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명의 송년회 고백...노래방·건배사도 싫지만 최악은 ‘이것’

김성윤 기자 2023. 12.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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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직장인 송년회의 모든 것
일러스트=김영석

1차는 늘 고깃집이었다.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 ‘사이다(사랑을 이 술잔에 담아)’ ‘오바마(오빠가 바래다줄게 마셔)’ 같은 썰렁한 건배사가 이어지고 폭탄주가 돌았다. 막내들은 열심히 고기를 뒤집었다. 2차 노래방에서는 아이돌 댄스곡을 부르며 뻣뻣하게 춤추는 주니어들에게 폭소가 쏟아졌다. 마무리는 부장님의 애창곡 ‘마이 웨이’. 노래가 끝나면 점수와 관계 없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쳤다.

“내 길을 가겠다”는 부장님을 택시에 태워 보내드렸다. 일부는 눈치 보며 슬쩍 사라지지만, 대개는 3차 호프집으로 향했다. 얼큰하게 취한 김 차장이 평소 감정이 쌓인 이 과장에게 “그 따위로 일하면 되느냐” 따위 훈계를 한다. 결국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두 사람. 가까스로 떼어내 강제 귀가 조치를 하며 부원들은 생각했다. ‘올해도 이렇게 한 해를 마감하는구나.’

2019년까지 연말 송년회 풍경은 이랬다. 소속 부서, 거래처, 동호회, 동창회 등에서 모임이 이어졌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며 송년회는 사라졌다. ‘줌 송년회’ ‘랜선 송년회’ 등 비대면 송년회로 아쉬움을 달랬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속으로 반긴 이들도 있었다. 의무적으로 참석하지 않아도 되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고, 건배사를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라는 직장인도 상당수였다.

코로나가 끝난 지금은 어떨까. ‘아무튼, 주말’은 SM C&C 플랫폼 ‘틸리언프로’에 설문조사를 의뢰했다. 20~50대 남녀 2007명이 응답했다. ‘송년회를 하지 않았거나 않을 예정’이란 직장인이 절반에 가까웠다. 송년회 시간으로는 저녁이 점심을 압도했다. 송년회에서 제일 싫은 건 ‘음주’ ‘가무’ ‘건배사’를 제치고 1위에 오른 ‘훈계’였다.

◇직장인 절반은 송년회 안 한다

설문 응답자 2007명 중 직장인은 1494명. 이 중 ‘올해 송년회를 한다’는 응답은 771명으로, ‘하지 않는다’(723명)와 비슷했다. 직장인 약 절반은 올해 송년회를 하지 않았거나 안 한다는 뜻이다. 소규모 패션 업체에 다니는 김영숙(38·가명)씨는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던 시기에는 회사에서 송년회를 하지 않았다”며 “처음엔 아쉬울 줄 알았는데 송년회로 인한 스트레스나 피로가 없어 오히려 모두들 반겼다. 올해도 안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송년회를 하느냐 마느냐는 업종에 따라 크게 갈렸다. 의료기기 업체에 다니는 김연경(40·가명)씨는 “지난해 연말부터 송년회가 복원됐다”고 했다. “이쪽이 워낙 남초(男超)에다 보수적인 업계잖아요. 다음 주에 부서 송년회가 있는데, 1차 고깃집에 이어 2차 노래방, 3차 호프집까지 전형적인 3종 세트예요. 건배사와 폭탄주는 당연하고요(웃음).”

송년회를 하는 시간은 저녁(85%)이 점심(15%)보다 우세했지만, 속마음은 꽤 달랐다. 선호도를 묻자 저녁 61%, 점심 39%로 조사됐다. 여성 응답자들의 선호도는 점심(50%)과 저녁(50%)이 반반이었다. 반면 남성들은 저녁(73%)을 점심(27%)보다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대별로도 차이가 났다. 20대에서는 점심 시간 송년회 선호도가 57%로 저녁을 이겼다.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저녁 시간 송년회 선호도가 높아졌다. 50대는 저녁을 선호한다는 응답이 72%에 달했다.

아들 둘을 키우는 워킹맘 최모(38)씨는 “남녀 차이는 육아 탓”이라고 했다. “똑같이 직장에서 일하더라도 아빠들은 엄마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잖아요. 같은 여성 직장인이라도 연령대가 높아지면 아이가 커서 저녁 회식을 덜 기피할 것 같고요.”

그래픽=송윤혜

◇이색 송년회 싫어, ‘클래식’이 좋다

고깃집에서 폭탄주를 돌리는 대신 영화나 공연을 보는 ‘문화 송년회’,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참석하는 파티, 클럽을 빌려서 하는 테마 파티 등 이색 송년회가 한때 유행했다. 하지만 이번 설문조사는 고전적 송년회의 여전한 인기를 증명했다.

송년회 장소를 묻자 고깃집 등 ‘식당’(88%)이 ‘영화관’(8%)이나 ‘공연장’(4%)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기업 유통 계열사에 다니는 송모(37)씨는 “송년회도 역시 ‘클래식’이 최고더라”라며 웃었다. “회사에서 신경영이니 젊은 이미지 구축이니 하며 술 마시지 않는 문화 송년회를 권장한 시기가 있어요. 영화관도 가고 뮤지컬 관람도 해봤지만, 회사에서 단체로 하는 일은 결국은 ‘업무’더라고요. 그럴 바에야 고기 굽고 술 취하면서 평소 하지 못하는 속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다는 겁니다.”

송년회에 ‘2차도 예정돼 있냐”는 질문에는 ‘없다’(41%)였다. ‘있다’(29%)와 ‘모른다’(30%)를 앞섰다. ‘2차를 하고 싶은가’ 묻자 ‘하고 싶지 않다’(65%)가 ‘하고 싶다’(35%)보다 훨씬 높아서, 하더라도 1차에 끝난다는 송년회 트렌드를 반영했다. 공기업 팀장 염모(50)씨는 “우리 부서는 점심에 송년회를 하고 당연히 2차는 없다”며 “2차 노래방, 3차 호프집을 그리워하는 직장인은 시대착오”라고 했다. 다만 이번 설문조사에서 남성은 2차를 ‘하고 싶다’(46%)와 ‘하고 싶지 않다’(54%)가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여성들은 ‘하고 싶지 않다’(76%)가 ‘하고 싶다’(24%)보다 훨씬 많았다. 2차를 할 경우 여성들은 술집(32%)보다 카페(46%)를 더 선호한다고 답했다.

◇송년회에서 훈계는 금물

많은 직장에서 송년회 참석은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바뀌고 있다. IT 기업에서 일하는 정훈기(49)씨는 “파트 송년회는 곱창집에서 하고 팀 송년회는 영화 ‘서울의 봄’을 단체 관람하고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씩 마시며 했다. 자율 참석이라 전체 팀원 중 3분의 2만 왔다”고 했다. 이번 조사에서도 ‘직장 송년회 참석이 의무인가’ 묻자 ‘예’(44%)보다 ‘아니요’(56%)가 많았다.

근본적인 질문도 있었다. ‘송년회를 하고 싶은가’ 묻자 남녀 전체 응답은 ‘하고 싶다’(48%)가 ‘하고 싶지 않다’(52%)보다 낮았지만, 남성 응답자들은 ‘하고 싶다’(61%)가 ‘하고 싶지 않다’(39%)보다 우세했다. 반면 여성들은 ‘하고 싶지 않다’(65%)가 ‘하고 싶다’(35%)를 앞질렀다. 지난해 모 그룹사에 입사한 박병채(31·가명)씨는 “취준생으로 궁핍하게 살면서 꿈도 꾸지 못하던 고급 식당에서 송년회를 하더라”라며 “내 돈 주고 사기 힘든 소고기 먹으며 좋은 술 마시는 게 솔직히 즐겁다”고 했다.

송년회의 스트레스로는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 장기자랑, 업무 성과 이야기, 상사의 훈계 등이 꼽힌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훈계’(38%)가 ‘가무’(23%) ‘건배사’(20%) ‘음주’(19%)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여성보다 남성이, 또 나이가 들수록 훈계를 싫어했다. ‘훈계가 가장 싫다’는 응답은 20대 24%에서 30대 35%, 40대 41%로 차츰 올라가다가 50대에서 45%로 극점을 찍었다. 반면 20대 응답자들은 건배사(28%)와 가무(28%)를 훈계보다 더 싫어했다. 건설회사 부장 조태성(53·가명)씨는 “회장님 이하 임원들과 부장급 송년회에서 지적을 받으면 ‘이 나이에 아직도 훈계를 들어야 하나’ 싶어 짜증이 난다”고 했다.

망년회(忘年會)란 말은 일제 잔재라 하여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조선 시대에도 망년(忘年)이란 말이 있었다. 일본에서 망년은 ‘일년 동안의 노고를 모두 잊는다’지만, 우리는 ‘나이를 잊는다’ ‘나이 차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인문학자 박상표씨에 따르면, 고려 무신정권에서 살아남은 문신들이 ‘망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의미였다. 송년회 때 연장자 혹은 선배로서 가르치려 들기보다, 나이 차이를 잊고 뜻을 공유하는 직장 동료로 서로를 대하면 어떨까. 송년회 스트레스를 줄이는 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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