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다던 SUV의 배신[기고]

2023. 12. 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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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한 도로에서 운행 중인 수많은 차량. 그린피스 제공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처음 방문한다면 곧장 도로로 뛰어들어 자동차에 말을 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보기에 지구를 지배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삼키고 뱉는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게 낯선 그들의 눈에 자동차 중에서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얼마나 강한 존재로 비칠까 궁금해진다. 외계 생명체 이야기는 뒤로하고 지구 생명체인 우리가 처한 상황만 보더라도, 세계 자동차 시장은 SUV가 빠르게 장악하는 중이다. 한국자동차연구원(2023년 5월)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SUV는 이미 세단의 판매량을 제쳤다. 비율로는 세계에서 판매되는 자동차의 40.8%를 차지할 정도다.

미국에서 판매하는 자동차의 절반, 유럽에서의 3분의 1이 SUV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계자료를 보면 국내 SUV 판매 비중은 2020년 52.3%, 2021년 56.2%, 2022년 60.5%로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일반 승용차보다 SUV를 선호하는 현상의 배경은 무엇일까? 이제 자동차는 단순히 이동 수단을 넘어 하나의 ‘공간’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코로나19로 언택트 문화가 진화하면서 자동차 제조사는 SUV의 널찍한 공간이 주는 매력을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됐다. 과거의 자동차 광고가 빠른 속도를 강조하고 매끈한 차체를 비추며 차의 성능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SUV를 통해 가족과 친구, 반려동물과 함께 캠핑·서핑 등 행복한 여가를 누리는 문화 가치적 모습까지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SUV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 안전한 “아빠차”, “패밀리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갈수록 그 인기를 더하고 있다. 사실 SUV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 자재를 실어 나를 목적으로 개발된 자동차다. 따라서 험준한 길을 주행하는 데 특화돼 있다. 1980년대에는 런던 귀족들의 사냥용 차로 인기를 끌었고, 도시 외곽에서 죽은 꿩과 사냥개를 싣던 레인지로버가 신흥 부자들에게도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도로에서 거대한 차체가 주는 우월감과 안정성에 매료된 사람들이 SUV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런 목적과 용도로 개발된 SUV를 일반 도로에서 타는 것은 지나치다. 마치 집 앞 산책을 하면서 고성능의 값비싼 고어텍스 등산복과 아이젠을 장착하고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안전하고 가족 친화적이라는 이유로 사랑받는 SUV는 과연 환경에도 안전한 차일까?

그린피스 활동가가 SUV 옆에서 지난 3월 22일 내연기관차 폐지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그린피스 제공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19년부터 꾸준히 SUV 유행이 자동차 제조사가 전기차 판매로 줄인 온실가스를 가볍게 무시하고,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경고했다. 최근 그린피스는 이 점에 착안해 SUV의 친환경성을 평가한 보고서인 ‘거대한 자동차, 더 큰 위기’를 발표했다. 2022년 판매량 순위 상위 5개 자동차 제조사인 도요타, 폭스바겐, 현대기아차, 스텔란티스, 제네럴모터스(GM)를 대상으로 분석했다. 5개 자동차 제조사의 SUV 판매량을 조사해봤더니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전체 판매량 대비 SUV 판매량이 15%에서 42%로 2.8배 증가했다. 지난 10년간 5개 제조사 모두에서 SUV 판매가 늘어나 SUV 유행을 견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현대기아차는 2022년 총판매량 중 SUV 비율이 53%로, 5개 제조사 중에서 가장 높았다.

SUV의 환경적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SUV의 탄소발자국부터 살펴봐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SUV는 생산 공정에서부터 운행까지 전 생애주기에 걸쳐 일반 승용차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CO₂)를 배출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SUV는 일반 승용차에 비해 20%나 많은 양의 철강을 사용하기 때문에 CO₂ 배출량도 더 많다. 철강 1t을 생산할 때 약 1.4t의 이산화탄소 환산량(CO2e)이 배출되는 만큼 차체가 크고 무거운 SUV에서는 CO₂가 더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둘째, SUV는 일반 승용차에 비해 평균 20% 더 많은 연료를 사용하는 까닭에 더 많은 CO₂를 배출한다. 일반 승용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에너지 효율, 즉 연비가 낮기에 더 많은 연료를 소모하는 셈이다. 그린피스 조사에 따르면 2013~2022년에 운행됐던 SUV 한 대는 일반 승용차에 비해 약 4.6t의 CO₂를 더 발생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중형차인 소나타가 1㎞ 주행할 때 배출하는 CO₂가 130g 정도인 걸 고려하면, 이 소나타가 서울과 부산을 46번 왕복할 때 배출하는 CO₂ 양과 맞먹는다. 혹자는 전기차, 수소전기차와 같은 무공해차(ZEV) SUV는 좋은 선택이지 않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내연기관차를 벗어나 ZEV로 전환하는 게 수송 부문의 탄소 배출을 줄여나가기 위한 바람직한 방향은 맞다. 또 자동차의 전 생애주기에 걸쳐 발생하는 온실가스 중 80%가 주행 중 발생하기 때문에 주행 중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혀 없는 ZEV는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ZEV라고 하더라도 그 종류가 SUV라면 제조 시 사용되는 철강량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철강 소비량이 늘어나므로 결국 탄소발자국이 커지는 것이다.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캠페이너들이 지난 10월 16일 자동차 기업의 탈탄소 가속화를 촉구하고 있다. 그린피스 제공



SUV 판매량 상승은 곧 CO₂ 배출량 증가로 이어져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 지난 11월 29일 발간된 그린피스 보고서(‘거대한 자동차, 더 큰 위기’)를 보면 SUV의 CO₂ 배출량은 매우 가파른 속도로 증가해 토요타, 폭스바겐, 현대기아의 CO₂ 총배출량 증가를 주도했다. SUV 증가로 인해 늘어난 CO₂ 배출량이 내연기관차 판매 감소로 인해 줄어든 CO₂ 배출량을 초과하면서 전체적으로는 CO₂ 배출량이 늘어났다. 또한 SUV 증가는 ZEV 전환 노력마저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2022년 3개 제조사의 ZEV 판매로 저감된 CO₂의 도로 배출량은 900만t 톤이었다. 같은 해 3사의 SUV에서 배출된 CO₂는 그러나 ‘ZEV 저감량’의 무려 33배에 달하는 2억9800만t이었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기후위기 대응 차원에서 전기차를 비롯한 ZEV를 앞세우고 있지만, 내연기관 SUV의 판매 급증으로 총 CO₂ 배출량은 오히려 더 늘고 있는 셈이다.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지난 11월 29일 오전 현대자동차그룹 양재 본사 앞에 지름 2.5m 크기의 거대한 타이어를 설치하고, 자동차 제조사들에 강력한 기후 대응 리더십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린피스 제공



그렇다면 자동차 제조사들이 이처럼 SUV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뭘까? 바로, 수익성 때문이다. 지난해 연간 매출 및 영업이익이 최대치를 기록한 현대차의 성과 뒤에는 SUV라는 고부가가치 차량이 존재한다. SUV는 원가 대비 제조사가 챙기는 마진율이 다른 차종에 비해 높다. 현대차를 비롯한 자동차 기업들은 이른바 ‘돈이 되는’ 자동차에 앞다퉈 집중하는 모양새다. 수익성이 높은 SUV에 많은 광고비를 투자하는 사례는 호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 커뮤니케이션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자동차 제조사들은 호주에서 SUV와 경상용차 광고비를 2010년 약 1억달러에서 2022년 약 1억9700만달러로 두 배 가까이 늘렸다. 반면 기존 승용차 광고비는 크게 줄였다. 그 결과 같은 기간 호주에서 SUV와 같은 큰 자동차의 판매량이 80% 증가했는데, 이는 호주 신차 판매량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

기후위기가 인류에게 실존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오늘날, ‘안전’을 내세운 SUV는 환경에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위해 거대한 자동차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SUV는 ‘오버스펙’이다. 수익성이 높은 SUV에 안전과 자유의 이미지를 덧씌운 자동차 기업들이 SUV 포트폴리오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며 광고비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 지금처럼 기업들이 SUV 유행을 부채질한다면, 전기차 전환으로 애써 감축한 CO₂ 배출량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도요타, 폭스바겐, 현대기아차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로 차를 많이 판매하고 있는 자동차 제조사들은 수송 부문의 탄소 배출 절감을 위해 더 큰 책임감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 탄소중립, 전동화 계획 등 자동차 제조사들이 선언한 목표를 달성하고 약속을 지키려면 그동안 이뤄온 탄소 저감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SUV 의존 흐름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최은서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캠페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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