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78> 인간 등정의 발자취-제이콥 브로노우스키(1908~1974)

서부국 서평가·‘고전식탁’ 저자 2023. 12. 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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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2000년 현생인류史 역추적…“인간성 없인 철학도 과학도 없다”

- 40대 수학자 시절 의뢰 받은
- 200만 년 전 유아 머리뼈 분석
- 저자, 문명史 파헤치기로 결심

- 동굴벽화부터 농경·수학·천문
- 상대성이론과 진화론·물리학 등
- 인류 과학적 진화 경외하면서도
- 과학의 한계 또한 정확히 지적
- 인간성 중시하며 균형 강조해

1장을 읽자마자 엉뚱한 생각이 인다. ‘이성에게 구애할 때 ‘이벤트’도 하지 않는 호모 사피엔스(♂)는 물고기보다도 못한 종(種)인가!’ 만월 때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졸라 해안 모래에서 춤추며 수정하는 물고기 색줄멸(grunion)을 다룬 얘기가 나온다. 단상이 어째 유치하다.

이 어종을 캘리포니아주 인디언이 잘 알았다. 색줄멸 암컷이 한사리(음력 보름과 그믐 무렵에 밀물이 가장 높은 때) 수위(水位)선 모래 속에 알을 낳으면 수컷은 주변에서 구애하는 춤을 추다가 수정한다. 모래 속 수정란에서 9~10일 지나면 새끼가 나온다. 다음 한사리때 새끼는 바닷물을 타고 대양으로 흘러든다. 색줄멸은 수백만 년간 진화를 거쳐 물때에 맞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물고기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질문에 답하는, 1973년에 출판돼 고전이라기엔 젊지만, 곧 고전이 될 책이 ‘인간 등정의 발자취’다. 역대로 대작을 지은 저자가 출간 후 눈을 감는 사례가 많았다. 브로노우스키도 이 책을 펴내고 1년 후 고인이 됐다.

뉴튼은 숫자와 기하로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기계론적 우주관에 일부 예술가는 반감을 보였다. 영국 화가 월리엄 블레이크가 그린 ‘아이작 뉴턴’(1795년)은 그런 시선으로 처리한 그림. 뉴턴이 콤파스를 놀리며 작도에 몰두하지만 그게 뭐가 대단하냐는 조소를 표현했다.


▮인류 탄생에 맞춘 1장

1장(‘천사 아래 있는 존재’)은 인류가 탄생한 동아프리카에 초점을 맞췄다. 40억 살인 지구에서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라틴어로 ‘슬기로운 사람’)가 겪은 여정을 보여주려고. 이 여정은 ‘등정(ascent)’이다. 직선로가 아니라 굽이굽이 산봉우리를 넘어왔다. 유인원 조상에서 갈려 나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룬 현생인류가 1만2000여 년간 남긴 발자취를 역추적한다.

계기가 절묘하다. 40대 수학자였던 저자는 남아공 타웅에서 파낸 200만 년 전 어린이 머리뼈 화석(오스트랄로피데쿠스)을 연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수학자에게 웬 화석 분석, 하겠지만 그는 위상 수학 전공자. 컴퓨터 그래픽으로 사물 형상을 그려낼 수 있다는 걸 고고학계는 알았다. 이 화석 이빨을 분석해 유인원 그것과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라는 주문. 그 일을 해냈고, 격동을 느꼈다. “돌연 내 (수학) 지식이 200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 인류 역사에 탐조등을 비추는 걸 보게 됐다.” 그 후 ‘인간다워지는 요인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손에 쥐었다.

초식 동물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생인류가 되기까지 200만 년이 걸렸다. 저자에겐 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마저 경이롭다. 그들은 대개 20세 전에 죽어 고아가 많았을 거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무리가 고아를 걷어 들여 구성원으로 가르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인류가 문화적 진화를 향해 내딛는 큰 걸음!”

구석기 유적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로 시선을 돌려 그걸 그린 사냥꾼이 품었던 마음을 헤아렸다. 아! 인간성. 미래 일을 미리 아는 힘, 선견력(先見力)을 봤다고 썼다. 벽화를 남긴 힘. 중앙아프리카에서 처음 나온 새카맣고 작았던 현생인류가 직립 보행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불을 얻어 빙하기에서 살아남고, 그 후 세계 각지로 이동한 인류사는 잘 알려진 얘기다. 단, 모르는 게 없는 르네상스인 브로노우스키가 설명하면 처음 듣는 듯 흥미진진하다.

2장 ‘계절의 수확’. 무대는 문명 발상지 중 한 곳인 근동(近東)으로 바뀐다. 채집·유목에서 농경·정착으로 인류 생활이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떠도는 삶은 변화가 없다. 지금도 까마득한 조상처럼 유목하는 페르시아 바크티아리족을 보라. 유목은 전쟁이란 강탈 행위를 불렀다. 유목민은 생산하지 않거나, 못하는 물자를 얻으려고 정착 지역을 쳐들어갔다. 몽골족이 그랬다. 하지만 약탈과 전쟁은 영구히 지속하지 못한다. 유발자들은 결국 정착을 선택한다. 칭기즈칸은 약탈하며 떠돌았지만, 5대 후계자인 올제이투 칸은 새 수도를 페르시아 술타니예에 조성하고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3장(‘돌의 결’)은 손이 인간 진화를 얼마나 힘차게 밀었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손을 ‘정신의 칼날’이랬다. 벤저민 프랭클린도 1778년 인간을 “도구를 만드는 동물”로 불렀다. 정신은 돌이 지닌 결을 읽어내고 손을 시켜 석조 건축물을 빚었다. 미 애리조나주 첼리 협곡에 들어선 푸에블로 인디언 유적, 페루 안데스산맥 동쪽인 우루밤바 계곡에 세워진 마추픽추, 남부 이탈리아 파에스툼에서 볼 수 있는 포세이돈 신전, 스페인 세고비아에 위치한 2층 반원형 수로들, 프랑스 노트르담 랭스 대성당은 손이 일군 역사(役事). 이면 얘기도 솔깃하다. 잉카 제국이 군주 1인 체제여서 쉽게 무너졌다는 설명, 잉카와 그리스에 없던 저하중 아치 공법이 민간 기술로 로마에서 싹 텄다는 식견이 그러하다. 이탈리아인 시몬 로디아가 미국 LA에 세운 ‘와츠 타워스’. 33년간 타인 도움 없이 주변 잡동사니를 모아 과학 장비 없이 완공했다며 저자는 감탄한다. “손은 위대하다.”

이곳이 인류 기원지. 북부 케냐와 서남 에티오피아에 걸친 루돌프(투르카나) 호수로 오모강이 흘러든다. 오모강 골짜기에서 인류 역사가 시작됐다.


▮인간성 없는 올바른 과학은 없다

4장(‘숨겨진 구조’)은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를 다뤘다. 불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다. 물질을 변형하고, 청동·강철 같은 합금을 만드는 ‘화학의 시대’를 열었다. 거기서 파라셀수스, 조지프 프리스틀리, 앙투안 라부아지에, 존 돌턴을 만난다.

5장 제목은 ‘천구(天球)의 음악’. 시구 같다. 한때 1, 2, 3 같은 정수는 자연계의 언어였다.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이 천구상에서 등속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는 음악과 수가 맺는 관계를 알아본 수학자. 화음은 정수가 만드는 소리. 현악기 줄을 정확히 등분해 울리면 아름다운 소리, 화음을 낸다. 한동안 수(數)가 세계를 지배하며, 그게 자연법칙. 그게 다는 아니었다. 후대 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1000여 년 건재한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비등속 타원 운동’으로 바꿨다. 17세기엔 시간이 새 수학 변수가 나왔다. 자연을 움직이는 과정으로 다루게 됐다.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발견한 미적분학이 그것 중 하나였다.

6장 제목 ‘별의 사자(使者)’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책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망원경을 유행시킨 후인 1610년 펴낸 이 천문관측 서적에서 새 행성을 4개(목성 위성) 발견했다고 썼다. 7장 ‘장엄한 시간 장치’는 아이작 뉴턴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진 과학계에 생긴 변화를 보여준다. 고전 역학 뒤를 시간으로 물질계를 보는 상대성 이론이 버티고 섰다. 자연을 읽는 새로운 틀이었다.

8장 ‘동력을 찾아서’는 자연에서 에너지원을 찾는 여정을 담았다. 시선을 영국 산업 혁명에 맞췄다. 운하에서 철도에 이르는 과학사다. 물레방아 바퀴를 개선한 제임스 브린들리, 피뢰침을 발명한 벤저민 프랭클린, 주철 산업가인 존 윌킨슨, 에너지 보존 법칙을 다진 제이스 줄이 등장한다.

9장 ‘창조의 사다리’는 자연 선택에 따른 진화론(찰스 다윈, 앨프레드 러셀 윌리스)과 그 생명체를 네 염기(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 같은 분자 화학식으로 표시하게 되는 여정을 훑었다. 생명 기원을 밝히는 유명한 실험들이 나온다. 스탠리 밀러는 방전 환경 아래, 레슬리 오르겔은 냉각 상태에서 유기물질을 만들어 내는 장면이 생생하다.

10장 ‘세계 속의 세계’는 원자 얘기라는 것을 직감케 한다. 고대 그리스 과학은 원자를 더는 쪼갤 수 없다고 확신했지만, 현대 물리학은 원자 껍질을 열고 지금까지 누구도 가보지 않은 세계로 들어갔다. 11장(‘지식과 확실성’) 12장(‘이어지는 세대’) 13장(‘긴 유년시대’)은 현대 과학은 모든 걸 이해하고 보여줄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며, 인류가 가야 할 길을 밝혔다.

어떤 길일까. 저자가 역설하는 문장 중 하나. “인간성 없이는 철학이 있을 수 없고, 나아가 올바른 과학도 존재할 수 없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나온 물을 바다에 버린다. 저자가 내세운 과학철학을 비웃는 행위다. 과학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게 맞나. 바다를 해칠 듯하고, 꺼림칙하게 여기는 인간 마음을 ‘과학’을 내세워 무시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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