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부른다’ 속설에 은행마다 달력 대란…중고플랫폼 사고팔고

남지현 2023. 12. 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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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고객 많은 지점에선 줄서서 받기도
제작물량 20% 감소에도 찾는 이는 늘어
한 농협은행 지점 출입문에 달력 배부 종료 안내문이 붙어있는 모습. 엑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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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거주하는 직장인 ㄱ(39)씨는 지난 4일 오전 반차를 내고 은행 업무를 보러 집 근처 한 시중은행 지점을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월요일 오전이라고 해도 은행에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ㄱ씨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청원경찰이 그에게 다가와 “달력 받으러 오셨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ㄱ씨는 “달력을 배부하는 창구를 따로 두고 직원이 셋이나 붙어서 나눠주는데도 대기자가 50명대에서 줄지를 않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연말을 맞아 은행에서 나눠주는 무료 달력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은행 지점이 북적이고 있다. 은행 달력이 재물복을 준다는 속설에 젊은 층도 가세했다. 지점에선 연례행사 치르듯 매년 11월 중순께부터 달력을 배부하기 시작하는데, 최근 2∼3년 사이 달력 물량이 급격히 줄면서 일부 지점에선 품귀현상까지 빚어지는 상황이다.

인기 가수 아이유 사진이 들어간 우리은행의 2024년 신년 달력. 당근마켓 갈무리

물량은 적은데 찾는 이가 늘자 달력을 구하러 왔다가 헛걸음하는 이들이 많다. 경기도 하남시에 거주하는 전업주부 ㄴ씨(43)씨는 지난 1일 온라인 맘카페를 통해 미사역 인근에 있는 한 시중은행 지점에서 이날부터 달력을 나눠준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후 1시께 이 지점을 찾았다. 하지만 문 앞에 ‘달력이 조기 소진되어 배포를 종료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영업 시작 후 약 4시간 만에 물량이 동난 것이다.

최근에는 종이 달력을 찾지 않던 젊은 층 사이에서도 재테크 열풍과 함께 시들하던 은행 달력 인기가 되살아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은행 달력이 돈을 부른다는 속설에 종이 달력을 쓰지 않던 젊은 층 중에서도 달력을 구하려는 이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7일 한 시중은행 지점 관계자는 “보통 종이 달력은 어르신들이 많이 찾으시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은행 달력을 걸어두면 재물운이 들어온다는 속설 때문인지 젊은 분들도 찾는 분들이 좀 늘었다”고 했다.

온라인 중고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에서 은행 달력이 판매되고 있는 모습. 번개장터 누리집 갈무리

오프라인에서 달력을 구하지 못하자 온라인 커뮤니티와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은행 달력을 찾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은행 3곳을 돌아다녔지만 허탕을 쳤다”는 사람부터 “남는 달력 좀 나눠달라”거나 심지어는 “은행 달력을 구매하고 싶다”는 이들도 있다.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 등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이미 은행 달력이 3천원에서 2만원대까지 판매되고 있다. 특히 인기 가수 아이유 사진이 들어간 우리은행 달력이 인기가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착순 배포를 원칙으로 하는 은행 지점도 늘었다. 경기도 파주시의 한 시중은행 지점에선 지난 4일 하루 동안 선착순으로 1명당 1부씩만 달력을 배부했다. 우리은행과 하나은행 등은 아예 자체 모바일 앱을 통해 달력 신청을 받기도 했다.

은행원들은 고충을 토로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연말에는 결산도 해야 하고 업무가 많은데, 하루에 달력 문의 전화만 20통씩 오는 때도 있다”며 “수량 제한이 걸려 있는 탓에 한 부밖에 드리지 못한다고 안내 드려도 더 달라고 하거나 소동을 부리는 경우도 있어 달력 배부 시즌만 되면 ‘또 그 시즌이 왔구나’ 한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벽걸이 달력이 중고거래 앱 당근마켓에서 거래되고 있는 모습. 당근마켓 갈무리

이런 소동이 벌어진 데에는 최근 은행들이 달력 제작 물량을 급격히 줄인 탓도 크다.

케이비(KB)국민·신한·하나·우리·엔에이치(NH)농협 등 5대 은행이 올해 제작해 배포한 2024년 신년 달력은 모두 약 635만9천부로, 4년 전인 지난 2019년(790만6천부)에 제작한 물량에 비해 19.6%(약 154만7천부)가량 감소했다. 2021년(590만2천부)과 2022년(590만3천부)에 제작 물량이 크게 줄었다가 올해 소폭 늘었다. 서울 시내 한 시중은행 지점 직원은 “원래 10박스 정도 들어왔는데 최근 2∼3년 사이에는 6박스 정도로 줄어서 못 받아 가시는 분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은행들은 모바일 캘린더 사용이 늘며 종이 달력에 대한 수요가 과거 대비 줄었고, 환경 보호 등 이에스지(ESG) 경영의 중요도가 커지는 상황에서 종이 달력 제작 물량을 늘리기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제작하고 있기는 하지만, ESG 경영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환경 보호에 역행하는 종이 달력 제작을 무작정 늘리기는 곤란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남지현 기자 southj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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