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저격 ‘83세 거장’ 칼에 찔려…‘신성모독’ 맹비난 받은 이 남자 [나쁜 책]
1994년 10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83세 노인이 청년이 휘두른 칼에 목이 찔립니다. 청년은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배신자요!” 목숨은 건졌지만 신경 일부가 손상된 노인은 죽을 때까지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할 만큼 크게 다쳤습니다. 단순 강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노인의 이름은 나지브 마흐푸즈, 198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였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가 노벨문학상 작가를 노려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왜 ‘배교자’를 운운했고, 어떤 악감정으로 노작가를 찾아갔을까요. 테러 사건의 시작점이었던 이집트 대문호 나지브 마흐푸즈 장편소설 ‘우리 동네 아이들(Children of the Alley)’을 여행합니다
중심 인물은 자발라위란 남성입니다. 자발라위는 허허벌판 황무지였던 땅을 혼자 힘으로 개간했습니다. 자발라위에겐 두 가지 소문이 뒤따랐는데, 하나는 그가 ‘깡패’이자 ‘독재자’같은 성격이란 설(說)이었고 또 하나는 그가 자손을 지극히 사랑하는 할아버지란 평(評)이었습니다.
자발라위는 자신이 일궈낸 부동산을 후손에게 맡기고 대저택 안에 은둔하는 절대자였습니다. 10가지의 상속조건만 지키면 그의 부동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지요. 자발라위는 얼굴을 잘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의 권능을 모두가 두려워 했고 그의 힘을 추앙했습니다.
부친 뜻에 순응한 아드함은 부동산 임대료를 걷는 소임을 다합니다. 하지만 아드함의 평화도 잠시였습니다. 아드함은 아내 우마이마 꾐에 빠져 아버지 자발라위가 써둔 유언장을 미리 엿봅니다. 자신들이 땅을 상속받을지에 대한 유언장이었습니다.
아드함의 이런 행동에 자발라위는 진노하고, 부부는 대저택에서 퇴출됩니다. 아드함은 죽는 날까지 아버지 자발라위의 용서를 얻지 못했으며, 평생 수레를 끄는 노동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자, 이쯤에서 눈치채셨겠지요? 위 내용은 구약성경 ‘창세기’ 패러디입니다. 대저택 주인 자발라위는 신(神), 아드함은 아담, 아내 우마이마는 이브를 뜻합니다. 자발라위의 평화로운 대저택은 에덴동산, 아드함과 우마이마가 훔쳐본 유언장은 금단의 과실 선악과, 이드리스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소재와 설정 전체가 성서를 비튼 내용들입니다.
먼저 자발은 한 부잣집의 양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발은 자신이 인근 빈민층 마을 출신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발은 양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빈민층 마을 주민의 명예와 재산권을 보장해주고, 또 저들이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생활하게 해달라”고 말이지요. 자발의 뜻은 거절당합니다. 결국 자발은 동네에 일부러 뱀을 창궐하게 만든 후 소탕해주는 대가로 ‘주민 해방’의 뜻을 이룹니다.
리파아는 이런 말까지 하고 다닙니다. “재산과 부동산은 아무것도 아니며,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동네에 진실로 필요한 건 자비와 연민이다.” 하지만 마을 지도자를 비판했던 리파아는 의심과 탄압을 받게 되고, 결국 몽둥이로 가격 당해 희생되고 맙니다.
리파아가 사망하자 그의 친구들은, 리파아가 생전에 부르짖던 사명을 세상에 ‘부활’시키는 일에 남은 모든 생을 겁니다. 그 덕분에 죽은 리파아는 살아서는 꿈조차 꾸지 못한 후손의 존경을 받습니다. 급기야 ‘아직 살아 있는’ 자발라위가 리파아를 너무나도 아껴, 그의 시신을 대저택에 묻었다는 소문까지 돕니다.
짐작하시겠지요? 리파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혹시라도 천주교 행방을 궁금해하실 수 있는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규정하는 종교 모두를 통칭합니다.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를 아우르는 단어가 기독교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대저택은 여전히 조용합니다. 까심이 사는 동네 주민들은 불행합니다. 극빈층과 부랑자들이 모인 하층민 집결지였거든요. 그들은 자신들 역시 대저택의 주인 자발라위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지만 밥벌이는 고달픕니다. 더구나 자발 구역 주민, 리파아 구역 주민과 달리 까심 동네 주민은 자발라위로부터 아무런 유산 상속도 받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까심은 자신이 자발라위를 모시고 있다고 주장하는 유령을 만납니다(무함마드와 천사 가브리엘의 만남을 은유). 까심은 유령의 말을 빌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자발라위의 자녀이고, 자발라위의 재산은 우리 동네 사람들의 공동 재산”이라고 주장합니다.
무함마드가 40세였던 610년에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신(알라)의 뜻을 접하고, 세를 불려 메카의 대상(隊商)을 습격하거나 한다크 전쟁 끝에 도시를 함락시켰던 역사적 사실이 소설 ‘우리 동네 아이들’에서 변용되어 서술됩니다. 이렇듯 나지브 마흐푸즈의 소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자발라위와 그의 아들 아드함, 그리고 후손인 자발, 리파아, 까심 등 다섯 인물을 통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궤적을 압축적으로 한눈에 조감하도록 하는 걸작입니다.
사실 책을 유심히 읽어보면, 무슬림이 분노할 만한 은유와 상징이 소설에 일부 담긴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까심이 살아가는 동네를 ‘족보를 알 수 없는 부랑자 마을’로 묘사한 데다, 마을을 통치하는 지도자들의 사악함을 꼬집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용이 아닌 ‘형식’이었습니다.
무슬림 경전인 코란은 원문의 본뜻이 훼손될 우려 때문에 윤색이 사실상 불허됩니다. 코란은 문자 그대로, 그 자체로 암송의 대상인 신성한 책입니다. 그런데 아랍권인 이집트 출신 작가가 무함마드 생애를 다시 썼으니 무슬림 입장에선 수용이 불가했던 것이겠지요. 나지브 마흐푸즈를 찌른 청년 입에서 “배교자(종교를 배신한 자)”란 말이 튀어나온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1988년 스웨덴 한림원이 나지브 마흐푸즈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합니다. 아랍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1901년 제정된 노벨상 역사에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단 한 명의 아랍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추가되지 않았으니, 노벨상 122년 역사에서 나지브 마흐푸즈만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벨상 수상 6년 후 ‘금서의 작가’ 나지브 마흐푸즈는 위에서 언급한 테러를 당합니다. 1959년에 쓴 책이 무려 반세기 지나 그의 목을 찌르는 ‘잘 벼린 칼’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이제 본질적인 질문이 불가피합니다.
과연 이 책이 이슬람교를 모독하는 소설이 맞을까요?
우선 저 소설에는, 유대인과 크리스천도 수용하기 힘든 내용이 상당수입니다. ‘민족 영웅’ 자발(모세)을 선악의 경계에 선 인물로 그렸고, 특히 리파아(예수)는 악령을 쫓는 퇴마의식을 배워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또 무엇보다도 리파아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며, 그가 생전에 주장했던 ‘사명’의 부활이란 점도 기독교 교리에 어긋납니다.
아울러, 나지브 마흐푸즈가 이 소설을 쓴 결정적 계기는 당대의 정치적 현실, 즉 1952년 발생한 ‘나세르 혁명’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엔 혁명의 당위성에 공감했던 나지브 마흐푸즈의 시선은, 점차 나세르 혁명의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부정적 측면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세르 혁명은 1950년대 후반부에 이르러 초기의 정당성과 멀어지는 양상을 보였고 이 과정에서 구금, 투옥, 탄압 등이 문제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책 ‘우리 동네 아이들’ 제2권 해설엔 나지브 마흐푸즈가 쿠웨이트 일간지 ‘알까바스’와 나눈 인터뷰 내용 일부가 수록됐는데, 여기엔 작가가 ‘우리 동네 아이들’을 집필했던 본뜻이 담겼습니다.)
◎ “처음 내게 마음의 평화와 확신을 주었던 1952년 혁명이 길을 잃기 시작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탄압과 고문, 투옥이 그랬다. 난 혁명 지도자들에게 선지자의 길 아니면 폭력배의 길, 둘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고 싶은지 묻고 싶었다.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예술적 뼈대를 제공했지만 내 의도는 혁명과 지금의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나지브 마흐푸즈의 말, ‘우리 동네 아이들’ 제2권 360쪽)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악랄한 수탈자에게 억압 당하던 인물이 고통 끝에 혁명에 성공하면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대개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오래 전 몰아냈던 바로 그 수탈자의 얼굴이 되어, 누군가를 억압하는 모순이 반복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자발), 예수(리파아), 무함마드(까심)는 권력에 도취되지 않았고, 끝내 자신의 초심을 지켰기에 위대한 초인으로 남았습니다. 따라서 책 ‘우리 동네 아이들’은 나세르 혁명에 성공한 군부 출신 지도자들에게 깡패 같은 지도자로 타락하지 말라는 경계심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책 ‘우리 동네 아이들’은 오독(誤讀)되었고, 작가는 이슬람교 전체를 부정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치명적인 테러 피해를 입었지요. 그런데, 무슬림의 극단주의자 테러가 과거일 뿐일까요. 극단주의자의 테러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살만 루슈디처럼 말이지요.
신이 허락한 ‘약속의 땅’을 자발라위의 부동산 임대사업으로 패러디했다는 점, 부동산을 임차하는 조건이 사람마다 다른데 상세한 계약조건은 오직 임대인 자발라위 본인과 임차인 당사자만 안다는 점도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간절한 성원의 성취와 그에 상응하는 조건은, 기도 중인 인간과 그 기도를 들어주실 신만이 공유하는 문제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 책을 한 번 손에 쥐었다면, 부디 끝까지 완독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로 자발, 리파아, 까심에 이어 네 번째 주인공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④소설 속 최후의 인물 아라파입니다.
(※여기서부터 매우 중요한 결말 스포일러가 있으니, 책을 읽으실 분은 뒤로가기를 클릭하세요.)
그런데 아라파가 자발라위의 대저택에 들어가자, 놀랍게도 자발라위가 죽.은.채. 발견됩니다.
아라파는 ‘과학’을 상징합니다. 아라파가 대저택에서 탈취하려는 비밀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과학을 의미하지요. 인간이 신을 ‘살해’한 걸까요. 아니면 너무 노쇠한 신의 ‘자연사’일까요. 그런데 소설 속 표현처럼, 정말로 신이 죽은 게 확실한 걸까요.
소설 속 자발(모세)의 한 마디를 기억하면서 글을 맺으려 합니다. 대저택에 은둔하며 침묵하는 자발라위에게, 후손 자발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발라위, 당신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의가 점점 더 지독해지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침묵하실 겁니까?”(제1권, 201쪽)
유대교의 야훼(YHWH)와 엘로힘, 기독교의 하느님과 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 등 아브라함 계통에서 지칭하는 모든 신의 이름이, 실은 처음엔 서로 같았던, 단 하나의 공통된 유일신을 가리킨다는 자명한 사실 말입니다.
소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처럼 본래 하나였지만 지금은 너무도 다른 길을 걷는 인류가 다시 하나가 될 가능성, 그런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걸작입니다.
※다음주에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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