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35>] 외눈박이 왕의 통화정책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2023. 12. 1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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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Saint-Simon) 백작은 은행가 존 로(John Law)와 종이 화폐에 대해 날카로운 관찰자였다. 그는 루이 14세 전후 파리와 베르사유의 생활상에 대해 가차 없는 기록을 남겼다. 생시몽은 존 로의 은행이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에 만들어졌더라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인의 자제력 부족을 실패의 원인으로 보았다. 영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생시몽의 생각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은 않는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주인님의 돈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제임스 2세를 쫓아낸 영국의 귀족들은 네덜란드로 시집간 왕녀 메리와 그녀의 남편 윌리엄을 영국의 공동 군주로 추대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곧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빚더미에 나앉게 되었다. 영국군이 비치헤드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패배하자 윌리엄은 영국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120만파운드의 자금이 필요했다. 영국 국왕은 ‘백만장자의 모험’이라는 이름의 복권을 만들어 국민에게 팔려고 했으나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 국왕의 두 번째 아이디어는 국채를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외국인 국왕에게 기꺼이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었다.

이때 스코틀랜드인 윌리엄 패터슨은 존 로의 아이디어, 즉 금이 아닌 국채를 담보로 종이돈을 발행하는 생각으로 국왕 윌리엄에게 접근했다. 1694년 윌리엄은 패터슨의 제안을 받아들여 영국은행(BOE·영란은행) 설립을 허가했다. 영국은행은 국왕에게 군자금(금)을 대출해 주고, 국왕으로부터 대출 금액에 해당하는 국채(종이)를 넘겨받은 뒤, 국채를 근거로 은행권(종이)을 발행해 시뇨리지를 챙겼다. 시뇨리지는 화폐 제조 차익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5만원권의 제조 비용이 500원이라고 가정하면, 액면가 5만원에서 제조 비용 500원을 뺀 4만9500원이 시뇨리지, 즉 주인님(시뇨르)의 돈이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영국은행은 국왕으로부터 대출 원금에 대한 이자 8%와 별도의 서비스 수수료를 받았고, 민간으로부터도 대출 및 예금업무를 통해 상당한 이자와 수수료를 벌었다. 일본이 설립한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도 영국은행과 마찬가지로 민간을 대상으로 예금과 대출 업무를 수행했다.

전쟁의 영광

18세기 초 영국은행은 희대의 투기 사건인 남해거품(South Sea Bubble)에 휘말려 심하게 휘청거렸다. 거액의 투자 손실에도 불구하고 영국은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경쟁자 남해회사가 영국은행을 능가하는 무분별함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1797년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지자, 영국은행은 재기의 기회를 맞았다. 전쟁을 수행하던 윌리엄 피트 정권에 거의 무제한으로 군자금을 대출해 줬던 것이다.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이러한 영국은행의 대출 태도에 대해 “무분별하게 모든 달걀 한 바구니에 담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리카르도 역시 전쟁 말기에 도박에 가까운 국채 투기로 큰돈을 벌었다. 워털루 전투를 앞두고 영국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지자, 리카르도가 국채를 헐값에 사들였던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 경제가 급부상하는 가운데 영국은행은 자신이 직접 예금과 대출을 늘리는 것보다는 자신보다 규모가 작은 군소 은행들의 화폐 창조(예금-대출의 순환고리)를 규제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은행에 의한 화폐 창조는 간단한 일이므로 그것에 대한 통제 메커니즘 역시 간단했다.

18세기부터 런던에서는 은행으로 변신한 금 세공인이 창고에 금화나 은화를 쌓아놓고, 이것을 담보로 은행권(약속어음)을 발행해 대출에 사용했다. 영국은행은 군소 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을 매집한 뒤 기습적으로 군소 은행의 출납 창구에 은행권을 제시하며 금 태환(교환)을 요구했다. 유동성 위험이 커진 군소 은행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리베이트를 주고 상환을 연장하거나 비싼 이자를 주고 돈(금)을 빌려야 했다.

불리(bully)와 통화정책

당시 영국의 상업은행은 예금(금)을 수취하고 보관 수수료를 얻었고, 금고에 보관된 예금(금)을 바탕으로 은행권(종이)을 발행해 대출에 사용했다. 상업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금(화폐) 청구권을 의미했기 때문에, 상업은행이 대출 확대를 통해 은행권 발행량을 늘리면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가 많아졌다. 이처럼 상업은행이 대출을 통해 시중 유통 화폐를 늘리는 것을 경제학자들은 화폐 창조라고 부르는데, 경기가 과열되다 보면 상업은행의 화폐 창조 행위가 도를 넘는 경우가 있었다.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시장에서 경쟁이 격화되면 참가자들의 마진이 줄어들고, 참가자들의 마진이 감소하면 시스템이 불안정해진다. 그래서 영국은행은 도를 넘는 경쟁 은행들을 혼내줄 방법을 개발해 낸다.

영국은행이 보기에 상업은행들이 무리하게 사업(대출)을 확장하는 경우, 영국은행은 해당 상업은행에 대한 대출금을 회수하거나 해당 은행의 유가증권을 매각했다. 손절매를 통해 혼내 주는 것이다. 이 경우 상업은행은 영국은행에 대출금을 갚거나 유가증권의 대금을 지불해야 했고, 그 결과 상업은행이 보유하던 금은 자신의 금고에서 영국은행의 금고로 이전하게 된다.

따라서 상업은행은 자신의 예금자가 화폐(금)를 찾으러 왔을 때를 대비해 금고에 쌓아 두었던 금 준비금이 감소하게 된다. 이렇듯 오늘날 존경받는 중앙은행의 공개시장정책은 영국은행의 불리(bully·깡패 짓)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당시 상업은행은 고갈된 자신의 준비금(금)을 단골 은행(correspondent bank·상대방 은행)으로부터 빌려서 보충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은행들이 서로 급전을 주고받는 은행간시장(콜시장)의 기원에 해당한다. 당시 영국은행은 런던을 기반으로 하는 전국 규모의 상대 은행이었다. 영국은행은 다른 상업은행의 어음을 매입하면서 액면가보다 싼 가격에 할인 매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남대문 사채업자처럼 와리칸(わりかん)를 했던 것이다.

원래 일본어 와리칸은 더치페이를 의미한다. 사채업자가 어음을 매입하면서 원금의 일부를 떼고 적은 금액을 지급하는 것은 어찌 보면 신용 위험을 더치페이하는 것에 해당한다. 공교롭게도 영국은행의 와리칸은 대출 시장의 이자율을 통제하는 기능을 발휘했다. 영국인은 영국은행의 이자율에 대문자를 붙여 ‘은행이율(Bank Rate)’이라고 불렀는데, 훗날 이 제도를 수입한 미국인은 ‘재할인율(re-discount rate)’이라고 바꿔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경제 뉴스를 도배하는 ‘기준금리(base rate)’의 조상이다.

눈먼 자들의 왕

1824년 영국에 또 한 번의 투기적 광풍이 불었다. 이번에는 인간의 탐욕이 신앙심과 결합했고, 구약성서 ‘출애굽기’ 14장에 담긴 계시와 기적이 영국인을 매료시켰다. ‘이집트 파라오의 군대에 쫓겨 도망치던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바다 앞에 가로막혔다. 선지자 모세가 지팡이를 흔들자 바람이 불어와 홍해가 두 쪽으로 갈라졌고, 그 사이로 이스라엘 민족이 지나간 뒤 다시 지팡이를 흔들자 바다가 합쳐지면서 이집트 병사들이 몰살됐다.’ 영국인은 홍해 바다에 묻힌 보물을 꺼내 신앙심을 입증하기로 했다. 영국은행을 필두로 거의 모든 상업은행이 시대정신에 사로잡혀 보물 인양 사업에 뛰어들었다. 세계적인 투자은행과 중앙은행들이 미국의 부동산 투기에 정신을 못 차리고 휘말렸던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지혜로운 자 갤브레이스(Keneth Gabraith)는 우리의 시스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규제자를 규제하는 자는 누구인가? 눈먼 자들 사이에서 외눈박이조차 없을 때 맹인 세계의 왕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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