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국 친해져선 안 돼” 청·일의 개화정책 방해 공작
━
[근현대사 특강] 조미수교의 역풍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일본은 1868년 9월 메이지 왕정복고로 근대국가 만들기에 나섰다. 조선은 같은 시기에 대원군의 쇄국으로 ‘서양 오랑캐’를 거부했다. 1873년 고종이 21세로 친정에 나서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종은 일본이 황제를 칭하는 것은 타국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청국도 ‘신의 속도(神速)’로 달리는 서양 배를 사들이는데 우리만 문을 닫고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1875년 일본과의 조약 체결에도 능동적으로 대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이미 정부 고위 관리들이 대규모 구미 시찰단을 꾸려 무려 22개월간 미국과 유럽의 신문명을 눈으로 보고 왔다.
조선, 청나라 책봉·조공 체제 탈피 꿈꿔
1881년 고종은 일본에 조사(朝士) 시찰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변화상을 살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가질 구미 열강과의 수교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 수집이었지 근대화 모델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어 접촉한 미국에 쏟는 관심이 훨씬 진지했다. 1880년 봄 미국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 제독은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일본 외무성에 조선과의 교섭에 도움을 청하였으나 협조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함을 몰고 부산항에 와서 일본 영사를 통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조선 정부에 전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청국을 의식하여 일본을 통한 교섭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슈펠트는 귀국하였다가 이듬해 가을 다시 와서 톈진에서 청국 정부에 중개를 요청하여 북양대신 이홍장의 호응을 받았다.
1882년 5월 조선과 미국 양국 전권대표가 제물포 바닷가 언덕에 천막을 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고종은 이때 최초의 태극기 도안을 미국 대표 슈펠트에게 건넬 정도로 구미 국제사회에 조선이 독립국으로 알려지는 것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한 달여 뒤 쇄국주의자 대원군이 군란을 일으켜 재집권을 노렸다. 청국은 이를 달아나는 조선의 뒷덜미를 잡는 호기로 삼았다. 아들이 어렵게 닦은 길을 아버지가 망쳐 놓는 순간이었다. 조선 문제 총책인 북양대신 이홍장은 청국 천자는 책봉주(主)로서 피(被)책봉 조선 군주를 위협하는 군란을 좌시할 수 없다는 핑계로 천자의 친위군 4000여 명을 한성에 보내 대원군을 붙잡아 압송했다. 그리고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이란 것을 칙령처럼 내리고 위안스카이를 ‘총리통상교섭사의’로 임명하여 서울에 상주시켰다. 위안스카이는 대국의 상무관을 자처하면서 청나라 상인의 조선 내륙 상행위를 보호하고 조선이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힘겨운 여정에 일본이 고난을 보탰다. 미국과의 수교에 일본이 제2의 방해자로 등장했다. 1883년 6월 보빙사 일행은 일본 도쿄를 거쳐 미국행 배를 탔다.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일본 정부에 요청하여 외무성 추천 통역자(미야오카 츠네지로: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학생, 1887년 외무성 입성, 미국공사관 근무 맹활약)를 대동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일본어를 아는 유길준과 이중 통역으로 의사소통했다. 보빙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워싱턴 DC, 뉴욕, 보스턴 등지를 거치면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머무는 곳마다 시장, 군사령관, 상공회의소장 등이 나와 각종 시설을 안내하였다. 체스터 아서 대통령은 민영익에게 해군 함정을 내주면서 유럽 방문을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일본인 통역은 이 사실들을 낱낱이 본국 정부에 보고하였다. ‘주변국 선점’ 정책을 국시로 만들어 가던 일본 정부는 미국이 조선의 우방으로 미리 자리 잡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고종, 미 대표에 최초 태극기 도안 건네
1894년 2월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홍종우에 의해 살해되고, 그 시신이 양화진 강가에 놓였다. 시신 옆에 ‘대역부도 죄인’ 휘장이 나부꼈다. 한강으로 오가는 일본인들이 보게 하였다. 고종은 바로 이어 4월에 김옥균 외 다른 정변 연루자에게는 ‘대사령’을 내렸다. 그들의 해외 체험을 국정에 활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청일전쟁 중에 박영효, 서광범 등이 차례로 귀국하여 고종의 1894년 12월 내각 구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김옥균만은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대한제국기 항일 사회운동가 윤효정(1858~1939)은 『풍운한말비사』를 남겼다. 주로 인물에 얽힌 얘기들이어서 정사 자료로 바로 쓰기 어려운 것도 있으나 김옥균에 관한 얘기 하나(『토막 난 옥로 기념』)는 눈여겨 볼만하다. 윤효정은 어느 날 인척인 심상훈 대감 집을 찾았더니 대감이 참담한 기색이었다. 오늘 임금이 주신 것이라며 반 토막 난 옥로 (해오라기 모양 갓 머리 장신구)를 내놓고 임금이 하신 말씀을 들려주었다. 갑신년 10월 18일 아침 세수와 머리단장을 마치고 앉아 있는데 김옥균이 칼을 차고 배회하다가 갓머리 옥로를 보고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칼로 쳐서 깨트린 것이니 경이 이것을 가져가 ‘경우궁 당일’을 기념하라고 하셨다고 했다. 이를 듣고 좌중은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소리 내어 우는 자도 있었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맺었다. 다른 사료로 뒷받침되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진실 여부를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얘기들이 퍼졌음직한 분위기는 읽을 수 있다.
1910년 봄 서울의 일본 기자들은 김옥균을 ‘개화의 선각자’로 추켜 올렸다. 그리고 8월 ‘강제 병합’ 후, 갑신년에 김옥균이 집권했더라면 조선이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엇갈리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가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로 이어지고 훗날 국권 상실로 연결된다는 논리의 상당 부분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죽은 김옥균까지 일본은 이용하려 했으니 말이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