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이 둘러준 따뜻한 목도리 같은 '옛 얘기지만'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김동률에게 클래식은 공기다. 그는 모두가 환호하던 비틀스 대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연주한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수 천 번 돌려 들으며 자신의 취향을 확인했다. 김동률은 좋은 가요와 클래식만 듣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굳이 팝까지 들어야 할 필요를 몰랐다. 영미권 팝은 스무 살 때 본격 음악을 시작한 그가 공부하듯 듣기 시작한 장르였다. 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습관처럼 틀어두었던 FM 클래식 라디오 방송은 그대로 아들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배경이 되었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와 데이비드 포스터 사이 어디쯤에서 김동률은 한글 노래로 한국 대중과 마주할 자신만의 자리를 찾았다.
'기억의 습작', '배려'가 그랬듯 김동률 발라드는 첫 소절로 승부를 건다. 느리고 깊은 김동률 노래의 힘은 대게 첫 소절에서 나온다. 마치 시작점에서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그 노래가 비운을 맞을 것처럼, 김동률의 첫 소절은 절박하고 중요해보였다. '연극'만큼의 파격을 지녔던 뮤지컬 풍 곡 '황금가면' 이후 반년 여 만에 내놓은 싱글 '옛 얘기지만'도 그렇다. 노래의 제목이 곧 노래의 첫 소절이다. 예고없이 피아노와 함께 들이치는 다섯 음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훔친다. 김동률은 겨울을 기다리느라 싱글 발매 시기가 조금 늦어졌다고 했다.
그의 발라드가 겨울에 어울린다는 건 팬에게라면 익숙한 사실이다. 두껍고 편안한 입체적 목소리, 온기를 머금은 피아노 반주가 스트링의 열기를 만나 아늑함에 닿을 때 김동률의 음악은 비로소 겨울이라는 계절에 맞설 준비를 끝낸다. '옛 얘기지만'은 그런 김동률 식 발라드의 결정적 특징 둘을 교과서처럼 새긴 신곡이다. 벌스(verse)의 허를 찔러 노래를 어루만지는 신시사이저, 2절까지 웅크려있다 찬란하게 퍼지는 스트링, 절을 마무리 하는 재즈 기타 모두가 목도리를 두른 듯 따뜻한 톤으로 무장해 겨울의 김동률을 사람들의 고막에 안긴다. 갓 내린 커피를 앞에 두고 홀로 탁자에 앉아 지난 이별을 곱씹는 표지 그림 속 사람은 지금 이 노래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번 곡엔 김동률도 인정한 김동률의 열성팬인 정동환이 참여해 음악을 더 기름지게 만들었다. 김동률은 피아니즘 면에서 정동환에게 큰 영향을 준 사카모토 류이치나 키스 자렛보다 더 본질적인 가르침을 후배에게 주었다. 그것은 음악에 대한 진정한 사랑, 음악을 만들 때 이성과 감정을 공존시키는 방법이었다. 정동환은 자기 음악 세계의 절반이 넘는 에너지를 김동률에게서 받았다고 했다. 선배 공연 때 맡은 피아노 연주를 넘어 이번 곡에 피아노/키보드, 신시사이저, 프로그래밍에 편곡자로서 참여하게 된 건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로가 실력과 호감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정동환의 연주는 가수와 한 몸인 듯 살아 움직인다. 노래가 눌리지 않을 만큼 찰나에 자신을 내세우다 이내 가수의 그림자로 돌아간다. 멜로망스 때 그가 염두에 두는 창작 철학, 즉 화성과 멜로디를 수학적으로 풀어간 끝에 만나는 서정을 그는 이 곡에서도 선배와 함께 일궈냈다. 힙합 정도를 제외하면 클래식, 재즈, 피아노라는 나무들로 대중음악이라는 숲에서 어떻게든 만날 수 밖에 없었을 두 사람. 반주가 완성될 즈음 써나간다는 가사의 디테일이 편곡 과정에서 음향 스타일, 무드에 따라 결정되는 김동률의 습관이 이번에도 유효 했다면 그 과정에 깊이 관여한 정동환의 존재는 더 돋보인다. 이 조용하게 완벽한 호흡은 정동환이 자신보다 자기 음악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김동률의 말이 어떤 뜻인지를 납득하게 해준다.
2014년 10월 28일. 전람회 시절 동생을 이끌어준 신해철이 세상을 떠나고 하루 뒤 김동률은 "형한테 채 못 갚은 것들, 형이 그랬듯, 대신 후배들에게 베풀며 살겠다"라고 자신의 SNS에 남겼다. '옛 얘기지만'을 들으며 나는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그가 떠난 형과의 약속을 지켰구나 생각이 들었다. 벌써 10주기가 다가오는 고인도 후배들과 소통하는 후배를 바라보며 그곳에서 흡족해 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이젠 다 지난 옛 얘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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