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8. 하모니카 시인, 허림의 마중 이야기

김진형 2023. 12. 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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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선율 시의 운율, 내면에서 만나다
홍천군 내면 보호 산림생태관리원 재직
아버지 잦은 전근 방과후 악기연주 관심
산 속 자연소리 조화 하모니카 즐겨 불어
신춘문예 시 당선·강원문화예술상 수상
시집 11권·산문집 1권 소중한 옛말 기록
▲ 창밖을 내다보는 허림 시인. 시인의 시집과 산문. 시인의 오막 근처에 흐르는 내린천.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허림 시인. (사진 왼쪽부터)

허림.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순수하고 외로운 시인 중 한 사람이다. 내가 이제까지 만난 사람 중에 그는 가장 깊은 곳에서 살아가는 시인이다. 한 줌 햇볕이 고요히 스며드는 오막 단칸방이 그의 방이다. 그는 전기밥솥에다 밥을 안쳐놓고 잠시 작은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내다본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눈이 내리고 땅거미가 지고 겨울 숲이 하얗게 운다. 이 창의 액자는 시시때때로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밤새 글을 쓰다 잠이 들면 어머니 꿈을 꾼다.

아침이면 그는 직장으로 간다. 홍천군 내면 전체가 그의 직장이다. 공식직함은 산림생태 관리원이다.

그는 주로 홍천군 내면의 유전자원보호구역을 관리한다. 유용식물인 헛개나무나 월귤나무, 대악산 한계령풀 등을 살핀다. 불법 입산에 대한 계도는 물론 시설물관리와 정화작업도 한다. 내면 미약골, 상대재와 내촌 어사리덕 등이 허림 시인이 관리하는 지역이다.

시인은 외지에 볼일 보러 나갔다가 귀가할 때면 ‘내면에 든다’고 말한다. 그 말이 시인은 마음에 쏙 든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배낭에서 하모니카를 꺼낸다. 동요 ‘고향생각’, ‘나뭇잎배’, ‘반달’, ‘섬집아기’ 등이다. 하모니카 소리는 나무와 나무의 숲에 요정처럼 흘러들고, 개울물 소리, 새소리와 화음을 이룬다. 꽃도 풀도 바람에 저절로 흔들린다. 산이 온통 하모니카의 메아리가 된다. 그러다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면, 자신보다 덜 바보 같은 애인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쓴 시가 ‘광고’이다.



‘그대 기다린다’는 광고를 내러 가야겠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꽃을 보고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쓰겠다.

“왜 기다리냐”고 묻는다면,

말없이 꽃 한 송이 들어 보이겠다.



마치 가섭의 미소처럼 꽃은 시인의 내면을 드러낸다. 시인의 내면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허림 시인은 내면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렸을 때 그는 내면 초등학교 관사에 살면서 율전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이후 홍천 관내 노천, 월운초등학교를 거쳐 내면 원당초등학교에서 6개월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아버지의 잦은 전근은 어린 허림을 외톨이로 만들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책을 보거나 교실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풍금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러 풍금 소리를 듣곤 했다. 리코더며 멜로디언이며 하모니카 등, 거기에 있는 모든 악기를 다 만져보았다. 허림 소년은 나름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내면엔 악보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1973년 내면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사고로 오른손을 다쳐 엄지손가락을 잘랐다.

내가 서석면에 도착했을 때, 허림 시인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사실 나의 고향은 서석과 붙어있는 내촌면 물걸리이다. 나는 허림 시인을 만나기 위해 고향을 지나온 것이다.

허림 시인의 ‘마중’이란 시는 그리움이란 꽃을 피운다.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이 시는 가곡으로 작곡되어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애창하는 곡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림을 ‘마중 시인’이라 부른다. 시인이 모는 차 안에서 그가 내게 말했다.

“엊저녁엔 올해 첫눈이 내렸어요.”

서석면에서 내면으로 향하는 하뱃재 고갯길을 넘을 때였다. 나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계방산은 온통 흰 눈이었다. 여기 고갯마루에 오르면, 계방산이 저를 마중 나옵니다. 그렇게 말을 끝낸 시인은 내리막길로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



오막은 내린천을 바라보는 곳에 있었다. 단 한 채의 집이 고즈넉했다. 저녁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성냥갑 같은 집은 벌써 그늘을 드리웠다. 그만큼 계곡이 깊었다. 단칸방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방안은 시인의 웃음처럼 아늑했다. 네모 난 방 둘레로 싱크대와 냉장고, 세탁기, 전축과 스피커,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이 살기엔 넓지도 좁지도 않게 알맞았다.



제 신간 시집입니다.

허림 시인은 <다음이라는 말> 속표지에다 최돈선이라 쓰고 시 한 줄을 썼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전화를 합니다.



시인의 저 깊은 내면에 아버지가 있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외롭고 그리울 땐 아버지와 오랜 통화를 하는구나. 사실 아버지로 하여 허림은 내면으로 들어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이젠 내면의 말들을 모아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어쩌면 숙명 같은 거였다. 허림이 ‘거기 내면’에 또 하나의 아버지로 우뚝 서 있었다. 얼마 전 시인의 아들이 다녀갔다 했다. 그 아들도 아버지가 될 터였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어 훗날 긴 통화를 나눌 거였다.

산은 그렇게 긴 메아리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다음이란 말’의 시집을 들고 나는 오래오래 바깥의 바람소리를 들었다. 다음…, 그래 그건 연속성이지. 그리움이고 만남이고 헤어짐, 그래서 그 무어든 소식이 그립지.

시 한 구절엔 ‘다음이란 말이 기약 없이 화두처럼 따라온다’ 했다. 시인은 ‘절 마당에 떨어진 꽃잎이 바람 따라가는’ 모습을 보며 생의 돌아가고 돌아옴을 깨닫는지도 몰랐다.



허림 시인은 자신이 지은 시집과 산문집을 방바닥에다 모두 깔았다. 제목만 보아도 아름다운 말의 시였다. 그것은 한 줄의 뭉클한 음계였다.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일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말주머니’, ‘엄마 냄새’, ‘거기, 내면’ ‘누구도 모르는 저쪽’, ‘골말 산지당골 대장간에서 제누리 먹다’, ‘보내지 않았는데 벌써 갔네’, ‘다음이라는 말’.

이 열한 권의 시집이 허림의 생이었다. 모두 홍천 이야기이고 내면의 말들이었다. 그의 또 하나의 책 ‘400리 홍천강 물길을 따라’에는 보석 같은 옛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도 마찬가지다. 마치 백석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다. 말의 감칠맛과 웅숭 깊은 속뜻을 헤아리면서 지명에 얽힌 향토사를 우린 궁구하여 읽게 된다. 허림 시인은 시인이면서 또 하나의 소중한 향토 언어학자이다. 그의 말광은 그래서 더없이 귀하고 값지다.



선생님, 이거 보세요. 제 보물이에요. 허림 시인은 벽 모퉁이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방바닥에 펼쳐놓았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었을 때의 기록들, 여동생의 스크랩, 자신과 아이들이 공부했던 옛날 교과서들이 과거의 냄새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내 어린 시절의 아득한 냄새가 여기 있었다. 그래, 이것들이 시인의 말이 되고 힘이 되었구나. 누구나 아이였었다. 나는 아득한 옛날, 그때의 교실과 선생님과 아이들을 떠올렸다. 정겨운 동무들의 재잘거림이 귓전을 울렸다.



강릉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시인은 1988년 올림픽이 있던 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그해 시월 결혼하고 딸과 아들을 두었다. 2012년 아내와 이별했다. 그동안 문구사, 글짓기학원, 칼국수집 등을 운영하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수원 송원초등학교에서 영어 전담교사로 일하다 홍천 내면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가슴 속에 쟁여둔 시의 말이 술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1권의 시집이 쌓여갔다. 2020년엔 강원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허림 시인은 오늘도 배낭을 메고 겨울산을 누빈다. 오래 숙성된 말들이 산에서 자란다. 이따금, 깊숙이 숨어있는 집들의 푸른 연기가 정겹다. 잠시 그루터기에 앉아 하모니카를 분다. 그게 저만치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부른다. 그 꽃이 벙글면서 메아리로 시인을 따라 부른다.



시인의 내면은 어느새 봄이란 꽃이름으로 이미 거기 서 있다. 시인의 마중은 그래서 늘 그리움이 묻어난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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