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샤넬과 러시아 젬추지나… 극단의 두 여인, 향기는 ‘쌍둥이’

곽아람 기자 2023. 12. 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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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같은 두 향수로 본 냉전시대

제국의 향기

카를 슐뢰겔 지음|편영수 옮김|마르코폴로|240쪽|2만원

“잘 때 뭘 입냐고요? 물론 ‘샤넬 넘버 5′죠.”

1921년 5월 5일 파리에서 출시된 샤넬 넘버 5는 1950년대 초 마릴린 먼로가 남긴 이 말 덕에 세기의 향수로 등극했다. 뭇 여성들의 ‘로망’인 동시에 서구 자본주의와 소비의 상징으로도 여겨졌다. 그런데 샤넬 넘버5의 ‘어머니’가 제정 러시아 출신이라면? 그뿐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샤넬 넘버 5의 ‘쌍둥이’가 탄생했다면? 독일 저널리스트이자 동유럽 역사 전문가인 저자는 이 두 가지 아이디어에 착안해 이야기를 끌고 간다. “모든 시대는 각각의 방향(芳香), 향기, 냄새를 갖고 있다. ‘극단의 세기’는 그 나름의 냄새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혁명, 전쟁, 내전도 후각과 관련된 사건이다.”(17쪽)

1913년 러시아 제국. 프랑스 향수 회사 랄레의 수석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가 로마노프 왕조 수립 300주년을 기념한 향수를 제조한다. 예카테리나 2세(1729~1796)가 애용하던 향수를 개량해 만든 이 향수의 이름은 ‘부케 드 카타리나’. 이듬해 이 향수는 ‘랄레 넘버 1′이라는 이름으로 재출시된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이 끝난 후 보는 프랑스로 귀환했고 샤넬의 연인이었던 러시아 황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로마노프의 주선으로 1920년 칸에서 샤넬을 만난다. 보가 건넨 10개의 향수 샘플 중 샤넬은 넘버5를 선택했고, 이는 이후 ‘샤넬 넘버 5′라는 브랜드로 출시된다. 저자는 이 샤넬 넘버5가 ‘랄레 넘버 1′의 리메이크 버전이었다고 주장한다. ‘랄레 넘버 1′과 마찬가지로 북극의 공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 전통적인 꽃향기가 아니라 알데히드를 합성해 만들었다는 것 등이 근거다.

러시아에서 활동한 또 다른 조향사 오귀스트 미셸은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에 남았다. 그는 혁명 이후 국유화된 향수 회사에서 일했다. 볼셰비키는 향수를 뿌리는 것을 부르주아적인 생활 행태로 낙인찍었지만 내전 종식 후 등장한 ‘새로운 계급’은 소련 고유의 향수를 필요로 했다. 1927년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해 미셸이 만든 ‘크라스나야 모스크바’(영어로 ‘레드 모스크바’)가 시장에 나온다. 저자는 이 향수의 모태 역시 ‘부케 드 카타리나’라고 본다. 미셸과 보가 같은 스승에게 배웠고, 미셸이 한때 랄레에서 일했기 때문에 ‘부케 드 카타리나’의 제조 방식을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냉전 시대를 살았던 두 여인의 삶이 각각의 향수와 겹친다. 코코 샤넬과 스탈린의 외무장관이었던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다. 젬추지나는 소련의 향수·화장품 산업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1932~1936년 국가 향수 기업 연합인 ‘테제’의 우두머리였고, 1936년 7월부터 향수·화장품·비누 산업의 주요 부서를 관리했다. 레드 모스크바 병(甁)에 크렘린궁 지붕을 닮은 마개를 씌운 장본인이라 전해진다.

빈곤한 유대인 거주지 출신으로, 시온주의자라는 이유로 1948년 숙청당했지만 평생을 열렬한 스탈린주의자로 살았다. 고아라 젬추지나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반유대주의자에 볼셰비키의 정책을 혐오했던 샤넬과는 대비된다.

분단된 베를린에 살았던 저자는 장벽을 넘을 때마다 ‘냄새의 풍경’이 상이하면서도 겹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80년대 소련에서 공부할 때 오페라, 취임식 등 중요한 행사장을 점령한 하나의 ‘냄새’에 주목했다. 그 향기 ‘레드 모스크바’는 냉전 종식 후 젊은이들에게 ‘할머니 냄새’라며 폄훼당했지만 현재는 소련 향수를 좋아하는 이들과 샤넬 넘버 5의 저렴한 버전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재창조되고 있다.

군데군데 논리의 비약이 있긴 하지만 아이디어의 기발함, 향수라는 감각적인 소재 덕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 지나간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냉전 시대의 두 풍경을 거울처럼 대비시키며 저자는 말한다. “이제 ‘극단의 세기’가 종식됐기 때문에 공통의 기원을 가졌지만 평행선을 달렸던 그리고 종종 마주 보고 진행됐던 역사를 조립할 시간이 됐다.”(224쪽) 원제 Der Duft der Imper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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