뺏기지 않고 저항하다가 오히려 적군을 발로 걷어차서 피격을 당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나중에 들었지요.

◇ 윤주성: “사망 소식을 듣기 일주일 전쯤에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셨다”고 했는데 그때가 마지막 대화였는지 또 어떤 이야기 나누셨어요?

◆ 정훈채: 그렇지요. 꼭 일주일 전인데요. 그 기억은 생생합니다. 제가 이야기를 했지요. “남은 3개월 복무 마치고 다니던 조선대학교 졸업하면 미국 유학시켜주겠다”고 약속했고, “형님 고맙다”고 그랬지요. 그것이 동생과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 윤주성: 군 복무 중에 사망을 했으니까 군 당국이 어떻게든 정선엽 병장의 사망 성격을 규정하고 처리를 했을 텐데 지금까지 순직 처리가 되어 있었던 것인가요?

◆ 정훈채: 그렇지요. 단순한 오인 사격으로 인한 순직으로 처리되었지요. 그런데 전두환의 여러 가지 죄목 중 초병 살해죄가 있는데 바로 정선엽 병장 살해죄지요. 그것이 큰 죄인데, 전두환 일당의 행위는 군사반란으로 판결이 났고 그래서 반란군을 막다가 죽은 것이 전사가 맞지요. 전사자로 정정된 것 작년에 정정됐지만,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순직에서 전사로 정정이 되기까지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 정훈채: 그동안에는 명예회복을 위해서 노력은 했지만, 저는 선교사로 외국에 나와 있으니까 제가 취할 행동은 아니었고요. 그들이 집권할 때는 어디 다 대고 말도 못했고, 문민정부 들어서서도 이런 일들이 그렇게 관심을 끌거나 국가가 해결해 주거나 그런 것은 전혀 없더라고요. 늦게나마 기록을 바로잡아준 군 사망사고진상조사위원회 노력에 감사를 드리지요.

◇ 윤주성: 국방부 산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지금 전사 판정을 내린 것이군요.

◆ 정훈채: 거기에서 조사를 해서 판정을 했고 국방부에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래서 기록 정정이 된 것이지요.

◇ 윤주성: 지금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하던데요.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해서 제기하게 되신 것인가요?

◆ 정훈채: 그동안 장렬하게 전사를 했는데 단순한 실수나 사고로 인한 순직으로 처리됐기 때문에 유족들로서는 그것이 온당하지 않다. 그동안 잘못 역사에 기록된 것에 대한 그 처우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달라고 소송을 추진하고 있지요. 진행하고 있지요.

◇ 윤주성: 국방부에서는 어떠한 입장인가요? 이번 재판과 관련해서요.

◆ 정훈채: 국방부에서는 두 번 재판이 있었고 한 번 더 심리가 있고 판결이 날지 모르겠는데 그쪽에서는 국가 기록된 자료를 재판부에 다 제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 윤주성: 국방부에서는 손해배상 요구에 대해서 소극적인 입장이던가요?

◆ 정훈채: 저는 재판 진행 과정을 안 들어가 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중립적이지 않을까 싶어요. 정부이기 때문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변호사 쪽에서 노력을 하고 있고요.

◇ 윤주성: 저희도 소송 결과를 관심 가지고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생 정선엽 병장의 사망 이후에 가족들의 삶도 편치만은 않으셨을 것 같아요. 가족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 정훈채: 사건 후에 상당 기간 TV에서 전두환만 보면 정말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12.12 동생의 죽음이 저와 저희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전두환 일당을 용서할 마음이 조금은 생겼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의 사죄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사죄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전두환을 보고 참 저 인간 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윤주성: 동생의 사망 이후 목사님의 인생도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요. 원래는 은행에 다니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 정훈채: 그랬지요. 은행에 다녔지요.

◇ 윤주성: 은행을 그만두고 목회 일을 하신 것이에요?

◆ 정훈채: 그래서 정선엽 병장 사건이 정선엽이 동생이지만,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동생을 통해 이루어보려고 동생에 기대를 걸었지요. 제가 동생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광주상고를 나와서 근무하면서 동생을 공부시켰습니다. 제가 하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충분히 시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정선엽 병장이 저에게는 희망이었고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동생을 통해 이루어보려고 동생에게 기대를 걸었는데 그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장례식을 치른 직후부터 가까운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지요. 그래서 지금 저는 마치 우리 대한민국의 암울했던 1980년대 대한민국 상황과 아주 비슷한 나라에 와서 고통당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윤주성: 정선엽 병장이 다녔던 조선대에서 명예 졸업장 수여를 추진한다고 하는데요. 이 소식 듣고 어떤 생각 드셨습니까?

◆ 정훈채: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하지요. “조선대학교가 정 병장의 의로운 죽음을 인정해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식적으로. 그래서 조선대학교 내 ‘서울의 봄’ 촬영장에 정선엽 병장 조형물도 설치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조선대학교에 너무 감사를 드리고 저도 이제 광주상고 졸업하고 근무하면서 조선대학교 야간을 졸업했는데, 모교를 자주 방문하게 될 것 같습니다.

◇ 윤주성: 이번 영화 서울의 봄 흥행으로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동생인 정선엽 병장의 죽음과 관련해서 국민께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다면요?

◆ 정훈채: 군인의 사명은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생명을 바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선엽 병장이 그 일을 한 사람이지요. 정선엽 병장의 의로운 죽음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자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사건 자체가. 국가가 이러한 의로운 죽음을 치하하고 고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대학교 촬영장뿐만 아니라 “정부의 마땅한 곳에 정선엽 병장 조형물 설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명예회복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교육에도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윤주성 기자 (y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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