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들어선 전두환 정권…민심 잡으려 ‘0기 신도시’ 띄웠다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12. 10.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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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택지지구 개발사를 따라 걷다 (1)

‘1기 신도시 정비 특별법’ 통과의 청신호가 켜졌습니다. 올 3월 발의된 이후 9개월째 표류하던 이 법은 대통령과 여야의 공감대가 형성되며 국토위를 얼마 전 통과했고, 연내 처리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대부분의 언론보도에서 1기신도시 특별법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 법안의 정확한 명칭은 ‘노후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입니다.

1989년 4월 개발 이전의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 예정지의 모습(왼쪽 사진). 오른쪽은 1991년 일산신도시 아파트 건설 현장. [매경DB]
1기 신도시를 비롯한 노후계획도시는 단기에 공급이 집중된 고밀도의 주거단지로 자족성이 부족하고 주차난·배관 부식·층간소음·기반시설 노후화에 따라 정비에 대한 요구가 높은 상황입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현행 200% 안팎으로 제한되는 용적률이 최대 500%까지 올라가고, 안전진단 기준 등이 완화되어 재건축이 활성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1992년 분당신도시 조성 당시 성남시 분당구 한 아파트 건설현장의 모습. [국가기록원]
이 법의 대상은 택지가 조성된 지 20년이 지났고 면적이 100만㎡ 이상인 모든 지역입니다. 대략적으로 인구 2만 5000명, 주택 1만 호 내외인 곳입니다. 이에 따르면 분당과 일산, 중동, 평촌 등으로 대표되는 경기권의 1기 신도시 뿐 아니라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서울 내의 택지개발지구 곳곳도 대상지에 해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은 1기 신도시 이전 ‘0기 신도시’로 불리는 서울 택지지구의 개발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부동산 시장
1963년 8월 용산고등학교 교정에서 상도동 주택 입주자 공개 추첨이 진행되고 있다. 85동을 분양하는데 약 2천여 명이 몰려 23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 [서울역사아카이브]
근대화와 함께 전국 사람들이 수도권으로 집중하여 해방 이후 서울은 역사상 전례 없는 인구증가를 경험합니다. 1955년 157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1965년에 347만 명, 1970년에 585만 명, 1980년에는 837만 명까지 늘어납니다. 1965년부터 1980년까지, 15년간 서울 인구는 489만여 명이 증가했습니다.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1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증가한 셈입니다. 이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매일 224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인승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265t의 수돗물이 더 공급해야 하고, 1,340kg의 쓰레기를 처리할 여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지난 화에서 이렇게 급격히 증가한 인구에 따른 서울의 확장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1963년을 기점으로 서울이 두 배로 넓어졌고, 1971년에는 서울의 무한 팽창을 막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경기도와 접한 서울 외곽지에 방대한 면적의 그린벨트를 설정합니다. 그동안 서울의 성장은 개발제한구역 사이에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고, 또다시 개발제한구역을 넘어 시가지가 확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70년 4월 서울의 한 중산층 아파트 추첨 현장. 은행알에 숫자를 기입하여 추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서울시가 건설한 중산층아파트는 평균 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였습니다. 1970년대 전후반기 영동지구 개발이 본격화되며 부동산 투기가 성행하였고, 이로 인해 부동산 가격 상승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공무원과 건설업자 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모두가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던 시기였습니다. 여의도 아파트 시세가 평당 90만 원 선이었던 1978년, 미성아파트가 평당 58만원에 분양하자 경쟁률이 102:1을 기록했습니다. 청약예금제 도입 한 달 만에 청약예금 가입자가 3만 3000여 명을 돌파했습니다. 늘어나는 아파트 건설로 시멘트가 부족해 건축에 차질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서울시내 한 건설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대통령기록관]
1978년 8월 박정희정부는 부동산투기억제 및 지가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합니다. 흔히 8.8 조치라고 불리는 이 정책은 앞서 말한 부동산 과열로 주택보급이 어려워지고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등의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자 등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투기규제제역이 지정되었고 토지거래에 관한 허가 및 신고제가 도입되었습니다. 이 대책의 핵심은 양도소득세의 중과였습니다. 기본세율은 50%로, 미등기 전매 시 100%, 2년 내 단기 매도 시 70%로 세율이 조정되었습니다.

그해 말 이란의 석유수출금지에 기인한 제2차 오일쇼크는 석유 에너지 의존도가 높고 중화학 공업 위주였던 당시 우리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0% 내외의 성장률을 의존하던 우리 경제는 오일쇼크 이듬해 –1.6%의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끝을 모르고 오르던 부동산은 8.8조치와 오일쇼크발 경제 불황으로 찬물을 끼얹은 듯 급격하게 얼어붙었습니다. 20~30%씩 가격이 떨어진 아파트들이 속출했습니다.

1979년 11월 서울 중앙청에서 영결식을 마친 고 박정희 대통령 운구행렬이 세종로를 지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전두환정부가 등장했습니다. 쿠데타로 들어선 정권이었던 만큼 정권의 정당성을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어필하고 지지를 이끌어내야 했습니다. 침체된 건설경기에 어느 정도 훈풍을 불어넣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전두환정부는 ‘서민의 주거 안정’을 내세웁니다. 대규모 택지개발과 주택 공급을 골자로 하는 ‘주택 500만 호 건설’은 이 시점에 등장합니다.
‘주택 500만 호 건설’의 허와 실
1981년 3월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왼쪽 사진). 오른쪽은 이날 서울시청 앞 거리에서 열린 축하행사. [매경DB]
1980년 당시 전국 주택 총수는 약 530만 호였습니다. 현재 지어진 모든 주택의 총량만큼의 주택을 1981년부터 1991년까지, 11년 동안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81년부터 86년까지 공공과 민간이 각각 100만호씩, 200만호의 주택을 건설하고 87년 이후 공공이 100만, 민간이 200만호의 총 300만호의 주택을 추가로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택보급률을 기존 76%에서 10년 내 90% 수준까지 향상시키겠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1986년 이후 건설 계획은 상당히 추상적인데, 그 이유는 입안자들이 전두환 정권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해 정책을 구체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500만호 건설은 당시 우리 정부의 여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발표였습니다. 그래도 택지개발을 통해 상당한 양의 주택이 공급되었는데, 1987년까지 건설된 주택 수는 176만 호였습니다.

1980년 10월 2일자 매일경제신문. 택지개발 촉진 특조법(특별조사법) 제정과 주택 5백만 호 건설 발표와 관련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500만 호 주택건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0년 12월 ‘택지개발촉진법’이라는 법이 만들어집니다. 줄여서 ‘택촉법’이라 불리는 이 법은 도시계획에서 적용되는 주택법, 수도법 등을 비롯한 19개 법률이 규정한 결정이나 인허가, 면허 등의 권한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 법을 통해 공적 주체가 지가가 저렴한 녹지나 농지를 사전에 개발예정구역으로 지정, 매수하고 개발사업 계획 시 주거지로 변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대단위 토지를 저렴하게 확보하여 신속한 개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행해지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사업추진 이후 개발 이익이 사유화되는 것에 비해, 택촉법을 통해 개발되는 토지는 공공이 전면 매수하여 이익의 사유화 없이 공공부분으로 흡수된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습니다. 사실 이 법은 박정희 정부에서 토지수용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적 주체’는 바로 한국토지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공사는 제5공화국의 핵심과 끈끈한 관계였습니다. 두 기관의 수장으로 모두 전두환 대통령과 가까운 육군사관학교 출신 인물이 내정되었습니다. 택지지구 개발을 통해 이 두 기관은 빠르게 몸집을 불리게 됩니다. 일례로, 목동 택지개발 당시 평당 7만~8만원 사이로 토지를 수용한 한국토지개발공사는 후에 아파트를 지어 평당 105만원에서 134만원 사이로 분양합니다. 1981년 약 1,320억 원이던 한국토지개발공사의 자산총액은 4년 뒤인 1985년 약 1조1,150억 원으로 대략 10배 늘어납니다.

1983년 6월 촬영된 목동 신시가지 개발 전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나저나 토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어디에 주택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을까요. 1980년대 이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포함한 기존의 개발 사업으로는 급증하는 인구와 이로 인한 주택문제에 대응하기 어려웠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대량의 주택을 신속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택촉법을 통해 도시계획구역 내 녹지지역을 해제하고 이 안쪽의 대규모 미개발지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한국토지개발공사는 40개 주요 시 주변에 개발 가능한 택지를 조사하고, 총 1797개 지구, 약 1억 평의 토지를 찾아냈습니다. 이는 대부분 자연녹지나 생산녹지 등으로 토지가격이 낮아 개발이 용이한 곳이었습니다.
개포지구 입지별 용도 계획안. [서울시종합자료관]
1986년 4월 청량리에서 상계지구 아파트 모델하우스까지 무료버스가 운행하고 있다. [매경DB]
서울의 한정해서 본다면 개포지구, 고덕지구, 목동지구, 상계·중계지구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곳들은 개발제한구역 안쪽에 위치하고 넓은 택지를 가지고 있으나 인구 밀도가 낮아 대규모 개발에 용이했습니다.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상습 침수구역이라는 점도 공통점이었습니다. 개포동의 경우 양재천, 목동의 경우 안양천, 상계동의 경우 중랑천이 자주 범람해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개발 이전 이곳들은 천변을 따라 판자촌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ㅇ 권영덕 외 7인, 서울도시계획사 제3권 「1981~1995년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4」, 한울출판사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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