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9. 여주 명성황후기념관

경기일보 2023. 12. 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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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편지·고종 어필 편액·여흥 민씨 족보 등 137점 소장
왕비 간택 1866년 병인양요·원자 출산 1871년 신미양요
‘풍전등화’ 조선과 함께한 왕비이자 아내이자 어머니
서울서 옮겨온 ‘감고당’ 개방… 교육 공간 활용

여주시는 예부터 풍요로운 고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여강’으로도 불리는 남한강변의 신륵사, 남한강 푸른 물줄기를 굽어보기 좋은 파사산성,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영릉(英陵)과 북벌 대의를 세운 효종의 영릉(寧陵), 아름다운 부도를 간직한 고달사지 등 유적과 유물도 풍성하다. 여주시에는 미술관과 박물관도 여럿이다. 박물관협회에 등록된 것만 해도 명성황후기념관을 비롯해 목아박물관,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여성생활사박물관, 여주곤충박물관, 여주미술관, 여주박물관, 경기도생활도자미술관, 여주시립폰박물관, 옹청박물관, 죽포미술관까지 11곳이나 된다.

선이도는 조선 왕실 계보를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으로 표시했고, 전국에 위치한 왕릉을 표기함으로서 왕실의 역사와 영향력이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고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윤원규기자

■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느끼는 공간

여주시 명성로 71(능현동)에 있는 명성황후기념관은 2017년 개관했다. 기념관에는 명성황후 편지, 고종 어필 편액, 여흥 민씨 족보 등 137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9월 개관한 특별기획전 ‘선이도에 담긴 조선왕실과 여주’가 내년 6월까지 진행된다. 태조의 어진을 백두산에 배치한 조선전도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선이도(仙李圖)’는 무엇일까? 한자를 봐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한혜원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조선 왕실의 계보를 지도 모양으로 그린 것입니다. 태조부터 순조까지 재위한 순서대로 왕과 부인의 성 및 이름, 왕릉의 위치를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울창한 나무로 묘사해 조선 왕실이 번성했음을 보여줍니다. 제작한 곳이 나와 있지 않지만 전주 이씨 집안에서 만들어져 배포된 것으로 보입니다. 선이도를 펴낸 1930년대에 전국 곳곳에서 문집과 족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조상과 뿌리는 잊지 않겠다는 각오로 보입니다.” 물론 선이도에 여주가 여러 번 등장한다. “세종대왕의 이름은 도이며 영릉은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다.” 제복을 갖춰 입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부자가 함께 찍은 1900년대 우편엽서가 눈길을 끈다. 어린 시절의 영친왕, 순종황제와 순종비, 영친왕(의민황태자) 셋이 등장하는 엽서도 있다. ‘낙선재’ 글자를 새긴 조선백자의 중앙에 오얏꽃, 둘레에는 학을 그려 황실에서 사용한 접시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1897년 10월14일자 ‘독립신문’ 논설문의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다. “구습과 잡심을 다들 버리고 문명 진보하는 애국 애민하는 의리를 밝히는 백성들이 관민 간에 다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비노라.”

고종, 순종이 기억하는 명성황후 등 시간에 따라 명성황후의 삶과 인간미를 볼 수 있는 전시장. 윤원규기자

■ 여성, 아내, 어머니로 만나는 명성황후

명성황후 연표는 19세기가 얼마나 격동의 시대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민자영이 왕비로 간택됐던 1866년 병인양요, 첫 원자를 출산한 1871년에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남편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던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다. 이어 일어난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은 그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준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결정은 최악이었다. 결국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은 이듬해인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명성황후의 뛰어난 재능과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유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종과 명성황후가 이범진에게 내린 천운(川雲)이란 당호 글씨를 비교하며 두 사람의 성품을 짐작해 본다. 1885년 정월 보름에 쓴 명성황후의 글씨는 큼직하고 시원하다. 명성황후의 한글로 된 어찰 20장을 한데 모은 책도 있다. 이모(한산 이씨)에게 답장한 이 편지는 명성황후의 부드럽고 정겨운 면모와 단호하고 냉철한 면모를 함께 보여준다. 그가 정갈하게 써 내려간 궁서체의 한글 편지를 살펴본다. “글씨 보고 야간 잘 잔일 든든하며”는 무슨 말일까? “그것은 ‘편지를 보고 밤에 잘 자서 든든하고’란 뜻입니다. 항상 이 구절로 시작하는 명성황후의 편지에는 임금과 아들 동궁의 안부도 같이 전하고 있지요. 왕비이기 전에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편지로 지난해에 특별전을 열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기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랐다. “밤에 어머니가 궁에 오셨는데 잠이 깊이 들어 뵙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을 전하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에게 어머니는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두통과 소화불량 등 질병을 호소하는 내용도 있다고 하니 고단했을 그의 궁중에서의 일상이 그려진다.

기념관 로비 벽면 타일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윤원규기자

명성황후가 남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진 한문 봉서도 눈길을 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글씨 옆에 ‘명성황후 구국방책’이라 적혀 있다. 장수를 나타내는 군기(軍旗) 여러 점과 상어 껍질로 칼집과 손잡이가 장식된 환도가 함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유물을 기증한 이도 유물의 정확한 유래를 잘 모른다고 한다. 황실의 여성문화를 보여주는 화려한 머리 장식과 옷 노리개도 눈길을 끈다. 명성황후를 찌른 일본도를 복원해 전시한 옆에 아주 특별한 글이 있다. 일본의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2007년 7월31일 명성황후 생가를 방문하고 올린 ‘일본인방문사죄문’이다. “우리들은 이 과거의 사실을 더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날의 일본 어린이들에게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양국의 우호와 평화가 더욱 진전되도록 정진할 것을 맹세합니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지만 이처럼 양심과 역사의식을 가진 일본 시민들도 적지 않다. 전시관을 둘러보니 아쉬움도 없지 않다. 공간의 구성이나 배치 방식이 필요해 보이고 무엇보다 전시관이 너무 낡았다. 공간을 새롭게 단장하면 역사적인 의미와 관람의 재미가 더욱 살아나지 않을까.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까지 살았던 생가는 중수 및 복원을 거쳐 197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됐다. 생가 전경. 윤원규기자

■ 시대의 변화를 모색하는 역사 공간

신구와 동서가 충돌하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명성황후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전시관을 나와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로 향한다. 민자영이 소녀 시절 책을 읽었던 별당 자리에 비각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가 서 있다. 비석 뒷면에 새겨진 ‘배수음체경서(拜手飮涕敬書)’를 풀이하면 ‘두 손을 조아리고 눈물을 삼키며 받들어 쓰다’이다. 아들 순종이 썼다고 전하는 이 비각 옆 한옥이 명성황후 생가인데 경기도문화재다. “원래 황후의 생가는 민유중의 묘막으로 지어진 작은 초가집이었어요. 민치록이 묘를 지키며 살았는데,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태어났지요. 현재의 생가는 1990년 새롭게 복원된 것입니다.” 민치록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 이씨는 여덟 살의 딸을 데리고 한양 감고당으로 이사한다. 민자영은 16세가 되던 1866년 한 살 연하의 전주 이씨 명복과 혼례를 치른다. 시아버지는 그와 평생 갈등하고 대결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고 남편은 조선 26대 왕 고종으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에 오른다. 안채에 놓인 명성황후의 영정을 살펴본다. 눈매에서 총명함이 느껴진다. 아쉽게도 명성황후의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의 초상은 외국인들이 기록한 글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본가 옆에 자리 잡은 한옥은 서울에서 옮겨온 감고당(感古堂)이다. 감고당은 숙종 비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강등돼 한동안 머물렀고 명성황후가 결혼 전에 살았던 집이다. 현재 감고당은 개방돼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감고당에서 펼쳐지는 각종 교육과 문화행사, 전통혼례 등 역사 전통문화 체험 행사는 시민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위해 지은 감고당은 명성황후가 8세 이후 왕비 간택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원래 서울 안국동에 위치해 있다가 2008년 원형을 현 위치로 이전 복원했다. 윤원규기자

■ 전통의 멋을 잇고 즐기다

2021년은 ‘추쇄도감의궤’, ‘창경궁영건도감의궤’ 등 왕실 기록문화의 꽃인 의궤에 대해 알아보고 그 속에 담긴 조선 시대 사회상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는 ‘전통의 경험과 발견’을 주제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개하고 직접 경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규방공예와 전통공예, 전통자수 교육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초보자라도 기법을 익히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어 수강생들의 호응이 높다. 특히 교육이 끝난 후 수강생들의 작품을 전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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