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환갑을 넘은 최수종의 대표작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고려거란전쟁')

김교석 칼럼니스트 2023. 11. 3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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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를 닮은 ‘고려거란전쟁’의 파죽지세가 예사롭지 않은 이유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KBS의 새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2023년의 '약과'같다. 추억의 간식이었던 약과는 전통이나 정통이라기보다는 옛것, 노년층들만의 것 혹은 전통시장에서 가야 볼 수 있는 주전부리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 약과는 편의점은 물론 백화점과 한남동에서 젊은 세대에게 새롭게 비싸게 팔리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약과는 약과다. 오늘날 약과와 과거 시장통의 약과가 다른 음식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을 새롭게 해석한 영감과 시선, 첨예한 디저트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서울 한복판에서 경쟁력을 만들어낸 브랜딩 능력과 시대적 감수성에 걸맞은 개량을 통해 약과는 값비싼 화과자나 프랑스의 제과 못지않은 고급 디저트이자 간편하고 맛 좋은 과자로 우리에게 다시금 다가왔다.

KBS의 대하사극은 1981년 시작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래도록 엄청난 화제를 모으는 한국 드라마 산업의 꼭짓점이었으며 안방극장의 메인이었다. 그러나 올드한 콘텐츠의 대명사가 되며 어려움을 겪으며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고려 거란 전쟁>은 익숙한 대하사극인 동시에 무척 새롭고 낯설고 고급스럽게 다가온다.

채널부터 KBS1이 아닌 KBS2의 주말 저녁 슬롯에 편성했고, 처음으로 넷플릭스에 서비스한다. 장영실, 이방원, 왕건 등등 보통 주인공의 인물의 이름이나 <용의 눈물> 같은 상징을 내걸었던 관례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제작비도 남다르다. 최수종, 이원종 같은 사극 스타들도 있지만, 양규 역의 지승현이나 김동준을 비롯해 조정 대신으로도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등장한다. 제작비도 이슈다. 편당 8.7억 수준으로 270억 원 규모의 총제작비가 오늘날 드라마 시장에서 그리 높은 건 아니지만 PPL이 불가능하고, 글로벌 OTT와의 협업이 쉽지 않은 대하사극을 제작하는 입장에서 최고 수준의 투자다.

거대한 제작비를 들인 만큼 <고려 거란 전쟁>은 대규모 전투씬을 최신 할리우드 기술을 도입해 현실감 있게 연출하는 데 집중했다. 2020년 에미상 특수 시각효과상을 수상한 <더 만달로리안>의 버추얼 프로덕션 기법이나 '디지털 크라우드' 등 할리우드에서 활용하는 CG를 통해 극중 '귀주대첩', '삼수채 전투', 흥화진 전투'에서 대규모 병력을 묘사한다. 특히 '귀주대첩'은 그 런닝타임만 30분에 달한다며 기대감을 고조한다.

지상파 채널이 극도로 어려움을 겪는 지금, 대하사극이라니, 큰 기대감보다는 반신반의했지만 뚜껑을 열자 놀랍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1화 첫 장면부터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처럼 대규모 전투씬에서 잔인한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시작하더니 여권이 강한 고려의 문화를 비롯해 김치양(공정환)의 어린 아들을 죽이는 장면 등 기존 대하사극에서 본적 없는 자극들이 툭툭 던져진다. 그런데 주목할 지점은 큰 제작비를 들이고, 기술적 진보를 이뤘다는 볼거리가 아닌 대하사극에서 본 적 없는 스피디한 서사에서 호평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는 최수종이 출연하지만 그의 시점으로 진행되지 않을뿐더러, 조정에선 충신의 위엄을, 집안에선 바가지 긁히는 사랑꾼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는 잔재미가 있다. 전쟁이 주제인 만큼 간결한 코드와 선 굵은 서사로 스피디하게 내달린다. 중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적 고뇌와 욕망, 빌런의 존재와 암투를 이처럼 간결하게 묘사한 대하사극은 없었다. 황제 목종(백성현)의 시해 또한 단숨에 다룬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한칼에 비유할 만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그 대신 <고려 거란 전쟁>은 각자의 자리에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힘을 합치는 인물들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언더독 스토리로 로망을 자극한다. 특히 5화에서 황제 현종(김동준)에게 부월을 하사받는 강조를 표현한 이원종의 표정연기는 그의 필모 1순위에 꼽힐 만큼 극적이었다.

어느덧 환갑을 넘은 최수종을 다시 사극에서 만난 것처럼 익숙함도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제작 지원을 하고 할리우드 신기술을 적극 활용했다곤 하나, 강조가 두 차례 출병했을 때, 또 거란의 황제가 친히 40만 대군을 일으킨 출정식 등 스케일이 강조되어야 할 몇몇 장면에서 웅장하고 광대한 대서사의 시작이라기보다 뭔가 동사무소에서 예비군 소집한 듯한 우리네 대하사극 특유의 익숙한 소박함 또한 몇몇 장면에서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정말 생경한 볼거리도 있다. 1회 오프닝 시퀀스의 귀주대첩 장면에선 <반지의 제왕>의 로한 기마대의 모습이, 유능한 장수 아래 똘똘 뭉쳐 흥화진 수성 전투 직전의 순간을 연출한 5회 마지막 시퀀스의 압도적인 긴장감과 6화의 본격 전투 장면에선 <킹덤 오브 헤븐>과 같은 명작의 반가운 잔향이 스친다. 영화적 상상력과 표현을 품으려는 KBS의 대하사극이라니, 이미 6회까지만으로도 지금껏 40년 동안 대하사극에서 봐온 서사의 질감과 볼거리의 밀도와 물량이 다르다.

정변으로 옹립당한 황제 현종이 그의 스승이자 총사령관인 강감찬(최수종)과 함께 고려를 지켜낸다는 극의 줄거리 또한 어려웠던 시대를 헤쳐 나가고 극복한 조상들의 지혜와 성공의 이야기를 통해 위로와 희망을 준다는 대하사극의 유구한 미덕이 그대로 깔려 있지만, 할리우드식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골조로 하는 히어로 성장 서사라는 익숙한 코드가 더해진다. 그 위에 오늘날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영화적 상상력과 기술(표현방법)이 얹어지고 빠른 호흡, 익숙한 모습과 색다른 연출이 공존한다. 예를 들어, 보통은 신파나 판타지가 들어갈 자리에 화살받이가 된 백성들의 불가피한 희생을 그대로 표현하는 식이다.

익숙한 분위기에 남다른 스케일과 묘사의 자극,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웅서사가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질감의 대하사극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말을 다치게 하고 죽여 가며 촬영하는 연출을 관행으로 삼았던 이듬해에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고려 거란 전쟁>은 최수종이 나오고, 익히 아는 세트장과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익숙한 대하사극이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노년에 가까운) 중년 남성만을 위한 콘텐츠가 아니다. 이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대하사극의 맛을 몰랐거나 잊었던 세대에게서 비롯됐다. tvN <무인도의 디바>를 비롯한 수작들이 일제히 경쟁을 벌이는 지금, 시청률도 7% 이상으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고, 넷플릭스에서는 대하사극 최초로 한국 TV시리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무엇보다 화제성이 KBS 콘텐츠 중 이례적으로 높다. 이들 앞에 놓인 장애물은 거란이 아니라 연말 시상식이라고 할 정도로 새롭게 리뉴얼한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이 겨누는 과녁이, 그리고 이들의 파죽지세가 사뭇 예사롭지 않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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