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입니다, 치타공 언덕 출신 줌머족이기도 하죠”

정용인 기자 2023. 12. 4.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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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줌머족 선주민 이야기
책으로 펴낸 로넬 차크마 나니씨
난민 인권운동가 로렐 차크마 나니씨가 11월 22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주간경향] “경향신문사 위치 압니다. 이전에도 가본 적 있어요.” 인터뷰 요청을 받은 로넬 차크마 나니씨의 말이다. 그를 추천한 이는 최영일 김포 외국인주민지원센터장이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민 개혁 기사를 쓸 때 최 센터장 도움을 받았다. 이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최 센터장은 “대한민국에 정착한 난민공동체 혹은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역사 측면에서 중요한 책 한 권이 발간을 앞두고 있다”며 로넬씨의 책 <치타공 언덕 바르기, 한국을 날다>를 소개했다.

책을 읽어봤다. 흥미로웠다. 1971년 파키스탄에서 벵골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서 치타공 산악지대 역시 방글라데시 영토로 들어갔다. 치타공 산악지대에 살던 선주민 13개 소수민족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이 줌머족이다. ‘줌머’의 뜻은 화전민(火田民)이다. 그러니까 화전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던 소수민족들이다. 방글라데시 다수를 차지하는 벵골족 정부는 이들을 탄압했다. 인구수만 놓고 보면 압도적이다. 벵골족이 1억6000만명인 반면 13개 줌머족은 통틀어 75만명이었다. 줌머족 사람들은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움에 나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이던 치타공 산악지대(언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힐트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래에서는 로넬씨의 책 제목에 따라 치타공 언덕으로 표기한다)를 떠나 망명했다. 접경하고 있는 인도나 미얀마를 택한 사람도 있고, 프랑스나 일본, 호주로 건너간 사람도 있다. 이방인으로 전 세계를 떠돌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치타공 언덕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방글라데시 정부의 박해·학살 사건이 일어나면 주재국 대사관 앞에 모여 규탄시위를 한다.

로넬씨가 낸 책 제목에 등장하는 ‘바르기’는 그가 속한 줌머 소수민족 차크마족 전설에 등장하는 새다. 바르기는 아이를 재울 때 불러주는 동요에도 등장한다. 전설은 바르기가 나타나면 평화 시대가 온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책 제목에 등장한 치타공 언덕과 한국의 하늘을 나는 ‘바르기’는 평화와 희망의 상징인 셈이다. 지난 11월 22일 경향신문사에서 로넬씨를 만났다.

-책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는 텀블벅에서 책 펀딩이 진행 중이었어요. 100만원이 펀딩목표 금액이었는데 모두 28명이 참여했더군요. 책을 보면 줌머족 사람들이 서로 돕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상부상조 정도의 의미인 ‘말레야 정신’이라는 것을 거론하던데 한국에 있는 줌머족 분들도 많이 도우셨나요.

“네. 10월 7일에 출판기념회 형식으로 토크콘서트를 했는데 그 행사를 줌머족 분들이 준비해주었어요. 그리고 줌머분들이 그 후에도 책을 많이 사주었습니다. 그중에는 한글을 못 읽는 분도 많은데 그래도 사주었어요. 저도 100권 정도 사서 증정했고요. 줌머분들도 그 책을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찾아오거나 그럴 때 알리기 위해 사용할 겁니다.”

-재미있게 읽기도 했지만 아주 소중한 기록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책에 언급된 줌머족 학살사건은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5·18보다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됐죠. 그런데도 거의 국제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았어요. 책에 따르면 일본에서 줌머족과 연대하는 활동가들이 현지에 들어가 활동했고, 한국도 국제협력개발기구(코이카)에서 2명이 들어가 활동하려 했는데 방글라데시 정부가 못 들어가게 막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외국인의 출입은 1997년 평화협정 이후 잠깐 허용될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 나중에 사이사이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면서 또 원점으로 돌아간 거죠. 현재 저는 한국 국적인데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신고를 해서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현 집권당은 2009년 이후 선거마다 부정선거를 통해 재집권했습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러니 방글라데시 시민사회에서도 ‘줌머족 박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못 기울입니다. 줌머족 내 갈등도 있었고요.”

-허락을 안 해주는 경우도 있나요.

“한때는 아예 방글라데시 입국 허가가 안 났습니다. 특히 줌머 관련 유명 외국인 활동가들은 입국을 거부당했죠. 설령 입국하더라도 여러 제재가 있었어요. 그와 비교하면 그래도 지금은 신청하면 거의 허가가 떨어진다고 하니까 많이 나아진 거죠. 예전에는 방글라데시 수도인 다카의 내무부 허락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대사관에서 신청할 수 있게 된 것도 조금은 개선된 부분이긴 합니다.”

-체류계획 같은 것을 제출하고 거기서 누구를 만날지도 사전에 알려야 하나 보죠.

“네. 초청장도 필요합니다.”

-왜 중국이나 지금은 여행금지가 됐지만 미국 사람들이 북한 여행을 가면 항상 안내원이라는 이름의 감시자가 붙잖아요. 거기도 그렇습니까.

“똑같습니다. 거기서는 보호 목적이라는 명분을 붙입니다. 방글라데시 정부 입장에서 우리는 귀화 외국인인데 오리지널 외국인들에 대한 감시가 더 많아요. 혹시 납치당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실제 내부에 극단주의적인 단체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실제 그런 사건이 과거 있기도 했고요.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권문제 등이 외부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있는 줌머족 출신들이 ‘재한줌머인연대’라는 단체를 만들고 있잖습니까. 그분들은 현지 가족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됩니까.

“전보다 조금 쉬워진 것 같긴 합니다. 우리 치타공 언덕 지역에 인터넷이 허용된 게 얼마 안 됐어요. 2010년 전후일 겁니다. 휴대전화도 다른 방글라데시 전 지역에 터지는데, 치타공 언덕 지역에 허용된 건 역시 10여 년 전입니다. 인터넷도 되고 휴대전화도 되니 이제 예전보다 접촉이 쉬워진 건 맞아요.”

-1997년 평화협정이 큰 전환점이 됐을 텐데 줌머족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었을 듯해요. 진짜 평화가 왔냐, 기만이 아니냐는 분들도 있을 텐데.

“맞습니다.”

-그 뒤에 학살사건이나 박해는 없었습니까.

“2008년, 2010년 그리고 2017년까지 세 차례 대규모 방화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벵골인 정착민이 일으킨 건가요.

“네. 정부군 비호 아래 벌어진 일입니다. 2010년과 2017년은 큰 사건이고, 그 뒤에도 작은 사건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20번 이상 발생했다는 보고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재한줌머인연대 사람들이나 전 세계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은 각국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 가서 항의 시위를 하는 식이었고요.

“맞습니다.”

로넬씨의 말에 따르면 줌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왜일까. “방글라데시 내부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에요. 언론 보도를 보면 알겠지만 방글라데시 총선이 내년 1월입니다. 현 집권당이 2009년부터 집권해왔는데 선거마다 부정선거를 통해 재집권을 해왔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옛날로 돌아간 거예요. 민주주의가 사라진 겁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방글라데시 시민사회에서도 ‘줌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못 기울입니다. 네트워크가 현지의 동참과 지원 없이 우리끼리만 존재하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내부 갈등 문제도 있습니다. 줌머족이 13개 소수민족이었는데 현재는 11개만 남았어요. 줌머족 정당이 하나만 있었는데 평화협상을 하면서 둘로 나뉘었고, 그 당들이 또 쪼개졌습니다. 분리된 당들끼리도 싸우는데 선거나 정책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활동가들도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어려워 애매해지는 거죠.”

책에는 그가 한국에 오기 전 고등학교 시절, 줌머족의 자유를 위해 산티바히니 평화군에 들어가서 싸우다 체포돼 3년 감옥살이를 하는 과정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로넬씨는 1994년, 그리고 2002년 한국에 들어와 일하다 2004년 난민 인정을 받았다. 2011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해 현재 난민과 이주민을 위한 상담과 통역, 난민인권강사로 활동 중이다.

-책을 보면 재한줌머인연대 회원이 180명이 된다고 썼습니다. 그 180명에는 한국에서 태어난 2세도 포함돼 있습니까. 치타공 언덕 출신으로 줌머인인데 단체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180명이 거의 다 줌머연대의 구성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적극적 활동가냐 그냥 구성원이냐의 차이는 있지만요. 어떤 비자로 들어왔든 줌머연대의 회원으로 인정받습니다. 고용비자로 들어온 분도 몇 있어요.”

“난민 인정이 돼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한국 국적이고 이씨로 개명했지만, 진짜 이씨가 될 수는 없어요. 차라리 ‘당신은 당신대로 한국인이고, 나는 나처럼 한국인이다’ 이런 평화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 아닌가 싶어요.”

-E-9비자로? 방글라데시 정부가 그걸 허락해줍니까.

“네. E-9비자로요. 예전에는 아예 없었는데 이제는 벵골인들과 경쟁해서 오는 거죠. 한국에 있는 우리도 다양한 정보를 줍니다. E-9비자로 들어오기도 하고 일부는 한국에 있는 분들과 가족결합 형태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한국은 거의 전부가 줌머인연대에 참여하고 있지만, 미국 같은 데는 아무런 네트워크 없이 나가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게 가능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국의 행정, 노동부나 출입국관리 사무소가 약간 다른 나라보다 까다롭기도 하고 잘 관리되잖아요.”

-그래서 김포지역에 거의 다 모여 사는 건가요.

“이런 문제는 서로서로 돕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연대가 잘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로넬씨처럼 귀화한 다른 줌머인 가족도 있습니까.

“아이와 가족 포함하면 한 50여명 됩니다.”

-책에 따르면 로넬씨는 김포 이씨로 해서 ‘이나니’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다른 분도 김포 이씨입니까 아니면 따로 성씨를 갖게 된 겁니까.

“예를 들어 11개 소수민족 중 ‘턴천가’가 있는데 그 턴천가 중 한 가족이 귀화하면서 가정법원에서 단씨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김포 단씨가 된 거죠.”

-단씨가 흔한 성씨가 아니긴 합니다. 하하. 사실 한국의 이민정책이 강한 동화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정책이 유도하는 것에 따라 2세나 3세의 경우 줌머정체성을 잃는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제 아들은 세 살 때 한국에 왔는데 그때는 줌머인 친구가 없어서 어렸을 때부터 한국 친구들이랑 어울려 자랐어요. 고향 말도 못 배웠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내국인(그도 귀화 후 한국 사람이지만, 주변 사람들을 내국인으로 지칭했다)들로부터 ‘아들에게 자기 민족 언어나 문화 가르쳐야지’ 그런 잔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사회 분위기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 장교로 군 복무 중 인 우리 아들 말고 지금 줌머인 2세 중 제일 나이 많은 축이 중학교 3학년이 됐는데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한국어로 합니다. 집에서 부모들이랑은 모어(母語)를 쓰는데 그게 그래도 그런 교육이 가능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앞으로 한국사회도 점점 변할 것이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겁니다. 이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그렇죠. 그래도 한국 아이들이랑 있을 때는 모어를 쓰지 않는 게 이해가 되긴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 가서 우리끼리 말을 하면 벵골족 아이들이 우리를 놀렸어요. 농담이라고 하지만 소수자에 대한 사회문화적 압박은 항상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성일 선임기자

-귀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그리고 귀화 몇 년 후에 개명한 것도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이건 진짜로 그런 불편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 같긴 합니다.

“그렇죠. 제가 난민 인정자잖아요. 제가 난민 인정을 받을 때는 미얀마 분들을 포함해 11명밖에 없었는데 그때와 지금은 물론 다릅니다. 난민 인정받은 다음해인가 다다음해인가 초등학교 입학하는데 애가 그때 닌텐도 오락기를 하려는데 컴퓨터 게임을 하게 하려면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더라고요. 외국인 등록번호로도 접속이 안 됩니다. 학교를 입학할 때도 어떤 안내도 없었죠. 지금도 스스로 찾아가 물어봐야 하긴 하는데 난민인정이 돼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난민인정자의 경우도 그랬다는 말이죠.

“네. 일반 외국인도 마찬가지인데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장사도 할 수 없었어요. 그 당시는 장사도 내국인과 결혼하거나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술집이나 노래방이나 그런 영업소를 가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요.”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약간 반말을 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물건을 팔아주니 감사해야 하는데 ‘돈 벌러 왔는데 왜 돈을 써’ 하는 말도 듣고. 제 이름도 제대로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보통 어떻게 불렀습니까.

“이름이 기니까 다 부르기 힘들죠. 또 어떤 게 성인지도 잘 모르고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은 그것을 알 이유도 없잖아요. 사실 헷갈리죠. 외국이름인데. 어떤 사람은 제가 차크마이기 때문에 ‘샤’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차’ 또는 ‘구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구마라고 부를 때는 약간 놀리는 말로 들렸습니다. 지금도 제 이름(나니)을 난희라고 알아듣거나 부르는 사람이 많아요. 로넬이라는 이름을 ‘노래’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그런 불편함이 어딜 가나 항상 있어요. 제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불편해합니다. 어디 가도 이름을 대는 것이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도 마찬가지고요.”

-책에서 제일 인상적인 부분이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담은 대목이었습니다. ‘신분증을 보여주기 전까지 나는 외국인이 된다’, ‘지금 내가 선 자리는 한국사회의 규범이 지배하는 울타리의 경계다. 한발 밖으로 나가면 혐오와 배제를 피할 수 없고, 한발 안으로 다가가면 날카로운 화살은 피할 수 있다’, ‘나는 난민인정자이면서 그 말에 갇힌다. 나는 나로 온전히 존중받기 어렵다’와 같은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너와 우리는 다르다는 차별적 시선,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알기 힘들거든요. 결국 해법은 차별하는 쪽의 감수성을 높여야 하는데 그게 차별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학자들은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렇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주변분들 다 그렇습니다. 한국 국적을 취득했는데도 한국인으로 취급받지 못한 외국인입니다. 저도 뭐 여전히 난민이죠.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민족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국민으로 봐야 하나 이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씨가 됐다고 해서 제가 진짜 이씨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인이 되는 노력을 하지만 또 한계가 있으니까요. 또 아무리 한국인이 됐다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면 안 되는 것들도 있고요.”

-한국도 이제 ‘나는 치타공 언덕 줌머족 출신 한국인이다’, 이런 자긍심을 내보이고 다른 사람도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한 사회가 돼야 할 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최대한 외국인임을 숨기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워요. 불가능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모를 수도 있지만, 말을 꺼내면 다르다는 걸 압니다. 차라리 당신은 당신대로 한국인이고 나는 나처럼 한국인이다, 이런 식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해결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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