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덕'과 떠난 일본 철도 여행, 그곳에서 만난 세계 최고의 교통수단

최용락 기자 2023. 12. 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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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철도 기행 上] 철도 노동자와 함께 한 2박 3일 일본 철도 여행기

<프레시안>은 지난 10월 25~28일 2030 세대가 주인 27명의 한국철도공사 노동자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 현지 철도와 철도노동조합의 현재를 보고 왔다. 강연, 세미나, 발표회 등 총 10강으로 이뤄진 희망철도재단 주관 '답사와 체험이 있는 공공철도 청년학교'의 일환이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시베리아 시간여행> 등의 저자이기도 한 박흥수 기관사가 인솔한 일본 실사의 내용을 체험기와 일본 철도 노동자 인터뷰로 나눠 싣는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 도쿄 시내로 향하는 급행열차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려 승강장에 내리니 먼저 철로와 승객 사이를 막고 있는 가느다란 삼색 철선이 보였다. '이게 뭘까?' 보고 있는데 "스크린 도어예요"라는 박흥수 기관사의 말이 들려왔다. 이번 여정의 인솔대장인 그를 보니 표정에서 '신기하죠?'라는 말이 같이 들렸다. 내 머릿 속 '스크린 도어는 키를 넘는 높이로 세워져 전철과 사람 사이를 차단하는 유리문'이라는 고정관념을 간파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철도를 주제로 한 여행이 아니었다면 별 생각 없이 지나갔을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였다.

나리타 익스프레스에 몸을 실은 뒤에도 비슷한 순간이 또 있었다. 의자에 눕듯이 앉아 주택이 늘어선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자니 옆 자리 박 기관사가 일본 철도의 특성 한 가지를 설명했다. "일본 철도는 협궤(철로 표준궤보다 협소한 궤간, 일본의 궤간은 보통 1067mm)예요. 협궤라서 열차가 고속으로 달리기 어려운데 기술력으로 극복한 사례죠."

순간 서울 지하철이나 KTX에서와는 달리 열차가 양옆으로 흔들린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휴가차 떠났던 3번의 일본 여행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터넷에 협궤를 검색하니 '좁은 열차 폭으로 인한 높은 무게중심에서 비롯된 나쁜 승차감'이 단점 중 하나로 뜬다. 보통의 일본 여행과는 어딘가 다른, 덕업일치를 이룬 50대 '철덕' 기관사와 2030 철도 노동자들과의 일본 철도 여행이 시작됐다.

▲ 일본 나리타 공항역 스크린도어. ⓒ프레시안(최용락)

이수현 씨가 떠난 신오쿠보역과 일본 철도원의 노동

목적지인 우에노역까지는 1시간가량 걸렸다. 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숙소에는 계획보다 늦은 오후 4시쯤 도착했다. 3일 간 도쿄 일대의 동일본여객철도주식회사 열차를 탈 수 있는 '도쿄 와이드 패스'의 나리타 공항 발권창구 줄이 길었던 탓이었다. 애초 계획했던 도쿄 지하철 박물관 관람을 생략하고 간 첫 행선지는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가 한일 노동자 교류라는 점에 비춰보면 의미심장한 곳이었는데, 도쿄 한인타운 인근, 고 이 수현 씨가 세상을 떠난 신오쿠보역이었다.

"한국인 유학생 이 수현 씨,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씨는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경, 신오오꾸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위험을 무릅쓴 채 용감히 선로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하려다 고귀한 목숨을 바쳤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정신과 용감한 행동을 영원히 기리고자 여기에 이 글을 남깁니다.

동일본여객철도주식회사"

신오쿠보역에 도착하니 승강장으로 오르는 계단 길 벽면에 어릴 적 교과서로만 접했던, 안타까운 사고의 경위가 적힌 위령비가 붙어 있었다. 지난 1월에도 한일 시민들이 이곳에 모여 22년 전 안타깝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고 양국의 관계 개선을 염원하는 추도식을 열었다. 이 씨의 이름을 딴 'LSH아시아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의 수는 2021년에 1000명을 넘었다.

▲ 신오쿠보역에 설치된 고 이수현 씨와 고 세키네 시로 씨의 위령비. ⓒ프레시안(최용락)

마음속으로 짧은 추도를 마치고 다시 승강장에 오르니 박 기관사가 "차장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라며 일행을 한쪽 끝으로 불러 모았다. 차창 너머로 일하는 모습을 보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전철이 멈추고 허리 높이의 스크린 도어가 열리자 차장이 운전실 문을 열고 나와 승객이 다 타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일본 승객들은 이 모습을 거의 매일 보겠죠." 박 기관사가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한국의 차장도 CCTV를 통해 매 역마다 같은 장면을 확인하며 승객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을 테다.

열차가 멈춘 사이 가방을 앞으로 고쳐 멘 시민들이 가벼운 부딪침에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미마셍(すみません, 미안해요)'을 연발하며 전철에 탔다. 4명의 철도 노동자와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한 나도 전철에 올랐다. 오차노미즈역에 내려 강변에 지어진 철로와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 철로에서 빨간색과 회색의 열차들이 교차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본 뒤 세계 이용객 1위 전철역, 신주쿠역으로 이동해 식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첫날 일정을 마쳤다.

▲ 오챠노미즈역 인근 다리에서 본 열차 두 대가 교차하는 장면. 이곳은 <스즈메의 문단속>에도 나온 장소다. ⓒ프레시안(최용락)

동일본JR 철도 박물관과 한일 철도 노동자 교류회

둘째 날 아침 우리는 우에노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사이타마시 오미야에 있는 동일본JR 철도 박물관으로 향했다. 2007년 지어졌다는 이 박물관은 일본 철도 박물관 중에도 가장 크고 자료가 많은 곳이다. 입장객 수도 개관 11년 만인 2018년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날도 입구에는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생들이 가득했는데,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으로 스스럼없이 "오하요(おはよう)!" 아침 인사를 건넸다. 우리도 함께 인사하며 박물관에 들어섰다.

아쉽게도 동일본 JR 철도 박물관에 한글이나 영어로 된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철도에 문외한인 내게도 전날 오챠노미즈역에서 느꼈던 열차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다시 확인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곳이었다. 1층 전시관에는 퇴역 열차 36량이 그대로 놓여 있었는데, 특히 항공기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세계 최초의 고속열차, 신칸센 기관차의 정면에 마주 선 일이 기억에 남는다. 평소 철로에 올라갈 일이 없는 내게 그런 경험은 처음이어서 였을 것이다.

2층 전시관의 벽면에는 1825년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일본 철도의 역사를 새긴 연표가 붙어있었다. 그 밑으로는 당대에 운행된 열차들이 아기자기한 미니어로 만들어져 전시돼 있었다. 다른 전시관도 여러 개인데, 열차를 주제로 한 앨범과 책을 바닥에서 거의 천장까지 닿도록 벽면에 전시해 둔 곳이 흥미로웠다. 한국이라면 김수희의 <남행열차> 앨범이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DVD가 놓였을 것이다.

미리 예약한 덕에 철도의 하루를 일본어 설명을 곁들여 미니 열차의 운행으로 보여주는 디오라마도 볼 수 있었다. 디오라마 뒤 스크린에는 실제 사진이 영사되고 있었는데 디오라마가 끝날 때쯤 철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고됨과 노동의 가치를 다룬 것일까' 감탄했는데 웬걸. 유튜브에서 한글 자막 영상으로 다시 보니 해당 부분의 설명은 '철로 공사를 밤중에도 진행해 열차 운행 중단 없이 해냈다'는 것이었다.

▲ 동일본 JR 철도박물관 2층에서 내려다본 1층 메인 전시장. ⓒ프레시안(최용락)

동일본여객철도주식회사 철도 노동자와 한국철도공사 노동자 간 교류회가 다음 일정이었다. 교류회에서는 1987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가 추진한 국유철도 분할 민영화와 노동조합의 대응, 한국 철도노조의 현재 등에 대한 발표와 간단한 질의응답이 있었다. 교류회 말미 일본 철도 노동자들은 2006년 시작돼 10년여 간 계속된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 투쟁의 당사자였던 정연홍 철도노조 교육국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타국 노동자의 아픔과 끈기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교류회 뒤에는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일본어를 못하는 나였지만 동년배 일본 철도노조 간부가 J팝과 한국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은 일본에 있던 내내 즐겨 듣던 요아소비를 꺼내 맞장구를 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양국 철도 노동자들은 역 인근 광장에서 넥타이, 뱃지, 음식 등 각자가 준비한 선물을 교환한 뒤 '한일 노동자가 함께 평화를 지키면 좋겠다'는 약속을 나누고 헤어졌다.

▲ 교류회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는 한일 철도 노동자. ⓒ프레시안(최용락)

하코네에서 탄 스위치백 열차와 강삭 열차

마지막 날 행선지는 도쿄 근교 오다와라역이었다. 이곳에서 하코네 등산철도 프리패스를 사면, 열차로 산을 오르기 위해 고안된 스위치백(Switch-back) 열차와 강삭열차라는 독특한 교통수단을 탈 수 있다. 프리패스로는 유황 광산이 내려다보이는 로프웨이와 아시코네호를 도는 유람선도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1일권을 끊었지만, 시간 여유가 있다면 2일권이나 3일권을 끊어 스위치백 열차의 운행이 끝나는 고라역에서 내려 온천이 있는 숙소에서 하루 밤 묵을 수도 있다.

오다와라역에서 다시 20분 정도 전철을 타고 등산철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하코네유모토역에 도착했다. 곧 빨간색과 은색으로 도색된 스위치백 열차가 승강장에 들어왔다. 스위치백은 열차가 철도를 따라 경사 구간을 오르다 한쪽 끝에 다다르면 잠시 멈춘 후 그간 왔던 반대 방향으로 다시 경사 구간의 철도를 오르는 운행 방식이다. 해발 108m 하코네유모토역에서 해발 541m 고라역까지 333m 높이를 15km 길이의 철도로 오르는 동안 열차는 3번 방향을 바꿨다.

나는 몇몇 일행과 함께 박 기관사를 따라 함께 최초 출발 방향의 맨 앞에 있는 차량에 탔다. 그 덕에 전면 조종석 뒤편에 뚫린 유리창 너머로 기관사와 차장이 스위치백 구간마다 자리를 바꿔가며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철로 위에서 정비 업무를 하던 노동자들이 옆으로 비켜 서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의자에 앉아 하코네산의 풍경과 가끔 나오는 민가를 보고 있자니, 함께 온 청년 기관사가 "이 열차를 몰아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며 남다르지만 공감 가는 감상을 꺼냈다.

스위치백 열차의 종착점인 고라역에 도착하면 강삭열차가 보인다. 이 열차는 해발 541m 고라역에서 해발 757m 소운잔역까지 116m 높이를 1.2km 길이의 철도를 타고 단번에 오른다. 동력은 소운잔역 승강장에 설치된 도르래다. 이 도르래가 열차에 연결된 강철 케이블을 감았다 풀었다 하면 열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다. 열차의 모양도 특이하다. 철도의 경사 그대로 대각선으로 만들어져 있다. 내부는 계단형인데 한 층마다 2인석이 배치돼있다.

로프웨이를 타고 산을 넘어 점심으로 아시코네호를 도는 유람선을 탈 수 있는 항구에 도착했다. 승착장 옆 건물에 있는 식당에서 오므라이스를 먹고 배를 타려는데, 3층 계단을 빙 둘러 그 바깥까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알고 보니, 미국인 단체 관광객이 유람선을 타기 위해 대거 몰려와 있던 것이었다. 돌아가는 열차 시간 때문에 유람선을 포기해야 했다. 아쉬움을 달래며 우에노역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단체 일정을 모두 마쳤다.

▲ 철도의 경사를 따라 대각선으로 만들어진 강삭열차. ⓒ프레시안(최용락)

비 오는 전철역에서 본 자전거 탄 사람

끝으로 여행의 거점이었던 우에노역에서 겪은 일 하나를 이야기하려 한다. 일본 철도 노동자교류회가 있던 둘째 날, 우에노역으로 돌아오니 한국에서도 종종 겪는 예보에 없던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 사기가 아까워 멍하니 비가 멎기를 기다리는데, 20분쯤 지났을까.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한 손으로 우산을 든 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보였다.

이 풍경을 여행 전에 그려본 적이 있다. 지금껏 '철덕'으로 소개한 박 기관사는 사실 저서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의 말미에 최고의 교통수단 1위로 자전거를 꼽아 나를 놀래켰다. 물론 2위는 철도다. 기후위기의 시대, 원거리를 철도로 근거리를 자전거로 연결하는 교통망이 구축되는 것은 그의 오랜 꿈 중 하나다. 이번 여행 중에도 그는 서울에 비해 차가 적은 도로와 전철역 인근 자전거 주차장을 넌지시 강조했었다.

일본은 그런 교통망 구축에 앞장서는 나라 중 하나다. 철도 길이는 약 3만km인데 이는 훨씬 넓은 땅을 가진 브라질, 캐나다, 호주에 맞먹는다. 영토 면적 대비 철도 길이가 일본보다 긴 나라는 독일뿐이고 한국은 일본의 60% 수준이다. 철도 여객수송분담률 세계 1위 국가도 일본이다. 일본의 자전거 이용률도 2015년 기준 19%로 세계 3위였다. 이는 자동차 이용률 14%보다도 높다.

그러니 그날 비 내리는 우에노역에서 본 풍경은 박 기관사가 철도의 다양성, 매력과 함께 이번 여정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계획에 없던 일이 어떤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이제 나도 일본을 생각하면, 애니메이션, J팝과 함께 철도와 자전거가 떠오른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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