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엽기토끼야 울지마

유석재 기자 2023. 12. 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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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는 순자의 性惡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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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토끼'라 불렸던 한국 캐릭터 마시마로.

사회의 미묘한 현상을 놓치지 않고 짚어내는 게 특기이자 취미인 학교 선배가 있습니다. 그가 오래 전 지하철에서 목격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2000년 무렵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묵직한 가방을 든 한 남자가 지하철에 올라타더니 차량 가운데에 우뚝 선 뒤 가방 지퍼를 열었습니다. 요즘은 더러 “이번 역에서 즉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는 대상인 친숙한 직업을 가진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정도로 보이는 그 남자는 가방에서 인형 하나를 꺼내들었습니다. ‘마시마로’라고도 하고 ‘엽기토끼’라고도 하는 토끼인형. 재치있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통해 널리 알려진 캐릭터였습니다. 물론 모조품이 분명한 그 인형을 높이 치켜든 남자는 자신이 팔려고 하는 물건에 대해 무척 큰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차안에 계신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잠깐만요, 잠깐만요.(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거기까진 그저 대충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 키, 토, 키입니다. 워키토키…!”

승객들의 시선이 잠시 그 남자에게로 집중되더니, 이내 젊은 사람들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을 지으려 무척 애쓰더라는 얘깁니다. 그 선배는 아예 이를 악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어딘가 상당히 찜찜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건 단순히 찜찜한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단순히 문화적 코드의 유무(有無)로 구별되는 세대간의 단절?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다음의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1) 아무리 어려운 세상이고, 곤란을 극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라고 해도, 그래 최소한 자기가 파는 물건에 대한 기본적인 사전지식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도(商道)에 속하는 문제가 아닌가? 어쩌면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서 지독하고 맹목적인 배금주의(拜金主義)라는 서출(庶出)을 낳았고, 그 회오리바람 속에서 우리는 모든 기본과 상식을 잊어버리고 사는 건 아닐까?

2) 엽기토끼’? 엽기(獵奇)라니! 저렇게 귀여운 인형의 이름에 ‘엽기’라는 말이 들어가다니! 기괴한 것[奇]만을 골라 일부러 사냥하듯이 찾아다닌다[獵]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하는 사회가 도대체 정상적인 사회란 말인가? 이 도착적이고 변태적인 언어가, 영화 ‘사이코’에서의 앤서니 퍼킨스나 ‘양들의 침묵’에서의 앤서니 홉킨스 같은 캐릭터에게나 어울릴 말이, 예전같으면 신문지상에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끔찍한 사건을 표현할만한 단어가, ‘재미있다’ ‘개성있다’ ‘독특하다’ ‘섹시하다’ 정도의 의미로 아무렇지도 않게 남용되는 이 사회는 과연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일까?(물론 ‘엽기토끼’는 원래 그 캐릭터의 이름도 아닐뿐더러, 그 캐릭터 자체에 어떤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 캐릭터를 ‘엽기’라 지칭하는 사회에 병통이 있는 것일 뿐)

그 ‘엽기토끼’란 캐릭터는 2000년대 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캐릭터이자 요즘도 백화점에서 팝업스토어가 운영될 정도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여전히 잊히지 않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2005년에 발생한 양천구 신정동의 미제 살인사건은,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들에게 납치됐다가 탈출에 성공했던 다른 피해자가 그 다세대주택 2층 신발장 옆에 숨어있었는데 그 신발장에 이 캐릭터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엽기토끼 사건’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어쨌든.

2023년 7월 현대백화점 판교점 5층에 마련된 KCC-마시마로 팝업스토어 전경 /뉴스1

그냥 넘어가도 될 법한 문제에 대해 이렇게 ‘엽기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 의문은 결국 한 가지 회의로 합쳐졌죠.

“도대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말 제대로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모든 논의는 몇 천년 전 씌어진 유가(儒家) 방계의 한 고서(古書)로부터 출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人之性惡.

(인지성악).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인간이란 원래 나쁜 놈들이라고? 보이지 않는 주자학적 도그마가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 부지불식간에 미세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양으로 정신적 바탕 속에 선험적으로 내포돼 있는 우리로서는 이런 ‘선언’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선천적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을 잘 키워야 한다는 맹자적인 ‘착한’ 인성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네 글자는 매우 급진적이고, 좌파적이며, 외전(外傳)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미 짐작하셨겠만, 이 글의 출처는 ‘순자(荀子)’. 애시당초 유학의 경전(經傳)에서 밀려나버린 책이었습니다. ‘맹자’의 거울 반대편에서 그림자요 타자(他者)로서 존재했던 책. 몰래 돌려읽는 행위만으로도 석고대죄의 사유를 삼았을만한 시대가 있었음직한 책. 그 중에서도 제23편 ‘성악(性惡)’. 혹자는 순자 자신의 사상이라기보다는 후학들의 첨가로 의심하는 장(章). 허나, 누가 썼든 어떻겠습니까. 밑바닥 온갖 가식들을 남김없이 긁어내는 그 문장을 맛보는 거야 누구도 방해할 수 없겠죠.

其善者僞也.

(기선자위야)

(인간의) 선(善)이라는 것은 모두 (후천적인) 작위(作爲)에 기인한다.

프로이트식으로 얘기하면 선천적인 본성이란 이드(id)로 놓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일방향성 욕망의 총체인 이드. 그것의 완급강약을 조절하는 자아(自我:ego)도, 그것에 양심과 도덕성의 주사약을 투입하는 초자아(超自我:superego)도, 결국은 모두 다 후천적인 ‘작위’의 소산이 아닐까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프로이트는 매우 순자적이기도 합니다.

今人之性, 生而有好利焉.

(금인지성, 생이유호리언)

이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 보면, 타고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함이 있다.

이(利)! 이! 일찍이 맹자로 하여금 “노인장께서 불원천리하고 저희 나라에 오셨으니, 장차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 묻던 양혜왕(梁惠王·실제로는 위나라 혜왕)에게, “그대는 어찌 이(利)를 말하는가?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다!”라는 일갈을 하게 했으며, 훗날 이를 읽던 사마천으로 하여금 책장을 덮고 탄식하게 했던 이(利)!

허나, 순자는 망설임 없이 말합니다. “그래,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습니다. 이제 자본주의의 승리가 이해가 갈 만도 합니다.

順是, 故爭奪生, 而辭讓亡焉; 生而有疾惡焉, 順是, 故殘賊生, 而忠信亡焉; 生而有耳目之欲, 有好聲色焉, 順是, 故淫亂生, 而禮儀文理亡焉.

(순시, 고쟁탈생, 이사양망언; 생이유질오언, 순시, 고잔적생, 이충신망언; 생이유이목지욕, 유호성색언, 순시, 고음란생, 이예의문리망언)

이 본성을 따른다면, 서로 다투고 빼앗음이 생기게 되고, 양보란 없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성질이 있어, 이를 따른다면 남을 해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며, 충실함과 믿음이란 없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귀와 눈의 욕망을 따라 아름다운 소리와 색채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어, 이를 따른다면 음란함이 일어나게 되고, 예의(禮儀)와 문리(文理)는 없어진다.

순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아니었을까요? 마치 2020년대의 이 땅에서 직접 살아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연줄과 지연을 앞세워 주가조작과 금융비리와 뇌물수수를 총체적으로 횡행하는 이 땅 위에 도대체 무슨 사양(辭讓)이 있을 것이며, 나와 생각이 다른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배척하며 기껏 영화 한 편 보고 나와 ‘저쪽이 승리하면 계엄령 선포’ 운운하는 행태에 무슨 충신(忠信)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여기서의 ‘忠’이란 공자의 ‘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에 증자가 ‘충서(忠恕)’라는 해석을 붙였을 때의 그 ‘충’입니다]. 그야말로 엽기토끼가 울고 갈 세상.

“귀와 눈의 욕망을 따라 아름다운 소리와 색채를 좋아하는 경향…”이란 말에서는 OTT에 푹 빠진 사람들의 행태를 적확히 표현한 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허나, 음란(淫亂)을 가져오는 성색(聲色)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을 짚어 말하는지는 자명한 일이겠죠.

然則, 從人之性, 順人之情, 必出於爭奪, 合於犯分亂理, 而歸於暴.

(연즉, 종인지성, 순인지정, 필출어쟁탈, 합어범분난리, 이귀어폭)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을 방임하고 인간의 본래 감정을 따른다면,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분별을 해치고 이치를 어지럽힘에 합치하게 되며, 폭(暴)으로 귀착된다.

쟁탈(爭奪)… 범분난리(犯分亂理)… 그리고 폭(暴)! 과연 무슨 첨언이 필요하겠습니까. 본성을 방임하고 본래 감정을 따른 결과는 과연, 조폭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법인카드로 꼬박꼬박 배달 식사를 먹던 사람이 비리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듯 처신하고 총선과 차기 대선까지 승리를 점치는 꿈처럼 황당무계한 세계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입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 동안 그토록 고생을 해 왔더란 말인가요? 순자의 이 문장에서 마지막 글자, 폭(暴)은 지금의 이곳에서 칼날같은 여운을 길게 뽑아내고 있습니다.

故, 必將有師法之化·禮義之道, 然後, 出於辭讓, 合於文理, 而歸於治. 用次觀之, 然則, 人之性惡明矣. 其善者僞也.

(고, 필장유사법지화·예의지도, 연후, 출어사양, 합어문리, 이귀어치. 용차관지, 연즉, 인지성악명의. 기선자위야)

그러므로, 반드시 장차 스승의 가르침에 의한 교화와 예의(禮義)의 도(道)가 있어야, 연후에 양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문리에 합치하고 치(治)로 귀착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사악함은 분명하다. 선(善)이란 작위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후천적 교육이 중요하다. 이것의 순자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었습니다. 반드시 사법(師法)의 교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 참 답답한 일입니다. 벤처정신으로 똘똘 뭉친 ‘신지식인’이 우대받는 사회, 자본을 향한 실용적인 지식을 통해 재화를 창출하는 지식인이 대접받는 사회라면 과연 ‘교화’의 주체가 될 사(師)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그렇죠, 적어도 올바른 금융지식의 전수는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한 국문학과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신지식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작명소를 차릴까….”

그렇다면, 악(惡)은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것이니, 지식의 전수야말로 사람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9·11 이전 빈 라덴의 전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두꺼운 교범(敎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수년에 걸친 연구와 학습이 낳은 결과가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의 테러였던 것이지 않았습니까. 나름대로의 호고적 취미가 섞였을 것이 분명한 중국 동북지역 학자들의 면밀한 고고학적 지식과 탐구가 낳은 결과는 정치적으로 ‘중화민족’’통일적 다민족국가’라는 허상을 만들기 위해 감행한 고구려사와 발해사의 전면적인 강탈이 아니었습니까.

권력과 시장을 농락한 기업인에게서 나온 변명은 “첨단 금융기법을 썼다”라는 항변이었고, 고위 교육 관료라는 사람은 ‘대학입학에서 지역적 특색을 배제하기 위해 진짜 성적 따위는 무시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공공연히 발언하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판세가 멀찌감치 기울어진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대충 K팝 스타 몇 명 내세우고 홍보하면 다들 우릴 찍어 주겠지’란 생각에 국가적 역량과 관심을 어처구니없이 엑스포 유치에 올인하는 짓거리는 행정고시를 패스했을 엘리트 관료들에게서 나왔을 게 분명합니다, 지금 첨단과학이 그 실용성을 시험하는 곳은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전장이 아닙니까. 국호에 ‘민주주의’와 ‘인민’ ‘공화국’이란 거창한 이름을 단 자들이 핵과 미사일과 군사정찰위성으로 세계를 어지럽히는 건 또 어떻습니까.

지식은 악(惡)의 소멸에 기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식은 언제나 또 다른 악(惡)을 낳고 확대재생산해 왔습니다. 더 커다란 악(惡)의 길로 가기 위한 교량이기도 했습니다다. 그렇다면 순자가 말한 화(化)나 도(道)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식’과는 다른 좌표에 놓여있는 개념일 것입니다. 취업 못해 쩔쩔매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한 끝에 자장면을 배달한 지 몇 년만에 유명강사가 됐다는 식의 아리송한 ‘신지식’ 개념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라블레(Francois Rabelais·1494~1553)는 그의 작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심이 없는 지식은 인간의 혼을 멸망케 한다.”

원칙과 기본이 무너진 사회, 기괴한 ‘엽기’가 횡행하는 사회. 그것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궁(迷宮)과도 같은 세계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믿고 싶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갓길주행을 일삼는 무도한 사람들이 눈에 잘 띄는 것은, 묵묵히 원칙을 지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이 가득찬 출퇴근길 지하철 9호선 안 임산부석 근처에서 일부러 서 있는 그 많은 공중(公衆)의 모습에서, 오늘도 또다시 희망을 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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