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껏 내리면 깊어지는 맛…찻잔을 들면 향기가 들린다 [ESC]

한겨레 2023. 12. 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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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커버스토리]커버스토리 차 즐기는 사람들
낯설고 유구한 역사 ‘디깅’할 만…젊은층에도 매력적 취미
차 도구·물 온도·우리는 방식 따라 맛 달라지는 ‘창작의 영역’
차 한모금에 세상과 분리 ‘명상’ 효과…일상의 균형 잡는 마법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티하우스 ‘산수화’에서 열린 차회에서 한국을 방문한 대만인 이소매 다예사가 중국 송나라 시대 다법 중 하나인 ‘송대칠탕다법’으로 차를 우리고 있다. 홀리윤 제공

몇주 전, 요가 선생님이 내려준 보이차를 마시며, 나는, 지금 여기 있는 행복을 찾아 먼 곳을 돌아왔구나, 깨달았다. 진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소한 기쁨에 관한 것. 차는 나를 깨우고 깨닫게 해주며 사랑하도록 도와준다. 물론 주관적인 의견이다. 그 공간에는 나를 포함 10여명 정도가 있었는데 다들 즐거워 보였다. 그 순간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차는, 찻잔 안의 액체가 아니라, 공간을 채우는 공기, 감정, 온도, 말과 침묵. 이 모든 것의 우아한 결합이라는 것.

“예쁜 차 도구 보는 것만으로 행복”

차를 즐기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젊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그렇듯 어설프고 부정확하며 무엇보다 불필요하게 세대를 구분 짓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남녀노소’ 차를 즐긴다. 차에 대한 최근의 트렌드는, 일단 마시는 사람이 늘어났다. 차를 업으로 삼는 사람도 늘었다. 이 중엔 20~30대도 있다. 한 가지 더 두드러진 변화는, 차를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차 도구를 사 모으기도 하고, 대만이나 중국으로 차 여행을 가기도 한다.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티하우스 ‘산수화’에서 열린 차회에서 한국을 방문한 대만인 이소매 다예사가 중국 송나라 시대 다법 중 하나인 ‘송대칠탕다법’으로 차를 우리고 있다. 홀리윤 제공

“2014년에 제가 이 공간을 열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들어오셔서 쌍화차 없나요, 대추차 없나요, 물어보시고 나가셨어요. 일단 차에 대해 잘 모르시고, 관심도 적으셨죠.”

서울 한남동에서 티하우스 ‘산수화’를 운영하고 있는 정혜주 대표의 말이다. “지금은 아니에요. 백차나 보이차를 찾으시니까요. 얼마 전에 열었던 티 클래스에서는 20대 친구와 70대 노부부가 함께 수업을 들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최근의 변화는, 수업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이미 차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신다는 거예요.”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티하우스 ‘산수화’에서 열린 차회에서 차 도구를 만드는 작가이기도 한 대만인 정완완(가운데) 다예사가 차를 우리고 있다. 홀리윤 제공

차의 역사는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정혜주 대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명나라를 시간의 선 위에 올려 두고 대만과 일본과 조선과, 휴… 공간을 오가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나 내가 행복하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자 “아, 오늘 주제는 이게 아니죠”라며 웃었다. 다행히 이 글의 주제는 ‘몇년 사이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차를 좋아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이다. 전문가들, 즐겨 마시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이 현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차호(차를 우리거나 담아두는 도자기)나 개완(뚜껑이 있는 찻잔)의 뚜껑을 올려 두는 ‘개반’. 유리 공예가 정수경 작가가 작품을 만들면서 잘라낸 부분을 산수화 정혜주 대표가 차 도구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홀리윤 제공

첫번째. ‘디깅’(집중해서 파고들기)이 가능하다. 엠제트(MZ)세대 용어라 ‘차’ 기사와 안 어울리지만, 그만큼 차 문화는 그 세대가 매력을 느낄 요소가 많다. 위에도 적었듯 차의 역사는 유구하여 ‘파고 파고 또 파도’ 낯설고 새롭다. 차를 조금 아는 사람은 이 차가 어떠네 저 차가 어떠네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차를 깊이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말이 섣부르다는 것을 안다. 그만큼 광활한 주제여서.

두번째 이유 역시 첫번째와 이어진다. 차를 내리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부터 마시기까지, 일련의 흐름은 창작의 영역이다. 같은 종류의 차라도 도구, 물 온도, 내리는 방식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차 종류마다 맛에 대한 보편적 기준은 있으나 반드시 그렇게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차를 내리는 사람은 창작자로서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 도전할 수 있다. 정혜주 대표가 인상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녹차는 80도로 우리세요, 홍차는 100도로 우리세요, 이런 식의 조언이 저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맛없게 차를 우리는 방식인 거죠. 녹차도 종류가 많고 홍차도 종류가 많아요. 찻잎의 상태도 중요할 거고요. 어떤 도구로 몇 도로 우렸는지에 따라 차 맛은 달라집니다. 동일한 차도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로 길게 우릴 때와 높은 온도로 짧게 우릴 때의 맛과 향이 다르고요. 그래서 저는 티 클래스를 듣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오늘 내가 어떤 식으로 차를 마시고 싶은지를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도구, 물의 온도를 계획해야 해요.”

찻잎을 정리할 때 사용하는 ‘차시’를 올려놓는 형형색색의 유리 도구. 유리 공예가 김동완 작가가 달항아리를 만들면서 잘라낸 부분을 산수화 정혜주 대표가 차 도구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홀리윤 제공

도구에 대해 부연하자면, 역시 이것도 ‘디깅’의 영역이다. 재질과 형태가 다른 도구들이 너무 많다. 산수화 티하우스에서 만난 한 고객은 “도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예쁜 도구들이 너무 많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도구들이 진열된 곳을 보았는데, 1초 만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자와 백자는 물론이고 유리와 아크릴로 만든 도구도 있었다. 달항아리 모양의 작은 주전자(‘자사호’라고 부른다)는 크기별로 사서 모으고 싶었다. 이런 도구들로 자신만의 찻자리를 꾸미는 것은, 음, 캠핑 마니아가 캠핑 장비를 고르고 그 장비로 설치를 마친 후 의자에 앉아 쉬며 뿌듯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찻잎에 응축된 바람과 햇살과 공기

세번째는 몰입. 차를 내리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몰입하게 된다. 내리는 사람이 몰입하게 되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찻잎은 섬세하고, 도구들은 깨지기 쉽고, 물은 뜨겁다. 게다가 이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은 미세한 차이가 맛을 달라지게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테니 몰입은 당연하다. 그런데 마시는 사람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찻잔을 집어 들면 누구나 차를 느끼기 위해 몰입하게 된다. 그 순간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주변과 분리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이것은 명상과 비슷하다. 또한 디깅이 주는 행복과도 비슷하다. 디깅을 하는 건, 그 순간 다른 모든 것에서 분리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차를 내리고, 마시는 짧은 순간 역시 그렇다.

산수화 정혜주 대표가 지난달 25일 열린 차회에서 참석자들에게 마실 차를 소개하고 있다. 홀리윤 제공

산수화 막내 직원 김소영씨는 이날이 정식 근무 첫날이었다. 차를 내리면 마음이 편해져서 이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차를 내리는 시간은 온전히 나를 보듬어주는 시간 같아요. 다른 사람에게 내려줄 때는 기분도 더 좋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져요. 대부분 행복한 대화예요.”

‘차회’라는 게 있다. 숙련된 전문가가 자신의 행다(차 내리는 행위)법으로 차를 내려주는 모임 같은 거다. 산수화에서 열린 차회에서 만난 최선우(‘매거진B’ 에디터)씨는 차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차와 행다에 깃든 낭만을 좋아합니다. 예컨대 문향배라는 도구가 있습니다. 문향배는 향을 맡기에 좋은 도구인데 ‘향을 듣는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찻잎은 응축된 시간, 그 시간 안엔 생명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비와 바람, 햇살과 어둠, 공기 그리고 흙의 성질이 담긴다. 차를 내리는 건 이런 시간의 마음을 여는 것. 자극에 응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닿게 하는 것.

요가 강사이자 명상가인 ‘도시명상’ 임보미 대표는 말한다.

“상대를 위해 차를 내릴 때는 사랑을 담아요.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이런 마음으로 차를 내리면 정말 더 맛있어지는… 걸까? 언젠가 요가를 마치고 그녀가 내려주는 차를 마시고 엉엉 운 적이 있다. 추운 날이었는데, 몸 안으로 들어가는 따뜻한 기운이 웅크렸던 감정 특히 서운함과 소심함 같은 것들을 살살 건들더니, 녹여버렸다. 그 차 안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 적으면 감상적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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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 같은 호박차’ 맛은?

산수화에서 열린 차회에서 대만인 이소매 다예사가 ‘송대칠탕다법’으로 차를 우리고 있다. 홀리윤 제공

‘맥파이앤타이거’는 2019년 시작한 차 브랜드다. 이 브랜드는 차를 쉽게 소개한다. 흔히 ‘차’라고 하면 형이상학적인 한자가 적힌 종이에 싸여 있을 것 같다. 점원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종이 뭉치를 꺼내 조심스럽게 펼칠 것 같다. 반면 맥파이앤타이거의 차를 담은 봉투, 종이 상자 등 모든 포장재는 따뜻한 톤의 하얀색이다. 그 자체로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겉면에는 팔각 문양 안에 까치와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익숙하고 귀엽고 동시에 전통적인 분위기도 느껴진다. 이 로고는 브랜드의 지향점을 드러낸다. 차를 친절하게 소개하되, 본질을 잃지 않는 것. 극찬하는 것 같은데, 사실 이 브랜드가 소비자와 대화하는 방식은 이전의 차 문화에서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 부연하자면 이런 것. ‘호박차 티백’ 포장에는 차 이름 앞에 ‘달콤한 조청 같은’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쑥차 티백’ 포장에는 ‘은은한 밀크초콜릿 같은’이라고 적혀 있다. “문턱을 낮추고, 매력을 살짝 강조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방향을 사랑해요.” 맥파이앤타이거 김세미 대표가 말했다. “티백을 출시할 때에는, 패키지에 적힌 이름만 보고도 궁금해지는지를 고민했어요. ‘보이숙차’는 조금 어렵게 느껴지지만 ‘잔잔한 나무 향’은 궁금하지 않나요?” 차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문구를 읽으면 맛보고 싶어진다.

맥파이앤타이거 성수 티룸. 차를 주문하면 차를 우릴 차 도구를 함께 내어준다. 맥파이앤타이거 제공

김세미 대표의 언어를 곱씹는 사이 정혜주 대표가 해준 말이 재생되듯 귀에 들렸다. “차를 마셔보면 차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확신에 찬 음성. 중요한 건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맥파이앤타이거 성수동 티룸에서 음료를 주문하면, 차를 우린 주전자 모양의 도구와 차를 옮겨 담은 유리팟 그리고 찻잔을 함께 내어준다. 주전자에는 온기가 남은 찻잎이 담겨 있다. 그 향을 맡으며 유리팟에 담긴 차를 찻잔으로 옮길 때의 기분은 신선하고 설렌다. 그 순간의 물소리는 아름답다.

“때로는 도구가 태도를 정의하기도 하거든요. 잘 차려진 찻자리는 목소리의 톤마저 조절해줘요. 차 도구를 사용하고, 손님들에게 내어드리는 이유가 있어요. 차 도구는 바라만 보아도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김세미 대표의 말. 그녀는 이렇게 좋은 걸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건강해질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어요.”

차와 건강. 이러한 귀결은 동시대에 필연적이다. 차고 넘치는 정보. 온종일 케이티엑스(KTX)에 탄 것 같은 속도. 삶의 균형을 잡는 것 자체가 묘기같이 느껴진다. 차를 내리고 마시는 행위가 잠시나마 복잡한 것들을 지우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도록 도와준다. 부디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도 경험하면 좋겠다. 놀랍게도 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은 늘 함께 마시자고 말한다. 좋은 마음이 차가 되는 걸까.

이우성 시인·슈퍼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크루 ‘미남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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