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들 은행 믿고 ‘네, 네’ 하며 가입했는데… 8조 ELS 반토막

김은정 기자 2023. 11. 30.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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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현 금감원장 “은행, 고령자에 ELS 판매 적절했나”
“고객의 서명받고 녹취 운운하지만 책임 면제 안 돼”

최근 홍콩H지수 ELS(주가연계증권)의 대규모 손실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들이 고위험 상품을 고령자에게까지 무리하게 판매한 게 적절했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ELS는 주가지수 등의 등락에 따라 수익률이 정해지는 금융 상품인데, 2021년 1만2000대였던 홍콩H지수가 최근 5000대까지 폭락하면서 3년 만기가 돌아오는 내년 초 ELS 손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뉴스1

이 원장은 29일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과 간담회를 한 후 기자들과 만나 “고위험·고난도 상품이, 다른 곳도 아닌 은행 창구에서 고령자들에게 특정 시기에 몰려 판매됐다는 것만으로 금융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상 ‘적합성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적합성 원칙이란 금융회사가 소비자 투자 성향 등에 적합한 상품을 권유해야 하고, 충분히 이해하게 설명해야 하는 걸 뜻한다.

이 원장은 “홍콩H지수는 등락이 극심했고, 원금 손실이 발생한 전례가 있던 점을 고령 투자자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권유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2021년 6월, 집 판 돈을 맡기려고 은행을 찾은 이모(74)씨는 은행 직원에게 “좋은 게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1년 만기 은행 예금 금리는 1%로 낮았다. 은행원은 “6개월에 이자율은 3%나 된다”고 했다. “안전한 게 맞느냐”는 이씨의 질문에 은행원은 “안전하다”고 안심시켰다. 이후 기계음이 들려왔다. AI(인공지능) 목소리로 상품 구조와 손실 가능성 등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은행원은 “‘네’라고 답하시면 됩니다”라며 재촉했다. 이씨는 “‘예전에 투자했던 채권이랑 비슷한 것이겠거니’ 하고 네, 네 답하고 사인했다”며 “내 전 재산의 절반을 여기에 묻었는데, 그중 절반이 날아가게 생겼다”고 했다.

대규모 원금 손실이 예상되는 홍콩 H지수 연계 주가연계증권(ELS)을 은행에서 가입한 고령자들 대부분은 가입할 당시 상품 구조나 원금 손실 가능성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ELS는 주가 폭락 시 원금의 절반 이상을 잃을 수 있는 초고위험 상품으로 분류된다. 이런 위험한 상품을 예금하러 온 고령자에게 권유하는 것 자체가 불완전 판매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ELS를 많이 팔면 인사 평가 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령 손님에게도 ELS 가입을 권유한 직원들이 많았다”고 했다.

◇ELS 가입자 20% 이상이 65세 이상

일러스트=이철원

본지가 만난 65세 김모씨는 심지어 다른 사람이 대신해 ELS에 가입했다가 사달이 난 경우였다. “남편 회사 경리 직원이 은행에 갔다가 ELS를 추천받고는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저는 무조건 원금 보장되는 상품만 한다고 했는데, 은행 담당자가 직원 보고 대신 투자 성향 체크를 하고 대신 서명하게 해서 가입까지 돼버렸어요.” 딸이 최근 김씨 휴대폰에 ‘조기 상환 실패’ 문자가 온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됐다. 인터넷 카페에는 “까막눈의 74세 엄마가 홍콩 ELS에 만기 상환된 예금 전부를 넣었다. 내년 4월 만기가 돌아오는데 지금 절반도 못 건지게 생겼다”는 등의 글도 올라왔다. 은행에서 노모에게 동생 명의로 들게 했고, 안내 전화를 받은 동생이 당장 해지하려 했지만 은행원이 “높은 이자에 괜찮은 상품”이라며 걱정 말고 가시라고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에서 판매한 홍콩H지수 ELS 중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돌아오는 규모만 약 8조4100억원이다. 대부분 3년 전인 2021년 상반기에 가입한 것이다. 홍콩 H지수는 2021년 상반기 당시보다 50%가량 하락한 상태다. 지금보다 H지수가 20~30% 오르지 않으면 3조원대가 넘는 원금 손실이 우려된다. 내년 상반기 만기 예정액이 4조7726억원으로 가장 많은 KB국민은행의 경우, 가입자의 20% 이상이 65세가 넘는 고령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양진경

◇'금소법’ 생겼지만, ‘앵무새 AI’에 멋모르고 응답도

이번에 문제가 된 ELS는 2019~2020년 벌어진 DLF·사모펀드 대란 이후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는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판매됐다. 금소법이 발효된 것은 2021년 3월 말이지만 은행들은 법 제정 움직임이 있던 2020년 말부터 판매 과정에서 녹취를 강화하고 필수 설명 내용 등을 AI 기계음으로 읽어주고 답하도록 했다.

이런 조치들은 은행의 불완전 판매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은행들이 책임을 피할 방패막이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일부 은행들은 “고객이 제대로 설명을 들었다는 것을 일일이 서명받고 녹취했으니 불완전 판매가 아니다”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AI에서 나오는 설명이 너무나 빨라서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거나, “은행원이 ‘네, 네’ 답하면 된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 했다”는 반응이 많다. 박모(65)씨는 “마치 오토바이가 붕 지나가는 것처럼 설명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정신없는 와중에, 그냥 ‘네’ 하면 된다고 해서 따라 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복현 원장은 “은행들이 고객이 묻기도 전에 판매해 놓고 자필 서명, 녹취 등을 운운하며 피해 예방 조치를 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 면피”라며 “고객이 서명하고, ‘네, 네’라는 답변을 했다고 해서 (불완전 판매의)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은행들을 비판했다. 금감원은 이와 관련, 최근 은행 등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ELS(주가연계증권)

ELS는 주가지수 등의 등락에 따라서 수익률이 결정되는 금융 상품이다.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일정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면 약속한 이자를 받을 수 있지만, 주가가 범위를 벗어나 폭락하면 원금을 잃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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