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없고 배송도 안돼… 전국 곳곳 ‘식료품 사막’

포천/이태동 기자 2023. 12. 1.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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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고령화로 문제 더 커져
‘트럭 마트’ 앞에 줄 선 어르신들 - 지난달 23일 경기 포천시 자작동 자작1통 주민들이 2주에 한 번씩 찾아오는 포천농협의 ‘이동형 트럭 마트’ 앞에 물건을 사기 위해 줄 서 있다. 근처에 신선식품과 생필품을 살 수 있는 마트나 편의점, 수퍼마켓이 없는 이곳 주민들은 트럭 마트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장련성 기자

지난달 23일 오전 10시쯤 경기 포천시 자작동 자작1통 마을회관 앞. 가로 4.6m, 세로와 높이 각각 2m의 직육각형 컨테이너를 매단 3.5t짜리 트럭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어르신들이 하나둘 무릎을 짚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육중한 엔진 소리가 알람이라도 된듯, 주변 골목길에서도 장바구니와 손수레 등을 든 어르신들이 나타났다. 컨테이너 뚜껑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트럭 앞에 순식간에 입장 줄이 만들어졌다. 2주일에 한 번씩 마을을 찾아오는 ‘이동형 마트’를 기다려온 마을 어르신들의 오픈런(매장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듯 구매하는 행위)이었다.

어르신들은 계란, 돼지고기, 두부, 귤 등 신선 식품은 물론, 휴지, 고무장갑, 세제 같은 생활용품까지 원하는 제품을 사 들고 왔던 길로 하나둘 사라졌다. 지팡이를 짚어 손이 부족한 노인들은 마트 직원의 도보 배달 서비스를 이용했다. 귤 한 팩을 산 주민 유관현(80)씨는 “주변에 있는 구멍가게에서는 음료수나 일반 공산품만 팔아, 면허를 반납해 운전이 불가능해진 3년 전부터는 거의 트럭에서만 먹을 거리를 장 보고 있다”고 했다. 장경섭(79)씨는 “노인들이 한 번 시내에 나갔다 오려면 반나절은 훌쩍 지나가는 데다 무거운 것들을 들고 움직이기도 힘들어 ‘마트 트럭’이 오는 날을 손꼽는 주민이 많다”고 말했다.

◇빠른 고령화에…한국에도 생겨나는 ‘식료품 사막’

주민들 평균 나이가 80세에 육박하는 이 마을은 ‘식료품의 사막’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채소나 과일, 우유 같은 신선식품을 살 수 있는 대형마트·편의점·수퍼마켓이 근처에 없다. 그나마 일부 품목이라도 신선식품이 비치돼 있는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마을 회관 기준 1km 떨어진 곳에 있어 건장한 성인도 도보로 왕복 30~40분 걸린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왕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노인들이 도시 젊은이들처럼 온라인으로 주문해 아침에 배송받는 것도 안 된다. 쿠팡이나 마켓컬리의 ‘새벽배송’ 서비스가 이곳에선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접한 포천농협 하나로마트가 2021년 7월부터 하루 네 곳씩 장보기 어려운 지역 40여 곳을 돌며 현장 마트를 열고 있다.

식료품 사막 현상은 도시 외곽 지역이나 노인 밀집 거주 마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게 마트 관계자들 얘기다. 젊은 세대가 없고 유동 인구가 적은 곳에는 식료품 상점이 새로 들어서지 않고, 기존 가게도 철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트럭이 오는 곳은 그나마 2주에 한 번이라도 혜택을 받지만, 다른 대부분의 농촌 마을에는 이런 시스템이 없다. 경남 거제, 전북 정읍, 충북 영동 등지의 농협이 포천을 벤치마킹하려 했으나 비용 등 문제로 원활히 진행되지 않았다. 공공 기관이나 일반 유통 기업이 나선 사례는 없고, 몇 명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통계나 연구도 찾기 어렵다.

◇고령화 빨랐던 해외선 정부 차원에서 대책 시행

한국보다 고령화 비율이 높은 일본, 미국, 영국 등에서는 이미 식료품 사막 현상이 사회 문제화됐다. 주민들이 신선식품을 먹지 못하고 가공 식품으로 끼니를 떼우는 경우가 늘면서 비만 등 성인병과 영양 불균형 문제가 불거졌다. 또 주민들 외출이 줄면서 사회적 고립을 겪는 경우도 생겼다.

일본에서는 경제산업성, 농림수산성 등 부처가 나서서 노인 중 ‘거주지 500m 내에 식료품점이 없는 경우’ 등을 ‘장보기 약자’ ‘쇼핑 난민’으로 정의하고, 현장 마트를 여는 유통 기업에 보조금을 주거나 이동형 마트 창업을 유도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최근엔 드론·로봇 배달 실험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장보기 약자는 80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미국도 농무부가 2350만명(2020년 기준)에 달하는 식료품 사막 거주 주민을 위해 영양 관리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신규 식품점 창업자에게 세금 지원을 하고 있다. 미국에선 도 기준 1마일(1.6km), 시골 기준 10마일(16km) 내에 식료품점이 없는 곳을 식품 사막으로 본다.

전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한국적 특성을 고려해 이제는 관심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21년 서울 지역 식품 사막화 연구를 진행했던 한양대 이수기 교수는 “정부가 ‘식료품 사막’ 현상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해외 사례를 참고해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료품 사막(food desert)

식료품 사막이라는 개념은 1990년대 영국 스코틀랜드 한 공공주택 지역의 빈곤한 주민들이 신선 식품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하면서 처음 나왔다. 사막에서 물을 찾기 어렵듯 식료품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뜻을 담은 말로, 영국·미국 연구진이 자주 쓰면서 세계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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