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8. 파주 화폐박물관

경기일보 2023. 11. 3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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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에 위치한 화폐박물관은 동·서양의 고화폐와 현용화폐 등 3천8백여 점의 실물 화폐를 만나볼 수 있다. 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에는 ‘세상의 거의 모든 돈’을 볼 수 있는 화폐박물관(관장 정옥희)이 있다. 금빛의 ‘화폐박물관’이란 돋움체 글씨가 붉은 벽돌과 잘 어울린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전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전시실을 가득 채운 것이 돈이다. 돈에 둘러싸여 화폐에 얽힌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살펴보는 재미가 특별하다.

오는 12월까지 세계 다양한 나라의 새와 관련된 화폐가 전시되고 있는 '화폐속의 새' 전시. 윤원규기자

■ 화폐에 새겨진 새

기획전 ‘화폐 속에서 예술을 만나다-화폐 속의 새’는 올해 경기지역 문화예술 플랫폼 육성 사업이다. 새만큼 사랑스러운 존재가 또 있을까. 지폐 속에 등장하는 새의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다. 자연 속의 새를 찍은 천연색 사진과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그 새를 디자인한 지폐를 전시한 액자가 나란히 걸려 있다. 문득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시물을 배치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긴 부리로 꽃의 꿀을 빨아먹는 귀여운 ‘벌새’를 찍은 사진과 벌새를 디자인한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에서 1994년 발행한 10굴덴 지폐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로 알려진 극락조는 파푸아뉴기니 2키나의 모델인데, 화폐에 디자인된 것은 국가 문장(紋章)인 극락조의 모습이다. 2001년 발행한 스웨덴 20크로나에는 ‘닐스의 이상한 여행’의 동화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의 초상과 닐스가 거위를 타고 모험하는 풍경이 그려져 있다. 동화의 한 장면을 지폐에 담은 스웨덴의 문화가 사랑스럽다. 싱가포르 지폐에는 목이 흰 물총새가, 인도네시아 지폐에는 두 마리 백로가 등장한다. 덴마크 20크로네에는 18세기의 유명한 초상화가 옌스 유엘의 초상과 유럽참새 두 마리가 그려져 있고 중국 50위안 속에는 다섯 마리 비둘기가 날고 있다.

새의 실물 사진과 새를 디자인한 지폐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다. 화폐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을 비롯해 자연과 건축, 음악과 미술까지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 “화폐란 그 나라의 얼굴로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일정한 형태,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동일한 도안, 교환 가치를 나타내는 금액의 표시, 모든 거래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결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통용력 등입니다.” 박물관 관계자가 제시한 조건을 기준으로 화폐를 살펴보니 흐릿했던 질서와 원칙이 보이기 시작한다.

엽전(葉錢)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동전을 세는 단위가 '닢'(동전 한 닢, 두 닢 하는 식)이라는 설과 대량생산을 위해 만든 주물틀에서 나온 상평통보가 마치 가지에 달린 나뭇잎을 연상시켰기에 엽전이라는 설이 있다. 주물에 달려있는 엽전. 윤원규기자

■ 그 나라 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예술품

1층과 2층의 전시실에는 세계 130여개국의 화폐 3천8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이것을 예술, 문학, 과학 등 주제별로 분류해 전시하고 있다. 전시 공간을 재미있게 구성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1층 제1전시실에 전시한 대한민국의 화폐부터 관람을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화 ‘건원중보’를 자세히 살펴본다. 가지에 엽전이 주렁주렁 매달린 돈나무는 무엇일까? “쇳물을 녹여 흘려보내 상평통보를 만드는데 마치 나뭇가지와 나뭇잎처럼 보여 ‘엽전’이라 부르게 됐습니다. 한국은행에서 구해와 전시한 것이지요.” 엽전이란 말은 나뭇잎을 닮은 동전이란 뜻이다.

궁금했으나 잊고 있었던 오랜 의문이 풀린다. 상평통보가 상상 이상으로 많이 전시돼 있는데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냥(兩)’은 ‘원’만큼이나 익숙한 화폐 단위다. 무게의 단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1876년 개항까지 사용됐다. 1901년 화폐 조례가 공표되면서 등장했다는 ‘환(圜)’은 낯설다. ‘환’은 1953년 제2차 통화개혁 때 다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1962년 제3차 통화개혁 때부터 등장한 ‘원’이 현재까지 사용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화폐 단위다.

우리나라의 각종 고(古) 화폐들이 전시되고 있다. 윤원규기자

학생들이 독재자를 몰아낸 4·19혁명은 이승만 초상화 일색이던 지폐에도 새바람을 일으켰다. 1962년 발행된 지폐에 평범한 시민이 지폐에 등장한 것이다. “5·16 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저축을 독려할 목적으로 만든 100원권 화폐였는데 당시 조폐공사 직원에게 한복 입고 덕수궁으로 나오도록 해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그 모자는 지금도 생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념비적인 지폐는 군사정부가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한 달도 사용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후 등장한 인물이 세종대왕과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충무공 이순신이다.

“이 지폐를 잘 보세요.” 박용문 학예사가 가리키는 것은 1972년 제작한 5천원권 지폐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뜻밖에도 율곡 선생의 코가 너무 높다. 여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1970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지폐를 만들 능력이 되지 않아 영국에 의뢰해 제작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율곡 선생의 코를 서양인처럼 그린 것이지요. 우리의 인쇄 기술이 없어 영국에서 제조했기 때문이에요. 이 논란을 계기로 표준 영정제가 도입돼 기관마다 다르던 인물 초상을 표준화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의 화폐 제작 기술은 세계에서도 가장 앞선 나라에 속한다. 우리나라처럼 디자인부터 인쇄, 주화의 주조까지 100% 전 공정을 소화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몇 나라가 되지 않는다.

성서 시대와 로마 시대에 통용되던 주화를 발견하고 그 크기가 생각보다 훨씬 작은 것에 놀란다. 이처럼 오래된 화폐의 진품을 가까이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역사적 의미와 희귀성을 가진 유물의 가격은 상상 이상이다. 서양 것만 가격이 높은 것도 아니다. 구한말의 5원짜리 금화는 2억5천만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화폐박물관이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귀중한 유물이다. “화폐는 그 액면가와 관계없이 그 나라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폐 속의 미술, 음악, 문학, 과학 등 주제별로 분류 전시하고 있습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인물일 테니 그 인물들만 공부해도 한 나라의 정치와 역사, 의식과 문화까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화폐는 그 나라의 역사를 읽는 도구이고 그 나라의 의식을 보는 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폐에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담겨 있다. 100조마르크 지폐가 있다. 한국의 총통화량보다 많은 액수가 지폐 한 장이다. 0이 몇 개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패전국 독일에서 사용된 100조마르크 지폐와 1조마르크 주화, 유고 내전 때 유고슬라비아에서 발행된 500억디나르짜리 지폐도 볼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도 온통 돈이다. 제2전시실에는 시대별 세계 주화를 만날 수 있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의 기념주화와 화폐 관련 조형물도 전시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저금통을 만나볼 수 있다. 윤원규기자

■ 돈과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공간

박용문 설립자와 정옥희 관장은 은행원 출신 부부다. 제일은행에 입사해 30년을 금융 일에 종사한 전문인이다. 1985년부터 금융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은행 관련 자료를 모으고 취미로 화폐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파주 헤이리마을을 조성할 무렵 이곳에서 살기로 결심하면서 화폐 수집에 열을 올린다. 일본이나 유럽의 문화공간을 두루 탐방하면서 헤이리에 평생 금융인으로 일해 온 자신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살린 문화공간을 만들기로 다짐한 것이다. 부부가 한마음으로 노력해 2008년 전국 최초로 사립 1호 화폐박물관을 개관한다.

관에서 운영하는 것으로는 한국은행과 한국조폐공사의 화폐박물관이 있을 뿐 현재까지 사립화폐박물관은 이곳이 유일하다. 짐작하듯이 사명감과 애정 없이 박물관을 운영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의미를 소중히 생각하기에 경영은 어렵지만 즐겁게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가족과 어린이의 단체 방문이 꾸준하다는 사실이다. 전시실 중앙에 걸린 액자에 새겨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화폐박물관이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되새겨 본다. “…약은 사도 건강은 살 수 없고, 시계는 사도 세월은 못 산다. 돈의 가치는 그것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으니,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주인이 되자.”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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