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완역의 힘… 그때 그 책 다시 펼치다

박동미 기자 2023. 12. 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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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권력에의 의지’
30년 만에 재해석
철학·사상 쉽게 전달
그라시안 ‘완전한 인간’
국내서 처음 완역
저자 특유 재치 살려
동물권·젠더 등 다룬
과거 비주류 책도
시대 타고 독자곁으로

요즘 출판계 새 경향 중 하나는 ‘초역’과 ‘완역’이다. ‘이 책이 번역본이 없었어?’라고 할 만큼 수십 년이 지나 한국어로 나오는 책들도 있고, 그동안 요약·축약된 형태로만 읽히던 책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출간되기도 한다. 업계에선 실력과 전문성을 갖춘 번역가와 연구자, 그리고 편집자 집단의 형성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하는데, 그만큼 국내 출판계와 학계가 질적·양적으로 성장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일본어판 중역본만 존재하거나, 해설이나 해석이 미흡했던 책들이 수정, 보완돼 나오는 사례가 많다. 여기에, 최근 다양해진 한국 사회 내 담론으로 인해 ‘때’를 놓쳤던 책들이 ‘제때’를 맞이한 경우도 있다.

◇번역가·연구자·편집자 집단의 성장 = 최근 초역이 되거나 완역된 책들은 정식 한국어판 출간은 늦었지만 완성도 측면에서는 매우 탁월하다. 해당 원문에 대한 이해가 높은 번역가와 연구자들이 참여, 과거 오역을 바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탄탄한 해설과 새로운 해석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이후 개정판이 없었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휴머니스트)만 해도 그렇다. 30년 니체 연구자인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에 의해 최근 새롭게 번역되면서 책은 니체의 철학과 사상을 독자들에게 보다 쉽게 전달한다. 특히, 이 책은 니체 사후에 가족들이 출간한 후 정치적 오독과 오용 논란에 휩싸였는데, 이 교수는 “책을 둘러싼 편견과 선입견을 걷어낼 때가 되었다”고 완역의 의미를 밝혔다. 휴머니스트 관계자는 “책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때라는 연구자의 말에 공감했고, 그동안 연구가 쌓인 만큼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출간 배경을 전했다.

새로운 번역 혹은 완역본 출간은 그 필요성을 느낀 학자들이 먼저 출판사나 편집자들에게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 작가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1955년 출간한 ‘그리스 신화’(알렙)도 70여 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 완역됐는데, 이 역시 신화 및 고전 연구자들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조영남 알렙 대표의 말이다.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된 평론과 분석, 설명이 가장 큰 특징인 이 책에 대해 조 대표는 “신화 입문용으로는 적절치 않아 그동안 출간 경쟁력이 다소 떨어졌던 게 사실”이라면서도 “방대한 이설(理說) 자료를 담아내 신화 연구와 해석의 영역에서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내 신화·고전 연구 수준이 상당히 올라왔고, 요즘 신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이제는 일반 독자들도 흥미를 갖고 읽을 만한 책이다”고 덧붙였다.

쇼펜하우어가 사랑했던 스페인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완전한 인간’(교보문고)도 잠언집 형태를 벗어나 완역본으로 출간됐다.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바로 옮겨 저자 특유의 재치가 더욱 생생해졌고, 국내 미발표작을 추가해 구성도 풍부하다. 또, 범죄소설의 고전 ‘리플리’(을유문화사) 시리즈도 과거 번역의 아쉬웠던 부분들을 보완해 10년 만에 새롭게 번역해 선보였다.

◇‘때’ 됐다. 다양한 담론이 출간 이끌어 = 동물권과 젠더, 역사 해석 등 최근 한국 사회 내 다양해지는 담론으로 인해 수십 년 만에 초역되는 책들도 있다. 의무론 입장에서 ‘동물 권리론’을 편 톰 레건(1938~2017)의 1983년 저작 ‘동물권 옹호’(아카넷)가 대표적. 레건은 피터 싱어와 함께 동물권 논의의 양대산맥이었으나, 싱어의 ‘동물 해방’(1975)이 비교적 이른 1999년에 국내 출간된 반면, 레건의 책은 40년 만에야 한국어로 번역됐다. ‘동물권 옹호’가 대중서라기보다는 분석적이고 전문적인 철학책에 가까워 쉽게 출간될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보다는 ‘시기상조’였다는 데에 더 무게가 실린다. 레건이 동물을 윤리적으로 처우해야 한다고 주장한 철학자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이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반려 인구 증가와 유기견·유기묘 문제 등 국내서도 동물권 현안이 지속적인 관심을 모으고, 이에 대한 철학적 배경을 조망하는 일 또한 중요해졌다. 즉, 지금 제대로 ‘때’를 만난 책이다.

1999년 미국 공립도서관 및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으나, 20년이 지난 올해 한국어판이 출간된 ‘생물학적 풍요’(히포크라테스) 역시 변화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책은 동물 동성애에 대한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린다. 13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동물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폭넓고 깊게 다룬다. 실제 미국과 인도의 동성애 관련 재판에서 인용될 만큼 과학적 논거가 탄탄하고 사회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끼친 책이다.

금서(禁書)가 되면서 때를 놓쳤다 이제 빛을 보기도 한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명예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글항아리)은 한국 현대사를 다룬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꼽히지만, 한국어 완역본이 나오기까지 43년이나 걸렸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원서로 돌려보던 책이니 해금 후 번역·출간될 법도 했으나, 커밍스의 ‘수정주의’ 역사관에 의견이 분분해지며 ‘~카더라’식 옛 책이 되고 말았던 것. 그러나 번역자의 끈질긴 노력과 최근 역사 해석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늘어나면서, 드디어 한국 독자들을 만나게 됐다.

고급독자 믿고 과감하게 출간… 60년 만에 내놓아도 불티

나치 다룬 ‘제3제국사’
석달 만에 초판 소진

뉴턴 물리학 고전
‘프린키피아’도 완판

완역과 초역을 이끈 힘은 단연 단단한 교양 독자층. 바로 출판 시장에서 가장 ‘믿을 만한’ 소비자이다. 독서 인구는 줄어도 읽는 사람은 더 많이, 더 깊게 읽기 때문이다. 이 핵심 독자층이 교양서 출간의 큰 동력이다.

1960년에 출간된 현대의 고전 ‘제3제국사’(책과함께)는 네 권 세트 ‘벽돌 책’이지만, ‘읽는 사람’ ‘고급 독자’들을 믿고 과감하게 출간했다. 나치 독일을 다룬 최초의 통사이자 대표적인 대중 역사서로 한국에서 정식으로 완역된 것은 초판 출간 63년 만인 이번이 처음이다.

2011년 미국에서 50주년 기념판이 나왔을 때부터 국내 출간을 노리고 있었다는 ‘책과함께’ 이정우 팀장은 “과거 번역본은 요약본이고 출처나 주석도 없는 ‘해적판’ 수준이었다”면서 “높아진 국내 독서 수준을 고려할 때, 새 번역 및 완역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책은 석 달 만에 초판을 다 소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작 뉴턴의 핵심 저작이자 물리학 고전인 ‘프린키피아’(휴머니스트)도 핵심 독자층의 응원과 관심으로 출간됐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한정판에 대한 북펀딩을 진행했고, 530명의 독자가 사전 구매를 신청하면서 목표액 3300%를 달성했다. 총 3권으로 이뤄진 원서를 1권으로 묶고 현대적 디자인으로 제작한 완역본으로 현재 양장본은 품절된 상태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수준 높은 교양서의 초역, 완역본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독서율이 줄어도 읽는 사람은 더 읽는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장동석 출판평론가 역시 “책을 향유하는 고급 독자가 늘어났다는 반가운 표시”라고 분석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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